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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그런 게 친구면, 나는 친구 없었습니다 (85/171)

85. 그런 게 친구면, 나는 친구 없었습니다2022.02.23.

황태자의 충격받은 표정은 꽤 볼만했다. 자신이 전폭적으로 지지해 밀어주었던 법안을 걸고넘어지자 단번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로아드네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었다. 나 역시 황태자의 시선을 따라 로아드네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로아드네스 역시 꽤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로아드네스를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내 늘어지는 입가를 살피던 로아드네스는 내게 들릴 만큼만 깊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1655846661859.png“그렇다는군요, 전하.”

내게 힘을 실어주는 말이었다. 황태자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로아드네스마저 내 편을 들자 정말 난감한 듯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러면서도 로아드네스의 눈치를 꽤 오래 살폈는데, 노에비안이 내 결혼을 황태자가 종용했다는 걸 고백한 후로 둘 사이가 어색해진 것 같기도 했다. 황태자는 소파 손잡이에 한참 손가락을 두드리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16558466618597.jpg“생각해보겠습니다, 부인.”

16558466618602.png“…….”

내가 생각해도 갑작스러운 제안이기는 했다. 하지만 내 말이 틀린 말은 아니기에 황태자의 고민이 깊은 것도 당연할 것이다. 여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기엔, 황태자의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인 그의 외할머니 윈스터 후작이 걸릴 테니까 말이다. 물론 나는 그것까지 숙고하여 말한 것이기에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16558466618597.jpg“만약 된다고 해도, 부인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겁니다. 더 이상 혼인으로 거취를 결정하고 싶지 않아 그런 거라면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16558466618602.png“아니요. 저는 황태자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고 싶습니다.”

16558466618597.jpg“…….”

16558466618602.png“제가, 전하께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하거든요.”

바르데날도의 눈은 아주 잠깐이지만 흥미로운 빛을 띠었다가 사그라들었다. 흥미를 드러낼 자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16558466618602.png“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분명 있으실 거라 확신해요.”

그 눈을 똑바로 보고 하는 아주 강한 확신의 말에, 황태자의 눈이 다시 한번 일렁였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엘라콘에서 유학 중이던 9황자 에페로가 그 어떤 사전 연락도 없이 론타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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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스팔은 신문을 받아보자마자 다이닝 룸으로 달려갔다. 블리에가 여상하게 앉아 이 저택의 주인처럼 식사를 하고 있었다.

16558466618637.jpg“부인! 보십시오!”

9황자 에페로의 귀국 소식이 신문 1면에 있었다. 블리에는 별다른 반응 없이 식사를 마무리하고 입을 헹궜다.

16558466618637.jpg“부인!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16558466618602.png“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16558466618637.jpg“제가, 부인께서 명하신 일을…….”

16558466618602.png“집사.”

성급하게 시작되는 말에 블리에가 표정을 굳히고 그를 쏘아봤다. 가스팔은 한쪽 눈썹이 쑥 올라간 채 못마땅한 눈빛을 쏘는 블리에를 보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16558466618602.png“내가, 자네에게 뭘 명했길래 이리 소란이지?”

아. 이 불여우 같은 여자가 모르는 체 하려는구나. 가스팔은 정확히 일주일 전. 블리에가 자신을 황궁으로 데려가 준다는 말에 날 듯이 기뻤었다. 황태자와 연락이 안 된다며 시무룩해 있을 때 내려온 도움의 손길이었다. 하지만 블리에의 도움은 순수한 호의가 아니었다.  

16558466618602.png‘에페로 황자에게 편지를 써.’

16558466618637.jpg‘예?’

16558466618602.png‘노에비안 트로비카의 글씨로. 황제 폐하의 탄신일이 코앞인데 어찌 아들이 되어 연락 한 통 없는지. 폐하께서 많이 보고 싶어 하신다고 말이야.’

16558466618637.jpg‘부인!’

