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노에비안의 결심
벌써 몇 개의 크리스털 잔이 운명을 달리했다.
노에비안은 붕대를 칭칭 감아놓은 손을 쳐다도 보지 않고 술을 병째 들이켰다.
‘만에 하나 내가 아내를 잃으면…… 네가 온전히 내 정부가 되겠다고 했잖아.’
입을 열어 혀를 굴린 것도 아닌데.
머릿속에서 그날의 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불현듯 튀어나왔다.
‘나는 당신을 원해.’
‘단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던 아드리엔, 앞으로도 영원히 가지지 못할 아드리엔보다……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을 원해.’
쨍그랑!
“전하!”
“젠장! 빌어먹을! X발! 제기랄!”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미쳐 있었다.
수도에 있었던 무소불위의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이미 이곳에 없었다.
처음엔 그를 유혹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먹었던 애니마저 지금은 포기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이 춥고 황량한 북부 구석, 최악의 범죄자들만 수감되는 루벨탑으로 와서 한 일이라고는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노에비안의 방을 치우는 일.
그리고 치우는 사람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유리 조각을 만들어내는 그를 쏘아보는 일뿐이었다.
노에비안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애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문 닫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팔에 묻고 있던 눈에서 굵은 눈물 줄기가 쏟아져나왔다.
아드리엔이 죽었을 때를 제외하고 이렇게 눈물이 마르지도 못하게 울어본 건 처음이었다.
‘노아. 사랑하는 나의 노아. 나의 바다. 나의 전부.’
“으, 흑…….”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제 입을 찢고 싶은 과거를 되새김질 하다 보면 어느새 가장 행복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으으으으흑…….”
그리고 그 어떤 기억보다, 그 기억들이 노에비안의 가슴을 사정없이 가르고 베고 찔렀다.
심장이 펄떡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리엔, 리엔…….”
그를 따라온 주치의 스피노는 그의 역정에 못 이겨 수면제를 주면서도 그것을 중화하는 약을 함께 올렸다.
약을 먹고 술을 마시면 행복한 시절의 환각을 보며 가슴을 쳤고, 중화하는 약을 먹어 정신이 멀쩡해졌을 때는 퀭해진 눈으로 블리에인 줄 알았던 아드리엔에게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그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오늘처럼 달빛이 아름다운 날이면 그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건장했던 몸이 메말라가고, 선명하던 아드리엔의 모습마저 흐릿해지면서 그는 불안에 떨었다.
보고 싶고, 안고 싶고, 사랑하는 마음과 가질 수 있는 다른 누군가로 아드리엔을 대체하려 했었던 지난날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다 보면 끝은 항상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던 황궁에서의 기억으로 향했다.
‘그거 알아?’
‘당신 참 쓸모없어.’
몸부림치며 흐느끼던 동작이 뚝 멈추었다.
아드리엔에게서 들은 가장 충격적인 말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도.
황태자를 죽이라 종용했던 것도 아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로지 쓸모 있는 놈이 되기 위해 살았던 지난 세월을 모조리 부정당하는 말이었으며.
아드리엔에게 더 이상 남자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현실이 그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노에비안은 머리맡에 두고 있던 단검을 쥐었다.
자백했으니 증거는 필요 없지 않냐며 우기고 우겨 가져온 아드리엔의 단검이었다.
아드리엔의 것이라면 그런 것이라도 갖고 싶어 고집을 부려 가져온 것이었다.
황족이라 특별히 대우한 그럴듯한 내부와는 달리, 손바닥만 한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서슬 퍼런 검날이 번쩍였다.
노에비안은 자연스럽게 지하 비밀의 방에서, 그를 필요로 하던 아드리엔을 떠올렸다.
‘약속을 지키는 남자라며. 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네가 죽여.’
‘그럼 당신을 용서할게.’
단검을 손에 쥔 노에비안이 축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하고 벌떡 일어났다.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지만. 어쨌든 용서를 받은 게 아닌가?
술기운 때문일까. 지독히 후회하기만 해서일까. 아드리엔이 너무 그리워서일까.
더 이상 물러날 곳도. 더 이상 증명할 것도 없어진 노에비안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총기 대신 독기가 묻어나는 눈이 바닥에 널브러진 신문으로 향했다.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과 관련된 소식이라면 그는 술에 취해서도 애니를 통해 몰래 들인 신문을 읽었다.
그게 그녀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매체였기 때문이다.
