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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날 버리지 마 (82/171)

82. 날 버리지 마2022.02.12.

가스팔은 블리에의 표정 변화가 너무 극적이라, 잠깐 입만 벙긋거리다 정신을 차렸다.

16558465995784.jpg“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1655846599579.png“대공이 대공비에게 선물을 줄 때, 네놈이 늘 직접 골라 보냈다며?”

16558465995784.jpg“그게 어찌 죄가 됩니까!”

그는 어이가 없어 낮게 소리쳤다. 이 여자에게 익히 말한 적 있었던 그의 자랑거리였다.

16558465995784.jpg“대공 전하의 지시였고, 대공비 전하께선 선물을 받아보실 때마다 행복해하셨습니다!”

1655846599579.png“그랬겠지. 바보같이.”

블리에의 입가에 조소가 퍼졌다. 그게 이상하게 소름 끼쳤다.

16558465995784.jpg“지금, 지금 저랑 뭐 하시자는 겁니까?”

가스팔은 블리에가 이러는 이유를 몰라 말을 더듬었다. 주저앉아 그를 노려보고 있던 블리에가 서서히 일어났다. 일어나는 도중에도 블리에의 표정은 수십 가지로 변했다. 완전히 자세를 잡고 섰을 때는 아까의 가련함은 단 한 톨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번데기에서 탈피한 나비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의 얼굴로, 블리에는 고개를 쳐들었다.

1655846599579.png“대공비에게 선물을 줄 때마다, 네놈이 대공을 대신해 쪽지를 썼지.”

16558465995784.jpg“다른 저택에서도 그 정도는 합니다! 게다가 대공께서는 바빠서 집안을 돌보실 여유가 없으셨고, 그마저도 대공 전하의 지시였습니다! 문제가 뭡니까?”

생억지를 쓰는 블리에에게 말려들까 봐 가스팔이 빠르게 변명했다. 이 여자가 이런 식으로 몇 사람이나 곤란하게 하는 것을 지켜봐 온바. 열정적으로 자기변호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1655846599579.png“네놈이 남의 필체를 흉내 내 보내지 않았느냐.”

16558465995784.jpg“대공 전하께서는 황실에서 교육을 받으신 분입니다. 황족은 처음 글을 배울 때부터 같은 글씨를 배우고요. 저는 황태자께서 직접 지목해 대공께 보낸 집사입니다. 당연히 그 정도는 저 역시 익히고 있단 말입니다!”

1655846599579.png“아무리 같은 글씨를 배웠어도, 사람마다 필체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네놈도 뭔가 이상하지 않았나? 왜 대공께서 글씨체를 두 개로 나누어 네게 지시를 하는지.”

가스팔은 너무 놀라 손에 든 촛대를 놓칠 뻔했다.

16558465995784.jpg“그, 그걸 부인이 어떻게……?”

1655846599579.png“대공비를 그리 사랑한다던 대공은 어째서 자신이 직접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

16558465995784.jpg“그. 그야 무척 바쁘시고…… 이미 혼인을 하셨으니 편지 정도야 사람을 시켜…….”

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대공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기 바빴지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자신도 나랏일을 들여다보고 참여할 수 있다는 자부심에 부풀어 신경도 쓰지 않았다.

1655846599579.png“그동안 대공비에게 썼던 수많은 쪽지와 편지…… 거기에 쓰인 글씨. 대공이 따로 네놈에게 다른 필체를 보여주고 그대로 익히라 하진 않았나?”

맞다. 확신에 가까운 여자의 음성이 아니더라도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혼인과 동시에 저택을 하사받은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 트로비카 대공가가 영지가 아닌, 수도에 정식으로 기반을 마련하고 가문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던 중요한 행사가 바로 대공의 결혼식이었다. 그리고 대공은 수도의 저택을 맡은 그에게 가장 처음, 구겨진 편지 하나를 주었다. 그 편지 속 필체를 그대로 그의 것으로 만들라는 명령이었다. 드디어 은밀한 임무를 맡는다고 생각해 열심히 글씨를 익힌 가스팔은 새로 익힌 글씨로 고작 연서나 선물 쪽지나 쓰는 게 불만이었지만, 일이 많아 곧 잊어버렸다.

16558465995784.jpg“그……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부인의 생각보다 저는 대공가에 관련된 수많은 일들을 처리합니다. 그중 하나일 뿐입니다.”

1655846599579.png“멍청한 놈.”

블리에 아카시아의 붉은 입술이 길게 늘여졌다.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가스팔은 불안감을 키웠다.

1655846599579.png“그 필체가 누구의 것인지 아느냐?”

16558465995784.jpg“대, 대공 전하의…….”

