75. 당신의 지옥이 되고 싶어2022.01.19.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듯 나를 응시하던 노에비안의 웃음소리가 침실에 낮게 깔렸다.
“어디서 편지라도 훔쳐봤나.”
“…….”
“집사나 하녀를 얼마나 족쳤지?”
“…….”
“아니면, 그 빌어먹을 주술 같은 걸로 아드리엔의 유령이라도 봤어?”
노에비안이 무섭도록 내게 돌진해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살기. 기어코 내 목을 비틀어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기가 충혈된 눈을 통해 내게 내뿜어졌다.
“……주술?”
“그래, 빌어먹을. 넌 주술사였잖아. 미개한 나라에서 온 미개한 주술사. 아드리엔의 유령도 네가 불러온 거지? 네가 불러와서 나를 미치게 만든 거야. 너 같이 역겨운 거짓말쟁이를 진짜 좋아하기라도 하라고 속삭였지?”
“무슨 헛소리신지.”
‘헛소리’라는 단어에 노에비안의 눈썹이 왈칵 구겨졌다. 모욕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를 비웃으면서도 나는 가슴이 선득했다. 약에 취한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노에비안이 내뱉는 말은 하나하나 내게 충격이었다. 그래도 드디어 내가 그토록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씩 내뱉는 것 같았다.
“아드리엔의 영혼이라도 불러낸 거야? 그래서, 그래서 노아라고. 노아라고…….”
아. 괴로운 건 헛소리라는 단어가 아니라 ‘노아’였나 보다. 나는 제정신이 아닌 노에비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어깨를 비틀었지만, 그의 손은 꼼짝도 안 했다.
“……블리에가 주술사였구나.”
“그만해, 그만! 그만 연기해!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사랑하긴 했어, 노아?”
“그만해!”
날 짓이겨버릴 것 같은 힘이었다. 어깨가 바스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어릴 적부터 마음을 주고받았던 사람이 로아드네스라는 걸 알면서도 왜 당신이 ‘안’이라고 속였어?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 로아드네스의 애칭인 로안의 ‘안’이 당신 이름에도 들어 있었으니 그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내가 속을 만했잖아. 그래서 ‘안’이라는 애칭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한 거야?”
격분해 붉어졌던 노에비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나랑 결혼한 거야? 아, 황태자를 위해서? 동부의 세력을 황태자에게 주고 싶어서?”
나는 순식간에 그의 손아귀에서 떨어져 나갔다. 노에비안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밀쳐냈기 때문이다.
“너, 뭐야.”
“그런데 왜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 그냥 날 속인 채 적당히 잘 대해주기만 하면 됐었잖아. 그런데 왜 그랬어.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이 원하던 건 우리의 혼인 관계만으로도 충분했잖아. 굳이 왜 쓸데없는 짓을 했어?”
“도대체 뭐야. 너 도대체 뭐냐고!”
“아드리엔.”
돌처럼 굳은 노에비안의 입꼬리에서 아까의 조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나를 방금 묻어주고 온 아드리엔의 시체를 보듯 멀거니 응시했다.
“내가 아드리엔이야.”
“말도 안 돼.”
노에비안은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드리엔은 죽었어.”
“응.”
“근데 어떻게 네가 아드리엔이야.”
“왜 나를 죽였어?”
거칠게 몰아쉬던 노에비안의 숨소리가 뚝 끊겼다. 그가 왜 나를 속였는지, 왜 블리에를 정부로 들였는지.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오늘 땅 밑으로 육체를 밀어 넣은 나는 지금, 이 순간 그것이 가장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로아드네스인 척, 나를 꾀어내 결혼까지 하고. 쓸데없이 사랑을 속삭이고. 마음을 나누고 입을 맞추고…….”
나는 노에비안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딱 그만큼 노에비안이 한 걸음 물러났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노에비안이 아주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드리엔이 아닌 이상, 아무리 블리에라 해도 알 수 없는 사실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렇게까지 해놓고…… 도대체 왜 나를 죽여버렸어.”
그리고 그 말 한마디에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무너졌다. 바닥에 털썩 무릎 꿇은 노에비안은 토악질을 하는 사람처럼 몸을 꿀렁이며 울부짖었다. 가끔 바닥을 긁으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 약 때문에. 약의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제정신인 순간조차 환각이 보이는 것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대답해야지.”
