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아카시아 백작 대리2022.02.19.
햇살이 따뜻한 오후였지만 황태자비 궁은 냉랭했다. 도리스는 눈앞의 가엾은 귀부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차림새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잠을 잘 이루지 못한 듯 버석한 얼굴과 눈 밑에 진하게 드리워진 그림자. 그리고 살짝 여윈 듯한 얼굴은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 시즌 데뷔탕트 준비에 여념이 없는 아이린이 궁에 들지 않은 상태라 응접실은 더 적막했다. 눈앞의 블리에는 기가 죽어 있는 상태라서 그렇다 쳐도 주세타 자작 부인은 입을 딱 다물고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라, 무슨 일 있나요?”
“아닙니다.”
노우라의 눈은 도리스를 따라 한참 블리에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도리스는 블리에의 초라한 꼬락서니와 그것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자신에 대해 이 멍청하고 늙은 귀부인이 소문을 퍼트려주길 바랐다.
“무슨 일은 블리에에게 있었으니, 당연하지만요.”
도리스가 낮게 웃으며 식어버린 차를 곁에 있던 화병에 부어버리고 찻잔을 살짝 들었다. 노우라가 재빨리 그 찻잔에 찻물을 부었다.
“몸도 마음도 성치 않을 텐데, 곧바로 입궁까지…… 블리에에게는 휴식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도리스가 다정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눈을 바닥에 내리깔고 처연히 앉아 있던 블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이지만 강렬한 거부감이 일었다. 아드리엔을 닮은 여자가,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쳐냈다. 물론 이 여자가 직접 칼을 빼 들고 심장을 찌른 건 아니었지만,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서부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유로 깔끔하게 쳐낸 데에 이 여자의 공이 분명 있다.
‘하지만 과연, 계속 쓸 일이 있을까?’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치하해야 하지만, 생각해보면 분수에 맞지도 않은 욕심을 부리다가 대공에게 배신당한 건 이 여자의 업보가 아닌가? 대공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 한들, 그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정부 하나 없는 귀족이 어디 있냔 말이다.
‘순진하고. 감정적이고. 눈치는 없지만, 묘하게 일은 잘하는데.’
문제는 저 낯짝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고, 묘한 감정이 피어오른다는 것이다.
“시녀 일을…… 그만두라는 말씀이신가요?”
블리에의 떨리는 목소리에, 도리스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다정하게 웃었다.
“무슨 섭섭한 말을! 내가 의지할 곳 없어진 블리에에게 어찌 그런 잔인한 말을 하겠어요? 다만 블리에에게는 휴식이 당장 시급해 보여서 하는 말이랍니다. 안 그런가요, 노라?”
“예, 맞습니다. 비 전하.”
노우라에게서 나오는 즉답에 도리스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입술을 꾹 깨물며 몸을 떨던 블리에는 한참 도리스를 보다가 그녀가 물러가도 좋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어났다.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곧 전하께서 저를 찾아주실 때까지, 요양을 잘 하겠습니다.”
도리스는 블리에가 공손히 말하고 나간 뒤, 문이 닫힐 때까지 노려보다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맞지. 대공을 쳐냈는데, 굳이 로아드네스의 눈앞에 저 여자가 얼쩡거리게 궁에 들일 필요가 없어.’
도리스는 가끔 스쳐 지나는 로아드네스를 볼 때마다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황태자가 제 눈치를 보며 낮아질수록, 늠름한 로아드네스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달력에 표시해둔 합방 일에 시선을 돌리자 눈썹이 마음처럼 비틀렸다. 황태자와 후사가 없다면, 이대로 황태자만 바라보는 게 바보 아닌가. 그가 정말로 생식능력에 문제가 있어 합방을 피해 온 걸지도 몰랐다. 만에 하나 그와의 합방 이후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씨 없는 황태자와의 미래를 도모하기보단 황태자를 무너뜨리고 동정표를 받아 로아드네스를 가질 수도 있지 않겠나? 형님이 죽으면 그 아내를 아우가 부양해야 한다는 옛법은 폐지된 지 오래였지만, 더 이상 황태자파에 카스타냐를 막을 만한 대공 노에비안도 없으니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다.
“노라, 거울을 가져와요.”
도리스는 노우라가 즉시 내민 손거울 속 제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머리 염색도 새로 했고. 차림새도, 머리 모양도, 심지어 향수까지 아드리엔의 대용품이던 블리에와 비슷한 향을 뿌렸다.
