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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 (76/171)

76.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2022.01.22.

16558464723962.jpg“죄인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들라!”

돌림노래처럼 계속 울려 퍼지던 우렁찬 목소리들과 함께 마침내 침실 문이 강제로 열렸다. 1층에 있던 사용인들의 혼비백산한 비명이 터진 댐의 물처럼 침실 안으로 쏟아졌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황실 기사단이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포박했다. 아. 드디어 끝이구나. 발끝에서 넘실거리는 기묘한 희열로 나는 온몸이 뜨거워졌다.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이 방이 떠나가라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일어났던 노에비안의 무릎이 속절없이 꿇려졌다. 쇠줄에 몸이 칭칭 감기는 노에비안은 언젠가 내가 꿈에서 그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16558464723967.png“……정말 아드리엔이야?”

비록 꿇어앉아 있지만 형형한 푸른 눈이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나는 대답 없이 빙긋 웃었다. 노에비안의 뺨이 다시 굵은 눈물로 빠르게 젖어 들었다.

16558464723967.png“정말, 아드리엔이야?”

떨리는 목소리는 이유 모를 절망으로 겹겹이 덧칠된 묵직한 소음이었다.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여전히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듯 어지러웠다. 내 얼굴과 눈을 헤집는 시선은 왠지 그가 지난 몇 달간 내게 했던 행동들을 되짚어 보는 것만 같았다. 번들거리던 눈이 한없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듯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묶기는 했어도 대공을 함부로 끌고 갈 수는 없었는지 양팔을 부축해 일으켰다. 순순히 끌려갈 듯 힘없이 뒷걸음질 치던 노에비안은 내가 눈을 피하지 않고 있자 돌연 곁에 있던 기사 둘을 몸으로 밀어버리고 내게 달려들었다.

16558464723967.png“대답해!”

16558464723962.jpg“각하!”

16558464723967.png“대답해! 대답해, 제발!!”

팔도 묶여 있는 주제에 노에비안은 달려든 그대로 몸을 구부려 제 입술을 내 목덜미에 묻었다.

16558464723967.png“아드리엔, 아드리엔…… 아드리엔……!”

식어 빠진 눈물이 내 목에 닿았다. 그의 몸은 오한이라도 든 사람처럼 떨리고 있었다.

16558464723967.png“내가, 내가 정말 당신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야?”

1655846472401.png“……당신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제 아무것도 안 믿기로 했거든.”

또 다른 비명과 인기척이 대공저 아래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졌다. 일이 지체되자 로아드네스가 결국엔 제 기사들을 이끌고 들어온 게 분명했다. 까맣게 죽은 노에비안의 짙푸른 눈동자에 돌연 희미한 광기가 어렸다. 이미 반쯤 미쳐 있던 노에비안은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듯 쓰게 웃어 보였다.

16558464723967.png“나는, 나는 블리에 때문에 당신을 저버린 게 아니야.”

1655846472401.png“…….”

16558464723967.png“제발, 제발 그런 오해만은 하지 말아줘. 내 진심까지 그렇게…….”

노에비안이 절박하게 씹어뱉었다.

16558464723967.png“다른 건 몰라도, 당신을 죽였다는 그런 이야기는…… 내 손으로 당신을 죽였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줘, 부탁이야. 아드리엔. 아드리엔…….”

같은 말의 반복일 뿐이다. 나는 지난 2달 동안 학습해 온 대로, 이 뻔뻔한 남자에게서 들을 수 있는 진실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655846472401.png“끝까지 실망시키지 말고, 그냥 조용히 사라져.”

내 딱딱한 목소리에 숨을 들이켜던 노에비안은 다시 자신을 끌고 가려는 기사들을 다시 한번 거부하고 내게 바짝 붙어섰다.

16558464723967.png“……내가 왜 당신과 밤을 보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그가 이상해 쳐다보자 시뻘겋게 충혈된 눈과 마주쳤다. 그의 얼굴 전체가 펄펄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꿀렁이는 것 같았다. 마지막을 직감한 사람의 발악 혹은 고백 같기도 했다.

16558464723967.png“내가, 내가 당신을 원하지 않아서?”

1655846472401.png“……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16558464723967.png“여태껏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가지지 못할 아드리엔.”

1655846472401.png“이제 와서…….”

16558464723967.png“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본 적은 있나?”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저 내가 로아드네스와 먼저 마음을 나누었고, 아파서 육체적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가지지 못했다는 표현을 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죽었으니 영원히 가지지 못할 것이라 말했던 것이라고. 마침내 침실 앞까지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16558464723967.png“나는,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았어. 오히려 죽어가는 당신을 보며 괴로웠지. 당신이 아파서 죽은 게 아니라면 당신을 죽일 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야. 제발, 믿어줘 아드리엔.”

1655846472401.png“……계속 지껄여 봐.”

나는 오해를 풀고 싶은 듯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노에비안에게 서늘하게 답했다.