그는 약을 먹고 내게 왔던 무수한 밤처럼 흐리멍텅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도대체 왜 이래.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잖아. 대공비 자리를 주겠다잖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마음 놓고 쉴, 안식처가 되어달라는 게.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당신이 먼저 내 모든 것을 빼앗았잖아.”
“……내가? 내가 뭘 빼앗았지? 천한 너를 데려다 대공비까지 만들어준다는데 도대체…….”
노에비안이 제 손을 바닥에 짓이길 것처럼 뭉개며 내게 기어 왔다.
“아드리엔 피레타는 당신을 사랑했어. 아주 많이. 날이 갈수록 약해지는 몸을 저주하면서. 제 몸으로 물 한 모금 넘기기도 버거운 것에 진저리치면서.”
“나도 사랑했어.”
그가 목이라도 조여지는 듯 억지로 억지로 씹어 뱉었다. 움푹 팬 두 뺨에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 와 내가 거짓이라도 말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모든 게 거짓이었잖아?”
나 역시 켜켜이 쌓인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당신은 내게 첫눈에 반하지도, 진짜 나를 원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었잖아.”
몸을 떨며 내 말을 듣고 있던 노에비안이 우는 듯 웃었다.
“……맞아.”
나는 그만 힘이 탁, 풀려버렸다. 짐작한 것과 직접 듣는 것은 이렇게 다르구나. 새삼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데 그가 끅끅대며 웃더니 말을 이었다.
“처음엔 그랬지.”
그가 무릎으로 내게 걸어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절대로 울지 않으려 턱에 바짝 힘을 주었다.
“처음엔 그랬어. 난 아드리엔을 사랑하지 않았어.”
그가 블리에의 얼굴을 통해 정확히 과거의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하는 동안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렸지.”
꿈을 꾸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내 아내는 점점 내 세상을 물들였어. 점점 밝게. 점점 아름답게.”
“…….”
“그만큼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던 적은 없을 만큼.”
그가 내 손을 꼭 부여잡았다. 나는 그것을 떼어낼 생각도 않고 그의 입을 응시했다. 미친 사람처럼 웃던 입이 일그러졌다.
“왜 죽였냐니까.”
“아니야. 아니야, 난. 내가 어떻게 아드리엔을 죽여?”
그는 미친 사람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멈출 생각이 없는 그의 입처럼 눈물이 쉴 새 없이 그의 눈에서 떨어졌다.
“아드리엔을 살리기 위해 모든 걸 했어. 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내 곁에 두기 위해서!”
그가 내 다리를 꽉 끌어안고 소리쳤다.
“그런데 죽어버렸잖아. 그냥 이 세상을 떠나버렸잖아. 붙잡을 새도 없이. 그렇게…… 그렇게…….”
그러곤 풍성한 드레스에 고개를 처박고 미친놈처럼 중얼거렸다.
“그 짧은 시간조차 허락해주지 않았잖아…….”
그리고 으레 듣던 이야기들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고 비웃는 것처럼. 그렇게 나만 두고 떠나버렸잖아.”
“…….”
“내가 어쩔 수 있겠어? 어차피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내 것은 없는데. 어차피 내 것이 아니라 누구를 원망할 수조차 없는데.”
지겨웠다. 지긋지긋한 변명. 약을 하든 안 하든 그에게서 들을 이야기는 이제 없어 보였다. 피융-! 피융-! 어느새 어둑해진 창밖. 내 눈앞을 붉게 물들이는 빛에, 나는 잠시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
저 멀리서 붉은 불꽃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불꽃이 하늘을 수 놓으면, 푸른 별 하나가 떨어진다.] 끝을 알리는 신호탄이 울린 것이다.
“아드리엔은 내 것이 아니었어, 그래서 나는 매 순간 절망했어.”
터질 것 같은 내 심장 소리가 잠시 노에비안의 애달픈 목소리에 묻혔다.
“……노아.”
나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당신이 모르는 게 있어.”
“…….”
“아드리엔 피레타는, 당신 것이었어.”
울음을 뚝 멈춘 노에비안이 드레스 자락에 비비적거리던 얼굴을 멍하니 들어 보였다.
“아드리엔 피레타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어. 죽기 전날까지 당신을 돕고자 신문을 읽고 당신 소식을 찾아 헤맸어. 혹시라도 변방에서 당신이 다치기라도 했을까 봐, 심약한 나를 위해 그 소식조차 대공저로 전하지 않았을까 봐…….”