‘로아드네스는 아드리엔 피레타 그 계집을 잊지 못하는 거야.’
그러니 블리에 같이 격에 맞지도 않는 여자와 꽤 오랫동안이나 스캔들이 났던 것이다. 그가 아드리엔을 원한다면, 그래서 그를 가질 수만 있다면 도리스는 기꺼이 아드리엔이 되어줄 수 있었다.
“노라, 오늘 입궁할 때 2황자 궁 쪽에 깃발이 걸려 있던가요?”
“예? 아…… 그랬던 것 같아요. 제2 기사단 사람들도 몇몇 본 것 같고요.”
“아이린이 올 때까지, 노우라는 여기서 좀 쉬고 있어요.”
“예? 전하! 혼자 어디를 가시려고……!”
*** 요즘 도리스는 황태자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다른 것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릴 적, 황태자비 후보에 이름을 올렸을 때. 도리스는 순진하게도 후보에서 탈락한다면 자연히 2황자 로아드네스의 비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정말 순진했지.’
도리스는 지금 당장 2황자 궁으로 들이닥칠 생각이었다. 황태자에 대한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다고 찾아가면 로아드네스는 그녀를 거절하지 못하리라. 충동적이었지만, 그 행동을 저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황태자비 궁 입구에서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외부로 이어진 회랑 입구에서, 그림처럼 로아드네스와 블리에가 서 있었다. 블리에, 그 여자가 회랑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별처럼 반짝이는 얼굴을 한 로아드네스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팔을 내밀고 초라한 여자를 에스코트해 갔다.
“전하! 전하, 하녀도 대동하지 않고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세요? 이 외투라도 걸쳐 입으시고……!”
“아니, 내가 착각했어요. 다시 돌아가죠.”
도리스는 멀리 점처럼 사라지는 남녀를 끈질기게 보다가 뒤돌아섰다. 이가 으득으득 갈렸다.
‘아드리엔 피레타. 너는 죽어서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미친 여자처럼 뛰쳐나가던 도리스가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다시 응접실로 돌아가자, 외투를 들고 쫓아왔던 노우라는 황망하여 멈춰 섰다. 노우라 역시 사라지는 남녀의 뒷모습을 얼핏 보았었다.
“노라!”
날카롭게 자신을 찾는 황태자비에게 달려가면서도, 노우라는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던 블리에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비 전하께서 가끔 부인의 이름을 잊으신 것처럼 ’노라‘라고 부르시며 은근히 무시하시는 것 같던데.’
‘이름도 제대로 불리지 못하는…… 그런 모욕을 받으면서도…….’
그리고 대공비가 되지는 못했어도, 로아드네스 2황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황태자비 궁을 떠나는 블리에의 뒷모습이 뇌리에 강렬히 남았다. *** 닐이 내 행방을 착실히 전하고 있는 듯, 내가 아침에 입궁하자마자 황궁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던 로아드네스는 황태자비 궁을 거쳐 황태자 궁까지 나를 에스코트했다. 황태자 궁의 분위기는 입구부터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황태자의 가장 큰 세력인 대공이 갑자기 그리됐으니 전체적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듯 모두의 행동이 조심스럽고 조용히 이루어졌다.
“그 집사 놈은 왜 데려왔습니까?”
“아, 좀 시킬 일이 있어서요.”
“시킬 일?”
“당분간 그 집사의 주인 노릇이나 해보려고요.”
긴 복도의 끝, 알현실 앞에서 로아드네스가 딱 멈추어 섰다. 불만이 있어 보였는데,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주인이 필요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네?”
머리를 올려 단정한 눈썹이 드러난 로아드네스가 한참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닙니다.”
짧게 한숨 쉰 로아드네스가 보일 듯 말 듯 픽 웃더니 표정을 싹 바꾸고 알현실 문 앞을 지키는 시종에게 턱짓했다. 손님 목록을 살피던 시종은 로아드네스의 사나운 시선에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다가, 곧바로 황태자에게 아뢨다. 육중한 알현실 문이 열리자, 이미 들어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정중히 숙이고 문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나가기 직전에 나를 힐끔 살피고 빠르게 사라졌다.
“오셨습니까, 백작 부인. 로안.”