16558466618602.png‘자네는 이미 황태자 전하께 버림받았어. 자네를 생각하셨다면 대공께서 그리 되신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아무 연락 한 통 없으시겠나? 연락을 받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대공 전하를 따라 북부의 이름 모를 구석에 보내지겠지. 원칙대로라면 자네는 대공 전하를 모시러 가야 하는 것 아니겠나?’

  그는 블리에가 입궁할 때 같이 입궁해 황태자의 편지를 담당하는 시종을 찾아가 따졌다. 그동안 자신이 보낸 무수한 편지를 걸러냈을 시종은 그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대공의 실각 이후로 편지가 물밀 듯이 몰려와 사사로운 편지는 대부분 걸러졌다는 변명 말이다. 가스팔은 비상한 눈치로, 자신이 버려졌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블리에가 시킨 대로, 9황자 에페로에게 쓴 편지를 시종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황태자 궁의 봉투에 넣고 편지 밀랍 도장을 찍어 전서구를 띄울 예정인 편지 사이에 두고 나와 버렸다. 지금 그 성과가 제 손에 있는데! 가스팔은 그날만 떠올리면 아직도 잠을 설쳤다. 혹시라도 들키면 어떡할까 전전긍긍하던 시간을 떠올리자 억울했다. 하지만 블리에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종을 울렸다. 빠르게 외투를 가지고 오는 하녀들의 동작은 빠릿빠릿했다.

16558466618602.png“오늘 입궁할 테니 저택을 잘 부탁하네, 집사.”

16558466618637.jpg“부인, 모른 척만 하지 마시고…….”

가스팔은 자신의 공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였다.

16558466618637.jpg“부인! 2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닐의 우렁찬 목소리가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블리에가 눈을 반짝이며 가스팔을 향해 싱긋 웃었다.

16558466618602.png“……그렇다는데. 자네의 공을 2황자 전하께 말씀드려서…….”

16558466618637.jpg“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가스팔은 2황자가 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동 반사적으로 숨이 막혔다. 그의 눈에 띄는 것도, 블리에가 자신에 대해 그 황자에게 말하는 것도 사절이었다. *** 질척거리는 가스팔을 떼어놓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로아드네스가 서 있었다. 검은 모피를 두른 로아드네스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흑표범 같았다.

16558466618602.png“와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나는 어찌 왔냐는 말없이, 곧장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닐이 틀림없이 내 일정을 그에게 공유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아드네스는 인사도 없이 내 말을 더 기다리는 듯 빤히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내가 산뜻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잘생긴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1655846661859.png“끝입니까?”

16558466618602.png“……제게 화나신 일이라도?”

1655846661859.png“전혀, 아닙니다.”

아니기는. 아무 말 없이 또 한참을 빤히 보던 로아드네스는 약간 성난 걸음으로 마차 문을 벌컥 열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가는 내내 로아드네스는 내 입만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참다못해 낮게 소리쳤다.

16558466618602.png“도대체 왜 그러세요? 불만이 있으시면 말로 하세요!”

1655846661859.png“불만 없습니다.”

나는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을 하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1655846661859.png“……며칠 안 봤다고, 보고 싶었습니다. 됐습니까?”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는 로아드네스를 응시했다. 자그마한 마차 테이블에 팔을 괴고 무심한 듯 창밖만 내다보는 로아드네스는 얼핏 보면 담담했지만, 햇빛이 스쳐 지나가며 언뜻언뜻 빛나는 적안은 복잡한 감정으로 일렁거렸다. 요 며칠, 나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대공저에 박혀 아무하고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1655846661859.png“……원래 그렇게 친구한테 무심합니까?”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면서, 그는 덤덤한 척 툭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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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66618602.png“제가 무심한가요?”

1655846661859.png“아무리 기다려도 편지 한 통 없길래.”

토라진 걸 티를 내고 싶진 않은데, 제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무심한 얼굴이 고스란히 내 눈에 와서 쿡 박혔다.

16558466618602.png‘귀엽다.’

……아차. 내가 미쳤나. 덩치는 내 몇 배나 되고. 날카로운 눈이며, 깎아놓은 듯한 이목구비는 빈틈없는데다가 툭하면 인상을 구기고 부관에게 독설만 하는 남자가. 제게 무심한 것 아니냐며 돌려 말하는 게 참을 수 없이 귀엽다고 느껴지다니.