16558464723967.png“내가 없는 이 대공저에서 당신을 죽였다면 분명…….”

때맞춰 로아드네스의 일행이 침실로 들이닥쳤다. 모든 걸 끝내기 위해 들이닥친 로아드네스의 반짝이는 얼굴이 보였다. 서늘했지만, 내 얼굴을 보자마자 허물어지는 얼굴. 동시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속에서, 나는 노에비안의 마지막 속삭임을 똑똑히 들었다.

16558464723967.png“……황태자 바르데날도.”

로아드네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16558464723967.png“황태자 바르데날도뿐이야.”

아. 어째서 이 남자는. 끝까지 나를 지옥으로 빠뜨릴까. 나는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기사에게 곧바로 연행되는 노에비안에게서 로아드네스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나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당신의 지옥이 되고 싶다는 내 말에 답이라도 하듯. 노에비안 트로비카. 한때 내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는 또 다른 이름으로 내게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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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 광장에서 시작된 불꽃놀이가 절정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붉은 불꽃으로 시작된 불꽃놀이 행사는 어느새 푸른 불꽃으로 바뀌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16558464789565.png“일을 제대로 하는 놈들이 이렇게 없나?”

16558464723962.jpg“성급하셨습니다. 알아서 모시고 나왔을 텐데요. 기다리시면 어련히 알아서 했으려고요.”

본래는 대공저 정문에서 노에비안을 데리고 나오는 이들을 기다리기로 했었다. 그 시간이 길어지고, 또 한 번 소란이 있어 보이자 로아드네스는 참지 못하고 직접 올라가 대공을 잡아 마차에 밀어 넣었다.

16558464789565.png“죄인에게 마차라니 가당치도 않지.”

16558464723962.jpg“그래도 황족이시잖습니까. 재판도 없는 즉결 처분인데 최소한의…….”

16558464789565.png“너희는 행렬에서 앞서지 말고 멀찍이 뒤에서 따라라.”

16558464723962.jpg“예?”

불안함이 깃든 부관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로아드네스는 한참 대공비의 침실 쪽을 올려다가 겨우 시선을 거뒀다.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끝까지 아드리엔을 향해 뭐라 지껄이던 걸 보았다. 정신없이 울부짖으면서도 상처 입은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며 귓가에 속삭였었다. 잘 빚은 도자기 인형 같던 아드리엔은 어느 순간부터 표정이 무너져 내리더니 까마득히 가라앉는 듯한 눈으로 로아드네스를 바라보았다. 마주치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미묘한 눈빛이었다.

16558464723962.jpg“마음이 쓰이시면 저희에게 맡기시고, 대공저에 계시지 그러십니까?”

16558464723962.jpg“전하께서 부인과 남으시면, 아마 부인께 좋은 말이 돌지 않을 겁니다.”

닐의 걱정과 빈센토의 조언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로아드네스는 빈센토의 말에 일리가 있다 생각하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엔은 아드리엔의 할 일을 끝마쳤다. 자신 역시 노에비안과의 빚을 청산하지 못하면, 아드리엔과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분명 그런 생각으로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이상하게 손끝이 찌릿하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돌처럼 굳어 있던 아드리엔. 끝까지 아드리엔을 부르짖으며 대공저를 벗어나지 않으려 발버둥 치던 노에비안. 연달아 솟아나는 기억은 괴로웠다. 절박하게 울부짖던 노에비안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마음이 더 급해졌다. 아드리엔이 자신의 정체를 밝힌 게 분명했다. 노에비안을 어떻게 믿게 했는지는 몰라도, 목이 터져라 울부짖는 소리는 그녀에게서 ‘진짜’ 아드리엔을 보았기에 낼 수 있던 절규였다.

16558464723962.jpg“이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전하?”

별관 쪽에서 기사들에게 제지를 받으면서도 눈을 반짝이는 동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로아드네스는 별다른 대답 없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며 닐을 대공저에 남겼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동부의 사람들이 더 이상 아드리엔을 상처입히게 둘 순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움직이며, 로아드네스는 그를 북부로 연행했다. *** 얼마나 달렸을까.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북부 트로비카 영지를 지나서도 한참 더 가야 하는 변방 중의 변방 성으로 무기한 구금 및 근신이 결정됐다. 황태자의 권한으로 재판 없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형벌이었다. 드넓은 수도를 벗어나, 이제 겨우 작은 영지 하나를 지났을 뿐인데, 로아드네스는 한적한 숲길에서 돌연 마차를 멈추라 명령했다. 빈센토의 불안한 시선이 그를 살폈지만, 이미 대공저에 있는 귀부인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는 주군이 큰일을 저지르진 않을 거라 믿으며 그가 원하는 대로 기사들을 멀찍이 물렸다. 둘 다 충실한 황태자의 사람들이니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겠거니 생각해서였다. 기사들이 100걸음 이상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로아드네스가 말에서 내려 마부까지 멀리 떨어지라 명했다. 마차 문을 열자, 고개를 푹 숙이고 시체처럼 있는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보였다. 마부 자리에 있던 전등 하나를 집어, 던지듯 맞은편 자리에 놓은 로아드네스가 노에비안의 멱살을 한 손으로 틀어잡았다. 마차 바닥에 떨어져 있던 시선이 일말의 반성하는 기운도 없이 곧바로 로아드네스를 직시했다. 광인처럼 흐트러진 모습과 아주 잘 어울리는, 번뜩이는 눈빛이었다. 로아드네스의 눈을 한참 바라보던 노에비안이 웃음을 터트린 건 바로 그때였다. 어둑한 숲길을 낮게 울릴 만큼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노에비안은 로아드네스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16558464723967.png“여전히 동화 속 왕자님처럼 살고 있군.”