“……너…….”
“그러니 아드리엔 피레타는 당신의 것이었어. 이 세상 모든 게 당신의 것이 될 수 없었더라도, 죽기 직전까지. 아드리엔 피레타는 스스로 당신의 아내라 생각하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다 죽었어.”
노에비안의 젖은 얼굴이 순간 서럽게 일그러졌다.
“마지막에 볼 수 있는 얼굴이, 빌어먹을 하녀들이 아니라 당신이기를 바라는 고작 작은 소원만 안고. 숨이 넘어가던 마지막 순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
바보 같은 그날의 아드리엔을 떠올리자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내가 죽으면, 노아는 어떡하지…….”
“네가, 네가…… 감히…….”
“내가 죽으면 따라 죽겠다 했었는데, 그게 진심이 아니기를…….”
계속해서 고개를 젓던 노에비안의 목에서 꺽꺽대며 우는 소리가 시작됐다. 목에서 피라도 나올 것 같이 거칠고 축축한 소리였다.
“병들고 말라비틀어진 아내의 모습은 뒤편에 밀어두고, 건강하고 새로운 아내를 맞아 행복하기를.”
펑-! 펑-! 불꽃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렇게 바랐었다고, 아드리엔 피레타는.”
나는 솟구치는 눈물을 삼키며 조소했다.
“당신이 나를 이만큼이나 속이고 기만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당신을 놓지 못했을 거야. 당신이 날 죽이지만 않았어도. 날 죽여놓고 뻔뻔하게 이 여자를 가지려 안달하지만 않았어도.”
진심이었다. 시작이야 어찌 되었든. 내 찬란한 첫사랑이야 어찌 되었든. 나는 이 남자와 함께했던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그가 내가 죽기 전 단 한 번이라도 나나 로아드네스에게 사과하고, 애원하고, 사랑한다 속삭여 줬더라면.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내가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면, 도대체 누구의 것이었다는 거야?”
그래서 그토록 괴롭고 힘들었다.
“아드리엔은 죽기 직전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죽었는데, 처음부터 남의 것이었다고? 그러니 가질 수 없어 괴로웠다고?”
“나는…… 나는…….”
“그러니 지금 너는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어.”
나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치맛자락을 생명줄처럼 그러쥐고 있는 노에비안을 밀어냈다.
“네 것이었던 걸 지키지도 못했잖아.”
그는 힘없이 밀려난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젖은 채 흐트러진 검은 장발. 미동도 않는 젖은 눈동자는 소리를 내는 내 입술만 보고 있었다.
“예쁜 불꽃이지?”
나는 어느새 흠뻑 젖어버린 얼굴도 무시하고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바깥을 향해 턱짓했다.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야, 노에비안.”
그리고 지저분하게 널려 있던 감정들을 끌어모아 토하듯 내뱉었다.
“저 불꽃은 황태자가 널 버렸다는 신호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창밖에서 병장기가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짧은 정적을 부수었다.
“동부가 당신을 지지하지 않겠대. 내가 편지를 보냈어. 그레고리와 비앙카에게.”
하지만 노에비안은 일어날 힘조차 없는 듯, 내가 자신의 것이었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내가 죽기도 전에 정부를 만들었고, 그 여자가 지금 이 집에 살고 있다고.”
쩔그럭거리는 철제 갑옷 소리가, 무섭도록 가까워지고 있었다.
“죄인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들라!”
바깥에서 남자들의 굵직한 목소리가 저택을 가르듯 흘러들어왔다.
“동부의 힘이 필요한 황태자 전하께서, 드디어 당신을 버리시기로 했다네.”
황태자의 배신 소식에 잠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노에비안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내가 아드리엔이라는 것도. 자신이 블리에에게 속았다는 것도. 심지어 믿었던 황태자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도. 그 어떤 것도 믿기지 않아 정신이 나간 남자의 얼굴을 나는 눈에 똑바로 아로새겼다.
“……왜.”
노에비안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블리에에게 하는 말일까. 아드리엔에게 하는 말일까. 그 누구에게 말하는 것이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내가 당신의 안식처라도 될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천만에, 난 당신의 지옥이 되고 싶어.”
당신이 그랬듯이. 그의 앞에서 늘 블리에처럼 웃어야 했던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온전히 나답게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