1655846599579.png“로아드네스 2황자.”

가스팔을 결국 촛대를 놓쳤다. 그들 사이를 밝게 비추던 촛불이 사라지자, 금세 주변이 조금 어두워졌다.

1655846599579.png“로아드네스 2황자 전하의 것이다.”

가스팔은 그 이름만으로도 오금이 저릿했다. 그는 대공의 부관인 레일론 경이 그 황자에게 어떤 수모를 받고 무슨 꼴로 왔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혼비백산하며 대공저로 돌아온 레일론의 바지가 형편없이 더러워져 있고, 보고하러 들기 직전까지 횡설수설하며 말을 더듬는 꼴을.

1655846599579.png“전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네놈은 어찌 될까?”

가스팔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문제아라고 소문난 황자에게 거슬렸다간…….

16558465995784.jpg“부인? 위에 계십니까?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아래층에서 저택을 지키던 닐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뻗어졌다. 가스팔은 닐이 말하는 ‘전하’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막무가내로 이 대공저 앞에 천막을 치고 사용인들을 조사하라 시켰던 그 미친 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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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백해진 가스팔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나는 닐에게 대답했다.

1655846599579.png“……모시세요.”

16558465995784.jpg“부, 부인!”

1655846599579.png“네놈의 목숨이, 황태자 전하뿐만 아니라 내게도 달려있단 걸 똑똑히 기억해라.”

가스팔의 얼굴에 아주 잠시지만 화색이 돌았다. 지금 당장 로아드네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지 열정적으로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16558465995784.jpg“예, 예-!”

16558466058629.png“집사가 손님도 맞이하지 않고 이 밤중에 뭐 하는 거지?”

그 찰나의 순간,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기척도 없이 2층 복도까지 올라온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누가 봐도 수상하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가스팔에게로 향했다.

16558466058629.png“대답.”

16558465995784.jpg“아,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16558466058629.png“뒷말을 흐리는 놈치고 떳떳한 놈을 못 봤지.”

로아드네스의 손이 검집으로 향하자 가뜩이나 부릅뜬 가스팔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16558465995784.jpg“머, 머물고 가신다면 손님방을 치워두라 이르겠습니다!”

뒷걸음질 치며 벗어나려는 가스팔의 움직임보다 로아드네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리 서두르지도 않는 기색이었던 로아드네스는 군홧발로 가스팔의 정강이를 까버렸다. 가스팔은 억 소리도 못 내고 무릎을 바닥에 갖다 박아야만 했다.

16558466058629.png“네 주인에게 인사도 안 하고 사라지는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로아드네스가 무릎 꿇은 가스팔을 내 쪽으로 밀어냈다. 발 하나로 가볍게.

16558465995784.jpg“무,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부인?”

1655846599579.png“가 보게.”

가스팔이 비틀거리며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 와중에 로아드네스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접기도 했다. 정적이 가득한 복도에 둘만 남겨진 우리는 침묵했다. 낑-. 낑-. 그때, 익숙한 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들어왔다.

1655846599579.png“……코완?”

로아드네스가 데려온 듯, 난간에 묶인 코완이 내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며 낑낑대고 있었다. *** 묘한 정적과 함께, 아드리엔이 로아드네스를 안내한 곳은 대공비의 침실이었다. 침묵을 견디다 못해 대공저 안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로아드네스는 그녀가 어째서 침묵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불안해졌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불안감과 함께 들어간 대공비의 침실은 녹빛으로 가득했다. 캐노피가 늘어진 거대한 침대. 고풍스러운 협탁과 콘솔들. 손때가 거의 묻지 않은 새것 같은 물건들 사이를 배회하던 로아드네스의 시선은 침대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1655846599579.png“……이 넓은 대공저에서 실제 내가 머물렀던 곳은 저 침대 하나라고 볼 수 있어.”

손끝으로 가리키지 않아도, 로아드네스는 아드리엔의 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꽤 크다고 생각했던 침대는, 아드리엔이 근 2년간 벗어날 수 없었던 곳이라 생각하자 작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단전을 터트릴 듯한 불안감이 그의 목 끝까지 차올라 숨통을 막았다. 한참 동안 눈에 새겨넣을 듯 침대를 더듬어보던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천천히 아드리엔에게 옮겨갔다. 그녀는 창틀에 기대서서, 로아드네스를 보고 있었다. 낑-! 낑낑-! 손에 쥔 코완의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늘어지기를 반복했다. 코완은 오랜만에 본 아드리엔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은 듯 미친개처럼 팔딱였다. 로아드네스는 발광하는 개의 목줄을 꼭 쥐고 자신의 비겁함을 자조했다. 황궁에서 나와, 곧바로 말에 올라타 달려왔다. 하지만 대공저가 시야에 들어올수록 손에 식은땀이 나 견딜 수 없었다. 마물을 앞에 두고도 초연했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아카시아 백작저에 맡겨두었던 코완을 데리고 대공저로 왔다. 코완을 보며 다정하게 웃고 쓰다듬었던 아드리엔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엔이 기뻐할 얼굴을 보고 싶어서라기보단, 아드리엔의 서늘한 시선밖에 떠오르지 않아 데리고 온 거였다. 로아드네스는 당장이라도 아드리엔을 끌어안고 싶어하는 자신과 이 개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결국 목줄을 침대 기둥에 묶어두었다. 그리고 한참 그녀를 등진 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을 반복하다가 조용히 검을 뽑았다.