최악의 죄인만 가둬두는 루벨탑에서 황족의 특권으로 몰래 신문이라도 받아볼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엘라콘으로 향하던 사신단, 아카시아 백작령에 발이 묶이다. 이유는 마물 때문인가?]
노에비안은 단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빠르게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로아드네스 2황자의 이른 귀환. 엘라콘과의 불화 때문인가 황태자 즉위를 위함인가?]
로아드네스가 없다면, 아카시아 백작령으로 가서 아드리엔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손바닥만 한 저택에 침입하는 건 맨몸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했던 젊은 날을 떠올리면 간지럽지도 않은 수준이다.
무기력하게 늘어졌던 몸뚱이에 기운이 샘솟았다.
어째서 조용히 엎드려 있기만 했을까.
제 손으로 바르데날도까지 죽여버린 그가 더 이상 뭘 잃을 게 있단 말인가?
‘아드리엔, 당신에게 쓸모 있는 남자라는 걸 증명만 한다면…….’
창백했던 두 뺨에 혈기가 돌았다.
묻고 싶다.
당신에 내게 돌아올 수 없다면.
내가 당신 곁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순 없는지.
로아드네스가 황위를 위해 당신을 버리고, 성녀 행세를 하는 도리스 카스타냐를 아내로 맞는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내게도 기회는 있는 건지.
마침내.
제 손으로 처음 열어젖힌 낡은 옷장에서 노에비안은 젊은 날 자주 입었던 검은 망토를 꺼내 입었다.
황제 율리어스를 위해 손에 피를 묻혔고, 목숨을 걸었었다. 평생을 그리 살았었다.
모두가 그게 운명이라고 했고. 자신도 그게 운명이라 생각했다.
‘이번엔 아니야.’
잡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만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에게 모든 걸 다 버릴 각오로 달려가리라.
그날 밤.
루벨탑 지하에 처박혀 있던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탈옥했다.
황태자비 도리스 카스타냐의 성대 추대식을 얼마 앞둔 날의 일이었다.
***
“성녀 추대식?”
카뉼라 윈스터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시작으로 아카시아 백작령의 저택은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도리스로부터 성녀 추대식 일정을 논의하고 싶다는 서신을 받은 대신관은 자신이 그것을 실토하고도 카뉼라의 눈치를 보았다.
비리가 완전히 탄로 난 대신관은 자신의 목을 카뉼라에게 맡겨놓은 듯 체념한 얼굴이었다.
“개소리! 절대 안 돼! 그런 악독한 계집을 로아드네스의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지! 그것이 황태자비만 아니었어도 내가 당장에…….”
“워워-. 후작님. 흥분하지 마시고. 그래서 예하, 결국엔 그 성녀 추대식을 한다는 말이지요?”
에페로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대신관 텔른은 후작보다 에페로를 보며 더 긴장한 낯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신탁을 받았다 공언해버리기도 했고, 이 추대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황태자비 전하만은 아닙니다.”
“또 누가 있는데요?”
에페로의 날카로운 질문에 텔른은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시스코메틴 백작, 레일론 백작, 서부 출신의 귀족들…….”
“시스코메틴 백작과 레일론 백작이라면 수도 대귀족들이 우르르 몰려가 그 줄을 탔겠군. 맙소사. 도리스 하나만 성녀가 되면…….”
“나같이 힘없는 황후의 소생은 명함도 못 내밀고 조용히 엘라콘으로 돌아가겠다는 계산이군. 나를 이 정도로 견제하는 걸 감사해해야 하나. 나 존재감 있는 황자였잖아?”
엮인 귀족들이 모조리 황태자파 출신이라 머리가 더 아픈지, 카뉼라가 머리를 짚자 에페로가 자조적으로 이어 말했다.
에페로는 자신이 엘라콘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면서 조용히 차만 마시던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부인. 이 정도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면, 나 부인 친구 맞죠?”
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주자 에페로가 불안한 눈으로 생글 웃었다.
“내가 대신관 예하 잡는데 내 어머니께서 충격을 받으실 리스크까지 감안하며 도왔잖아요. 날 엘라콘으로 가지 않아도 되게 해주겠다 자신했으니 이제 그 지긋지긋한 생각 좀 그만하고 계획 공유 좀 합시다?”
대신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걸 무시하고, 에페로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미리 상의 되지 않은 예언을 한 이후로 날 볼 때마다 무서워 죽겠다는 얼굴로 놀리던 에페로의 인내심이 바닥난 듯 보였다.