자비 한 점 없이 딱딱하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16558464789565.png“……동화 속 왕자는 전장에서 구르지 않을 텐데.”

16558464723967.png“네가 아드리엔을 구한 것 같나? 천만에.”

16558464789565.png“그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입을 뭉개려는 걸 참고 있으니까.”

로아드네스가 멱살을 잡은 그대로 노에비안을 마차에서 끌어내려, 곧바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16558464789565.png“자비를 바라지도 마. 형님에겐 몰라도 내겐 네 놈 새끼 같은 숙부 따윈 없으니까.”

16558464723967.png“여기서 목이라도 치려는가.”

로아드네스가 말없이 노에비안을 결박한 줄을 검으로 베어냈다. 옷깃 하나 스치지 않고 줄만 끊어낸 깔끔한 솜씨였다. 곧이어 바닥에 엎어진 노에비안의 눈앞에 길쭉한 검 하나가 떨어졌다.

16558464789565.png“묶여 있는 사냥감엔 취미가 없어서.”

16558464723967.png“……야만스럽군.”

16558464789565.png“검 들지. 살려고 바르작거리는 벌레 새끼 죽이는 건 익숙하거든.”

16558464723967.png“그냥 죽이면 될 걸 왜 힘을 빼는 거지?”

16558464789565.png“몰라서 묻나?”

로아드네스가 옆구리에 찬 검을 서서히 빼 들었다. 흐릿한 달빛에도 날카롭게 빛나는 검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16558464723967.png“바르데날도가 날 죽이라 했나? 네 단독 행동인가? 착한 아우가 할 만한 짓은 아닌데.”

거칠게 쉰 목소리를 뱉어낸 노에비안의 눈은 로아드네스가 아닌 아득히 먼 어딘가로 향했다.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했다. 당연히 죽어야 하는 건 노에비안 트로비카였고.

16558464723967.png“내 말이 틀렸나? 형님을 사랑하는 네가 그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왜 이런 감당하지 못 할 짓을 하지?”

16558464789565.png“개소리하지 말고 검이나 들어.”

16558464723967.png“내게 아드리엔을 빼앗겼던 원한인가?”

16558464789565.png“말은 똑바로 하지. 네가 개수작을 부린 거라고.”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로아드네스는 당장 저 목을 베어버리고 심장에 검을 박아넣고 싶다는 충동이 일면서도, 동시에 도대체 왜 그랬는지 묻고 싶었다. 아드리엔은 왜 죽였고. 도대체 왜 아드리엔을 제게서 앗아가려 했는지. 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온몸을 찢고 뭉갠 다음 진실을 털어 넣는 순간 가차 없이 목을 벨 생각이었다.

16558464723967.png“그래서 네놈이 순진해 빠진, 동화 속 왕자님이라는 거다. 로아드네스.”

노에비안의 말라비틀어진 입술에서 그다음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16558464723967.png“과연 내가 네 것을 빼앗았을까?”

노에비안이 비틀거리면서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짚고 일어났다.

16558464723967.png“몸이 아파 동부에 처박혀 있는 공녀 하나를…… 내가 어떻게 알고 아내로 점찍었다고? 첫눈에 반해서?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그런 사람이었나?”

16558464789565.png“하고 싶은 말이 뭐야.”

16558464723967.png“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랬을 거라 생각하나?”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밤의 숲길.

16558464723967.png“네가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형님,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아드리엔과 내 결혼을 주선했다. 이 바보 같은 놈.”

죽어 있던 노에비안의 눈이 기이하게 반짝였다. 삶의 온갖 경멸과 분노를 끌어 담은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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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64723967.png“바르데날도가 네게 아드리엔을 양보해? 어림도 없지.”

16558464789565.png“……뭐?”

16558464723967.png“아드리엔 피레타가 황태자비 후보가 됐던 그 순간부터, 황태자는 도리스 카스타냐와 아드리엔 피레타, 둘 다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었단 말이다.”

죽음을 선사할 사신처럼 노에비안을 내려다보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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