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어2022.02.09.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내가, 금발이었다고?”
“네, 왜 그러세요?”
나도 모르게 요나에게 의지하던 손을 뺐다. 훈기로 가득한 욕실이었지만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요나는 허전해진 손을 내려다보다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마님?”
그래, 처음 블리에의 몸에 들어왔을 때도 어떻게 속눈썹 색깔까지 똑같을 수 있냐고 신기해했지. 생각해보면 머리카락이 금발이니 속눈썹도 금색이었을 뿐인데.
“요나, 넌…… 뭘 알고 있니? 내가 또 뭐라 했니?”
“머리카락에 대해서요?”
이상행동을 하는 나를 잠자코 보던 요나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내 말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꺼내는 얼굴이었다.
“2주에 한 번씩,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주셨던 약과 숯가루를 섞어 머리에 발라주어야 한다고……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1일차에는 뿌리 부분이 황금빛이 되고, 2일차에는 물에 적시자마자 마법처럼 색이 변한다고…….”
블리에는 요나를 왜 이렇게까지 믿고 있었을까?
“……요나, 너는 왜 그렇게 나를 잘 따르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커다란 눈을 끔뻑이던 요나가 이네 뺨을 발그레 붉혔다.
“블리에 님께서는 제 은인이시니까요.”
아. 있는 줄도 몰랐던 퍼즐 하나가 맞춰진다.
“엘라콘에서부터 갈 곳 없던 저를 직접 거두어주시고,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해주셨잖아요. 갑자기 부끄럽게 왜 그런 걸 물으세요? 새삼스럽게…….”
“……내가 주술사였을 때부터?”
“마님!”
요나가 눈을 크게 뜨고 굳게 닫힌 욕실 문을 살피다 목소리를 낮췄다.
“그건 절대로 입에 담지 말라 하셨잖아요!”
나는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을 주체하지 못하고, 팔을 쓸어올렸다. 요나는 내가 욕탕을 나와 추위를 느낀다고 생각했는지 빠르게 나를 다시 욕탕으로 들여보냈다.
“갑자기 그런 말씀을…… 많이 힘드셨죠, 그동안? 자유롭게 사시던 블리에 님이 저택에 갇혀서 생활하시는 동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뭐든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세요. 요나가 이 세상의 끝까지라도 가서 블리에 님이 시키신 일을 해낼 테니.”
앳되고 귀여운 목소리는 나를 향한 충성심으로 가득했다. 나는 붉은 자국이 남은 요나의 통통한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요나가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다가, 내 손을 꼭 잡더니 제 뺨에 비비적거렸다.
“마음 쓰지 마세요. 어차피 블리에 님이 아니면 죽었던 목숨. 이까짓 뺨 한 대 맞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제 몸을 던져 대신 맞아주기까지 하는 하녀. 어린 하녀의 맹목적인 충성심이 어째서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마지나 다른 하녀들처럼, 요나도 백작저의 하녀인 줄로만 알았지 한 번도 블리에가 데리고 들어온 하녀라고 생각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블리에를 무서워할 때도, 요나만은 항상 내 곁을 지키며 종알거렸다. 어디를 가든 따라나서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시키는 것은 군말 없이 무엇이든 했었지. 그 충성심은 순진한 어린 하녀의 동경이 아닌, 엘라콘에서부터 시작된 진심이었구나. 이렇게 가까이에 블리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두고 몰라봤다니.
“요나, 내 원래 머리색이 금발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또 있니?”
“저밖에 몰라요, 블리에 님. 요나는 절대, 아무에게도 블리에 님의 비밀을 말하지 않아요. 약속해요. 블리에 님이 대공 전하께도 말씀드리지 않으신 걸 제가 어떻게 말하겠어요.”
로아드네스에게 맡겨두었던 블리에의 일기장을 되찾고 싶어졌다.
“……그래, 그럼 다시 염색해줘. 마지가 오기 전에.”
“네!”
요나가 재빨리 내 머리에 약을 치덕치덕 발랐다. 나는 거울로 시선을 옮겨, 금발이 점점 검은색으로 바뀌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거울 속 블리에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너는 누구야?’
멀찍이 떨어진 거울을 아무리 주시해도, 여전히 대답해주지 않는 그녀의 얼굴에 대고 나는 무용한 질문을 계속했다.