시선을 돌리니 도리스에게 답장을 해야 하는 대신관은 물론, 카뉼라까지 관자놀이를 짚은 채로 나만 보았다.
죽은 사람을 살렸고, 다시 살려낼 사람이라 당당히 말했으니 내게 거는 기대가 클 만도 했다.
“도리스가 원하는 대로, 성녀 추대식을 진행하세요. 예하.”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카뉼라와 에페로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이런 역사적인 행사라면 수도로 온제국민들이 모일 테죠. 제 예언은 그때 이루어질 거예요.”
“최대한 협조는 하겠지만, 저는 제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걸 보기 전까지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겁니다. 특히 론타에 새로운 태양이 비춘다느니…… 이런 말은 정치적인 발언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2황자 전하의 붉은 눈이 태양이다.’라고 끼워 맞추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기적을 행하면 정치적일지 몰라도 그렇게 천명하시겠다는 뜻이지요?”
“……기적을 행하신다면요. 진짜 신탁을 받으신 분이라는 게 밝혀지는 것일 테니.”
“좋아요.”
“뭐 어쨌든 성녀 추대식은 예정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서신까지 쓴 걸 보면 예정보다 일찍 할 생각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 추대식에서 제가 예하를 보조할 수 있게 해주세요.”
“예?”
“저는 비 전하의 시녀잖아요? 황궁을 벗어나 성녀로 살기 원하는 주인을 끝까지 모시겠다는데 누가 뜬금없다 생각하겠어요? 신관들에게 섞여 있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거고요.”
텔른의 시선이 내 금발에 진득하게 머물렀다. 그리 번쩍이는 금발을 하고 잘도 눈에 안 띄겠다는 눈이었다.
“……그 정도는 수용하겠습니다.”
대신관은 그 후에도 카뉼라가 하는 몇 번의 경고와 에페로의 갈굼에 꿋꿋이 대응하고 저택을 나섰다.
“저거 저렇게 보내도 되는지 모르겠네.”
“걱정마시지요, 황자님. 대신전이며 성기사단이며 전부 이 카뉼라 윈스터의 눈과 귀가 심어져 있으니 더 이상 허튼짓은 못 할 겁니다.”
“허튼짓해서 여기 불려온 사람을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속을 뒤집어 놓는 에페로의 말에 카뉼라가 힐끗 쏘아보았다.
“그건 이 어리석은 늙은이가 대신관을 믿었을 때이지요. 이미 명령을 내려놓았으니 평소보다 배로 감시할 겁니다.”
“진즉 그랬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쯧.”
빈정거리는 말투에 카뉼라가 다시 그를 쏘아보았다. 둘은 상극이었다.
***
광산에서 롯시와 마력 훈련을 하다가 지친 나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올리비아가 한참 내 머리칼을 빗겨주다가 제 방으로 돌아갔다.
올리비아는 아직도 조금만 옛 추억을 떠올리면 울기 시작했기에 오래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보고 싶다. 이전엔 매일 네 꿈을 꿨는데 수도에 오고 나선 네 꿈을 안 꿔. 오늘은 주신께 기도라도 해보려고. 너도 도와줘, 네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 같으니까.』
조금 심통이 난 듯한 편지가 귀여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머리 아픈 시기이지만 로아드네스가 짧게라도 편지를 보내니 견딜 만 했다.
그는 내가 안전하게 있기만을 원하겠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가 자신의 힘으로 황위를 거머쥘 미래는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의 적을 최대한 만들지 않으면서 그 길을 가려면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나는 ‘너의 안’이라는 말로 끝나는 편지를 매만졌다.
누가 가로챌까 봐 중요한 말을 주고받을 수 없어 짧은 편지였지만 소중했다.
잠깐이지만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함이란 끝없는 사막 속 오아시스 같은 편지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창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카시아 백작의 방을 쓰고 있는 동안 처음 듣는 인기척이었다.
이곳은 후작의 사병들이 지키고 있어 안전했기에 그저 지나는 바람인가 보다, 하고 거울을 보는 순간. 나는 몸을 굳혔다.
분명 굳게 걸어 잠근 창문이 활짝 열리고, 밖에서 검은 발이 불쑥 들어왔다.
소리를 지르려던 입술이 뚝 멈추었다.
“……아드리엔.”
검은 망토, 검은 옷을 입은 노에비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