16558466618602.png‘보고 싶었다는 말을 또 듣고 싶은 건가.’

엄청 용기 내서 했던 말인데……. 나는 이 상황에 다시 그 말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쩐지 머리 가죽이 간질간질했다. 나는 잠깐 솟아오르려는 감정을 누르고 부채로 입을 가렸다. 불현듯 푸흐흐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로아드네스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한 걸 닐이 들었다면 토하는 시늉을 할 테지만 내 눈엔 그래 보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꽉 끌어안고 뺨을 쓰다듬어주고 싶은 얼굴이었다. 나는 표정 관리를 끝내고 부채를 내리며 새침하게 변명했다.

16558466618602.png“아니요, 저는 제가 꽤 다정한 친구라고 생각하는데요?”

1655846661859.png“……어딜 봐서.”

여전히 내 얼굴을 안 본다.

16558466618602.png“제가 예전에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친구’라는 말에 사정없이 눈썹이 구겨진 로아드네스가 퍽 반항 어린 표정으로 내게 시선을 주었다.

1655846661859.png“누구.”

16558466618602.png“거의 매일, 일기를 쓰듯이 그 친구에게 편지를 썼어요. 슬플 때는 슬프다고 투정을 부리고, 기쁠 때는 기쁘다고 자랑하듯 편지를 썼는데요.”

1655846661859.png“누굽니까, 그게.”

16558466618602.png“부끄럽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그 친구와 손을 잡고. 뽀뽀도 했었어요.”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굳었다. 대충 턱을 괴고 있던 팔은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 마음의 문을 닫은 것처럼 다리를 꼬아 앉은 로아드네스는 바르르 떨리는 턱을 애써 아닌 체하며 더 해보라는 듯 턱을 살짝 들었다.

16558466618602.png“이 정도면 꽤 다정한 친구지요. 그러니 제가 무심한 사람이라는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1655846661859.png“그런 게 친구면, 나는 친구 없었습니다.”

마차가 황태자 궁 앞에 멈추었는데도, 로아드네스는 오기가 생긴 듯 더 해보라는 얼굴로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나는 낮게 웃으며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1655846661859.png“누구냐니까, 왜 대답은 안 하고. 이렇게 황태자 전하를 뵙고 나면 대답 못 들을 거 아닙니까.”

불퉁해진 목소리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웃음이 목 끝까지 올라온 나는, 손을 더 뻗었다.

16558466618602.png“누구긴, 안. 너잖아.”

1655846661859.png“……뭐?”

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에스코트 없이 마차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로아드네스가 급하게 따라내렸다. 얼른 황태자 궁으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아프지 않게 내 팔을 꽉 잡고는 돌려세웠다.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살짝 넋이 나가 보였지만 상기되어 있었다.

1655846661859.png“손…… 은 기억나는데. 우리가 언제 뽀…… 그걸 했습니까?”

16558466618602.png“기억 안 나실 거예요.”

다시 새침하게 말하고 돌아서려 하자 로아드네스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1655846661859.png“그럴 리가 없습니다.”

16558466618602.png“있어요. 제가 전하 졸 때 몰래 하고 도망간 거니까.”

이번엔 살짝 뿌리쳤는데 팔이 자유로워졌다. 거칠게 일렁이는 붉은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약간의 배신감까지 담아 날 보고 있었다. *** 한참을 멍하게 서 있던 로아드네스가 내 뒤를 바짝 뒤쫓아 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알현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발그레 물든 얼굴로 정면만 보던 나는 알현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16558466618597.jpg“오셨습니까, 부인.”

기가 빨린 듯한 얼굴을 한 황태자의 옆에,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명은 단번에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9황자 에페로.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그대로 빼닮은 미청년은 누가 봐도 론타의 황족 그 자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황태자의 유순한 인상과는 달리 사납게 올라간 눈매며 헝클어진 머리카락. 황족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온몸에 액세서리가 치렁치렁 정신없이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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