‘어째서 함께 작당했던 노에비안도 모르게, 머리색을 감춘 거야?’
마지가 들어와 ‘요나, 너도 참 정성이구나. 그렇게까지 안 해도 마님의 머리카락은 늘 윤이 나는데.’ 하는 소리와 요나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며 멋쩍게 웃는 소리가 차례로 귓전을 스쳤다.
‘블리에,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어.’
급격히 몰려드는 피로로 눈을 감았다. *** 사용인들이 많이 빠져나간 대공저는 적막했다. 나는 이제 상처뿐인 이 대공저 안에 홀로 있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저택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옛일을 떠올려도 예전만큼의 분노나 슬픔이 차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랬다. 나는 은은히 불을 밝힌 복도를 걸으며, 침실로 돌아와 요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했다. 요나의 말에 따르면, 블리에는 엘라콘에서 활동하던 주술사였다고 한다. 실제로 주술을 행하는 사람이라기보단, 떠돌이 주술사들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걸 따라 하며 살다가 제국으로 넘어와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되었다고. 요나는 엘라콘과 제국 사이 국경에서 떠돌던 고아였는데, 산속에서 또래 아이들과 들개처럼 떠돌다가 겨울에 식량이 없어 굶주릴 때, 블리에를 만나 살아남았다고 했다. 대부분이 엘라콘 출신이었던 고아들은 돈을 받아 그곳에 남고자 했고, 요나는 제국 출신이라 블리에를 따라 백작저에서 그녀를 모시게 되었다고. 그래서 주술사로 떠돌며 살았다는 말도 블리에에게서 들은 것이지, 본인이 직접 본 것 같지는 않았다. 요나에게서 더 들을 만한 말은 없었지만, 베일에 싸여 있던 블리에에 대해 이만큼이나 알아낸 것은 큰 성과였다. 분명 큰 성과인데.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수도에 와서 애니의 무리에게 상처받았던 트라우마가 백작저에서 자연스럽게 고쳐지고 있었다. 더 이상 몸이 아프지 않은 나는 거리낄 것이 없었고, 대공비가 되어 내 하녀들에게 잘해주고 싶었던 만큼 요나와 마지를 대했다. 요나의 충성심이 그런 내 변화가 아닌, 본래의 블리에에게 향해 있다고 생각하자 서글픔이 몰려들었다. 블리에는 자신의 육체를 잃음으로써. 노에비안은 평생을 일궈놓았던 명예가 추락함으로써. 마땅히 받을 만한 벌을 받았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 나 자체로 얻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런 걸까. 블리에의 몸에 들어와서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었다는 빛바랜 원망 때문일까. 바보 같은 생각을 끝낸 건 또다시 떠오르는 로아드네스의 얼굴 덕분이었다.
“아…….”
나는 울고 있었다. 뺨에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자 얼굴이 자연스레 일그러졌다. 이 서글픔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모든 것은 블리에의 몸을 빌려 얻은 것들이지만, 단 하나. 죽어가던 아드리엔은 몰랐던 거대한 마음이 있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 로아드네스의 마음이. 내 어처구니없는 실수에도, 몇 번이나 상처받은 채로도 내가 도망가지 않기만을 바랐던 남자. 나는 돌연 주저앉았다. 거대한 슬픔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나를 아드리엔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아드리엔으로서 사랑해주는 단 한 사람마저 알게 된 진실 때문에 멀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슬픔과 공포가 동시에 뒤섞였다. 노에비안이 황태자의 이름을 언급한 그 순간부터, 내 분노는 방향을 잃었다. 황태자가 내 죽음과 연관이 있다면 그의 ‘대의’를 위해서이지 내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일 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허탈했다. 동시에 그 때문에 더 냉정하게 황태자에게 어떻게 진실을 들을지 머리를 굴릴 수 있었다. 노에비안을 생각할 때처럼 매 순간 절망하지 않아도, 내 죽음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볼 사람이 로아드네스라면. 유일한 동복형제이자 평생을 지켜왔고 사랑해온 그의 형님이라면. ‘모든 일’이 끝나면 로아드네스와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며,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이 흐릿해지고 만다. 주신은 내 편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랬다면 내게 해를 가한 자를 처단하고 나서도 그자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괴롭진 않겠지.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눈앞에 놓인 것만 생각하자.’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로아드네스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른다. 이상한 이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노에비안의 거짓말에는 이골이 났으니, 그의 말이 꼭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 내 죽음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두 군데인가? 본인이 죽여놓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카스타냐 공작과 도리스가 연관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러니 더 확인해야겠어.’