황태자는 아주 창백하고 피곤한 얼굴로 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이했다.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낯빛이 아주 어두웠다. 이전에 머물던 손님을 위한 찻잔이 치워지고, 빠르게 새로운 찻잔에 찻물이 부어졌다. 일사불란하게 손님맞이를 끝내고 시종들이 나가자 황태자가 우리의 착석을 권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습니다.”
“마침 황태자비 궁에 들렀다가 오는 참입니다, 전하.”
황태자의 낯빛이 더 어두워졌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핼쑥한 그의 얼굴을 살폈다. 테이블 아래, 로아드네스가 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순간 놀라 로아드네스를 쳐다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황태자에게 박혀 있었다.
“로안과 함께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같이 오면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 아니지. 그런 뜻이 아니란다.”
로아드네스가 제 형님에게 약하기만 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꽤 듬직하게 자리를 지켰다.
“부인을 이리 부른 이유는, 부인의 용기와 결단력에 감사를 표하기 위함입니다. 론타는 상과 벌이 확실한 나라이고, 나는 이 나라의 황태자로서 개인의 안녕보다 대의를 택한 부인에게 치하를 하고 싶습니다.”
내가 아드리엔인 줄 모르는 황태자가 내게 병을 주고 약을 준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씁쓸해지는 입맛을 느끼며 슬그머니 로아드네스에게 잡힌 손을 빼, 가지런히 무릎 위로 손을 모았다. 황태자에게 박혀 있던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곧장 내게로 옮겨왔다. 나는 그의 시선을 못 본 체하고 황태자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황태자의 성정이라면 분명 이런 이유로 나를 부를 것 같기는 했다. 방금 도리스에게서 묘한 기운을 느낀 참이니 타이밍이 기가 막히지 않은가. 나는 도리스가 나를 버리려 한다는 것을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치하는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제거하고 싶어 하던 도리스에게서 받아야 했는데, 그녀는 내게 휴식만을 권했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나는 도리스에게 내 쓰임을 다시 증명함과 동시에, 합법적으로 이 황태자를 조사할 명분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도리스도, 황태자도 다 내가 곁에서 지켜봐야 할 잠재적 적이었기 때문이다.
“부인이 아니었다면, 이 엄청난 사실을 모른 채 그냥 넘어갈 뻔했습니다. 숙부를 내친 것은 나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질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셨으니 기탄없이 소원하는 바가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무엇이든, 괜찮을까요?”
망설이다 떼어지는 내 입에 집중하던 황태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권한으로 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바르데날도. 당신은 내 죽음에 어디까지 손을 뻗었을까.
“대공비가 되실 뻔했던 분이니 마땅히 제가 보살펴 드려야 하는 것도 맞고요.”
대공비라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로아드네스가 다시 몰래 팔을 뻗어 내 손을 꽉 잡았다.
“부인의 거취가 확실해져야, 제 마음도 편해질 것 같습니다.”
무지한 사내의 걱정 어린 표정에 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다면, 제가 원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전하.”
“예, 말씀하십시오.”
“저를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으로 임명해주시길 원합니다.”
황태자가 대번에 얼빠진 표정을 했다.
“그게, 무슨…… 평범한 귀부인을 제 보좌관으로 임명할 수는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다른 부탁을…….”
“아니요, 전하. 전하는 하실 수 있으십니다.”
황태자의 얼굴이 난처해지고, 로아드네스가 내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난처한 얼굴은 로아드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와 상의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로아드네스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엄밀히 말하면, 저는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아니라 아카시아 백작 대리가 아닌지요.”
내 말뜻을 가늠하느라 가늘어졌던 바르데날도의 눈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다. 깨달았을 것이다. 아내상속법.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단번에 론타 최고의 로맨티스트로 만들었던 그 법안.
“후계 없이 작고한 귀족의 작위는, 향후 5년간 그 아내에게 귀속된다.”
“부인……!”
“그러니 저는, 지금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아닌 아카시아 백작 대리가 아닐까요?”
‘내 거취가 확실해져야 당신 마음도 편하겠다고?’
미안하지만, 당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건 내 계획에 없답니다.
“전하의 권한으로 아카시아 백작을 전하의 보좌관으로 들여주세요.”
당신이 로아드네스가 지킬 만한 사람인지, 내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라도 찍어내야 할 사람인지…… 노에비안이 만든 이 같잖은 법을 이용해서라도 꼭 확인해야겠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