16558466058629.png“……아드리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아드네스가 서서히 뒤돌았다. 아드리엔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뽑아 든 검을 그녀의 뒤에서 쏟아지는 달빛에 비추었다. 아직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피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검에서 튕겨 나간 빛이 아드리엔의 눈으로 향했다.

16558466058629.png“대공의 피야.”

1655846599579.png“……죽였어?”

마침내 열린 아드리엔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로아드네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16558466058629.png“미안해.”

1655846599579.png“……죽였어?”

로아드네스는 진심으로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죽일 생각으로 검을 찔렀다.

16558466058629.png“형님…… 황태자 전하가 오셔서 말리셨어.”

1655846599579.png“…….”

16558466058629.png“대공이…… 널 속인 건 맞지만, 자신을 종용한 건 형님이라는 말을 했어.”

1655846599579.png“…….”

16558466058629.png“그리고 형님은 그걸 부정하지 않았어.”

로아드네스는 고해성사를 하듯 말을 뱉어냈다.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말이 줄줄 나왔다.

16558466058629.png“언제고 그를 다시 죽이러 갈 거야.”

그 결심은 진심이었다. 황태자가 몸을 던지는 바람에 불발되었으나 그는 언제고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죽일 생각이었다. 변명처럼 이어지는 그의 말에도,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죽였냐고 물었던 아드리엔의 눈은 고요했다.

1655846599579.png“대공이 네게도 그런 말을 했구나.”

아드리엔은 그렇게 한참을, 로아드네스의 검에 묻은 피만 바라보았다. 로아드네스는 그 의미를 몰라 더 불안했다. 그렇구나. 그를 죽이고 싶다더니. 죽이지 않았구나. 결국에는 모두가 한통속이었어. 너도 그럴까? 아드리엔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면 질식하지는 않을까.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드리엔이 이 검으로 자신을 찌르고 싶다고 하면 기꺼이 내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고요한 아드리엔의 눈은 아주 잠시지만 참담한 빛을 띠다가 사그라들었다. 숨막히는 정적에 낮게 깔리는 소리는 여전히 아드리엔을 향해 달려가고 싶어 하는 코완의 낑낑거림뿐이었다. 허공을 배회하던 아드리엔의 시선이 온전히 그에게로 향한 건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1655846599579.png“나는 이제 황태자 전하에 대해 조사해보려고 해.”

한참을 고민한 대답이 불현듯 그에게로 쏟아졌다.

1655846599579.png“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나는 상관없어. 네 가족이고, 네가 사랑하고 지키고 싶어하는 분이니 존중해.”

잠시 혼란스러운 빛을 띠던 얼굴은 창백했지만, 차분했다. 로아드네스는 조용히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1655846599579.png“하지만 난 여기까지 온 이상, 멈출 수가 없어.”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로아드네스는 머리로는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다른 중요한 말들보다 ‘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말에 절망했다. 아드리엔이 말을 더 잇기 전에, 로아드네스는 그녀를 향해 한걸음 성큼, 다리를 뻗었다. *** 덩치가 큰 사내가 다가오자 곧바로 숨이 막혔다.

16558466058629.png“……돕게 해줘.”

자신이 다가가자 흠칫하는 내 모습에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서서히 무너졌다.

16558466058629.png“네 말대로, 형님은 어머니가 부탁한 내 유일한 동복형제이자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야.”

한 발짝, 또 한 발짝. 로아드네스가 다가올수록 나는 속으로 숨을 흡, 흡 들이켜야 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16558466058629.png“그러니 더 내가 알아야지.”

로아드네스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 아래로 짙게 그늘진 그림자가 덜덜 떨렸다. 그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건드리려는 것은 난데, 그가 더 떨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그가 나를 원망하며, 제발 그쯤에서 멈추라고 말려주길 바랐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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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66058629.png“친구…… 친구여도 좋으니까, 제발.”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16558466058629.png“제발, 날 버리지만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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