번뇌를 거듭하던 나는 젖은 얼굴을 닦고 마음을 다잡았다. 로아드네스가 바르데날도에 대한 의심을 알아채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보고 판단하면 될 것이다. 흐릿하던 머릿속이 명징해졌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부인?”
그리고 명징해진 것은 머릿속뿐만 아니라 침침하던 시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복도 끝에서 촛대를 들고 오던 집사 가스팔이 내 앞에 멈춰 섰다. 그의 눈은 혼란과 약간의 반가움이 뒤섞여 있었다.
*** 가스팔은 황태자궁에 편지를 보낸 게 이제 몇 번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 자신은 이제 어찌 처신해야 하느냐고 몇 번을 물었는데도, 황태자에게서는 오늘도 답장이 없었다. 황태자와 그의 사람들은 대공비의 장례식 마무리를 도맡아 하겠다더니, 이윽고 대공의 행렬을 뒤쫓았다. 가스팔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졸지에 두 명의 주인을 잃은 듯한 기분에, 가스팔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 역시 할머니 쪽이지만 귀족의 핏줄이 섞여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귀족의 저택을 전전하며 젊은 나이에 대공의 집사까지 올랐지만,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애초에 날 때부터 완전한 귀족이었던 이들과는 출발선이 달랐다. 그는 황태자의 줄을 잡아 신흥 귀족으로 지방의 영지를 받아 중앙에 진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물론 자신의 대에서는 한계가 있겠지만, 자신의 자손들은 어릴 때부터 아카데미도 다니고 더 높은 관직을 얻어 공적도 세우길 바랐다. 그런데 그 길을 도와줄 사람 중 한 명은 돌연 유배나 다름없는 형벌을 받았고, 또 한 명은 연락도 되지 않는데 자신이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마음이 심란해 저택을 돌아다니던 그는, 2층 복도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가스팔의 눈은 빠르게 반짝였다. 그래, 비록 여러 남자와 염문이 있는 질 나쁜 여자이지만 끈 떨어진 신세는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대공이 저리되었으니, 차기 대공비 자리는 이제 아예 없는 자리나 마찬가지. 새로운 남편이 필요한 젊은 미망인의 옆자리는 자신이 제격이 아닌가? 게다가 블리에 아카시아는 아카시아 백작저에 대한 권한도 아직 있을 터였고, 황태자비의 시녀이기도 했다. 굴러들어온 호박이 바로 이런 것인가.
“……여기서 뭐하십니까, 부인.”
사내 홀리는 데는 도가 텄을 테니, 제 신세를 알아차린 여자가 여기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게 분명했다. 흐트러진 여자의 얼굴은 방금까지 울기라도 했는지 약간 젖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느꼈다. 지금이 기회다. 저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또 다른 끈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 황태자만 믿고 있자니 자신도 보험이 필요했다. 가스팔은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자신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출신도 모르는, 미망인에다가 곧 파혼당할 여자를 받아줄 귀족 사내는 아무도 없다. 어쩌면 저 여자에게도 자신이 최선일지 모른다. 씰룩거리는 입을 감추며 여자가 잡을 때까지 손을 내밀던 가스팔은 여자가 아무 반응 없이 손을 응시하고만 있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언제고 자네와 깊은 대화를 할 날이 있을 줄 알았네.”
약간 잠긴 여자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노래처럼 들렸다. 가스팔은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도는 것을 느끼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여자의 다음 말은 자신의 예상과 달랐다.
“나는 자네의 죄를 알아.”
촛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데 정작 밝게 빛나고 있는 건 여자의 눈이었다. 일렁이는 여자의 눈은 매력적인 이성을 향한 설렘의 빛도, 기회를 잡아 신분을 상승하려는 낮은 자의 욕망도 아니었다.
“……네놈의 잔재주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볼까, 우리.”
그의 ‘죄’를 논하며 가진 잔재주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는 여자의 눈은 굴종을 명령하는 지배자의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