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죽어줘
너무 놀라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했던가.
단숨에 내 앞으로 다가온 노에비안의 눈은 이전처럼 사정없이 흔들리고 일렁거리긴 했지만 나를 막무가내로 끌어안지는 않았다.
다만 벙긋거리는 내 입을 뒤에서 부드러운 손길로 틀어막고 벌떡 일어난 나를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싫어서, 거부감이 들어서가 아니라.
루벨탑에 처박혔다는 그가 여기에 온 것. 후작의 기사들이 지키는 곳을 뚫고 올라와 나를 끌어안은 게 너무 놀라서였다.
노에비안도, 나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나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달려왔던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 숨이 잦아들자, 노에비안은 조용히 내 입에서 손을 거뒀다. 내가 소리를 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조용히 뒤를 돌아 거울이 아닌 정면으로 그를 마주했다.
긴장으로 날카로웠던 노에비안의 짙푸른 눈이 뿌옇게 흐려지다 곧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내가 한때 사랑했던 그 눈이었다.
“……탈옥이라도 한 거야?”
“응.”
노에비안은 내게 손을 뻗으려다 멈칫하더니 되레 한발 물러났다.
내 눈썹 한쪽이 저절로 쑥 들렸다. 갑자기 찾아와 납치라도 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행동이 얌전했다.
“리엔.”
“왜 왔어?”
노에비안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 상태로 굳었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거칠고 메마른 입술이었다.
푹 파인 두 눈두덩이. 그늘진 눈 밑. 살이 빠져 뾰족해진 턱과 창백한 낯빛. 그는 지금 괜찮지 않다.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아님 납치라도 하려고?”
“아니.”
“그럼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숨어들었는데? 그런 꼴로 오면 내가 감격해서 당신을 보듬어주기라도 할까 봐?”
“당신이 살아 있는 걸 보고 싶었어.”
“…….”
“당신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걸…….”
나는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노에비안의 상체가 내게 조금 기울었다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보시다시피, 잘 살아 있어.”
“보고 싶었어.”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보고 싶었어, 아드리엔.”
덤덤하던 노에비안의 얼굴이 한순간 빠르게 일그러졌다가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대신 악다문 턱이며 거친 입술이 안쓰러울 만큼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
여윈 두 뺨에 가느다란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당신이 너무, 으윽…….”
필사적으로 솟구치는 울음을 참으려는 입술이 비틀렸다.
“너무 보고 싶어서, 나…….”
어째서 사람의 기억은 미화되는 걸까.
그렇게 당하고. 마음에서 그를 다 지워내고 새로운 행복을 찾았으면서도.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못 하겠어. 내가 당신에게 아니 그 여자에게 했던 말들을 당신이 들었을 거라 생각만 하면 나는…….”
사랑했던 시절의 좋았던 기억이 가시처럼 돋아나 마음을 콕콕 찔렀다.
지리멸렬한 진실 속 이 남자의 삶이 너무 기구했던 게 왜 갑자기 떠올라선.
“나 자신을 몇 번이고 죽이고 싶었는지 몰라.”
나는 이 남자가 싫다. 하지만 불쌍한 것도 맞다.
“당신이 내게 배신감 느끼는 거, 알아. 당신이 날 용서했어도 내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아.”
그래. 나는 이 남자가 좀 불쌍했다.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의 마음이다.
그토록 대단하던.
론타 전체에서 황제와 황태자를 등에 업은 무소불위의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지금 내 앞에 없다.
칼같이 지키던 법들을 다 깨부수고 탈옥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한 채 내 앞에서 울고 있는 불쌍한 남자 하나만 있었다.
“다 잃었지만. 나는 아직 쓸모가 있는 놈일지도 몰라. 기억해?”
노에비안이 품에서 눈에 익숙한 단검을 꺼냈다.
“내가 이 칼로 내 미래였던 황태자를 찔러 죽였잖아. 당신의 말 한마디에 내가 그렇게 했잖아, 리엔.”
나는 잠시 숨을 들이켜고 침묵하다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날 위해 다른 누군가를 죽여주기라도 하려고?”
“……당신이 원한다면.”
음산하게 읊조린 노에비안이 내게 성큼 다가와 단검을 쥐여 주었다.
차갑고 마른 손이 닿자 나는 움찔했다. 노에비안은 단검을 쥐여 준 내 손을 제 심장에 가져갔다.
쿵. 쿵.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이 내 손바닥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다 할 거야, 난. 그렇게 해서 당신 곁에 한걸음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다면…… 당신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도록 허락해준다면 나는, 기꺼이…….”
툭.
단정히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저 혼자 풀렸다.
풀어헤쳐진 검은 머리카락이 내게 조금 쏟아졌다.
검은 밤하늘 같은 눈동자가 내게 점점 다가왔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나는 이게 정말 노에비안의 진심인지 궁금해 그 눈동자를 계속 쳐다보았다.
그래서 그가 그만큼 내게 다가왔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쾅!
“부인. 아무리 생각해도 성녀 추대식 전에 내가 그 계획을 좀 들어야……. 뭐야, X발?”
로아드네스의 집무실에도 노크 한번 없이 들이닥쳤던 에페로가 거침없이 열어젖힌 문.
에페로는 단검을 쥐고 있는 내 손과 내 손을 잡고 제 품에 가두기 직전인 노에비안.
그리고 활짝 열린 창문 가장자리에서 펄럭이는 커튼을 보고는 곧장 허리에 찬 검을 빼 들었다.
노에비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이 대번에 에페로의 손에 잡혀 딸려갔다.
어느새 내 앞을 에페로의 너른 등이 가로막았다.
“뭐야? 탈옥이야? 형님이 없는 틈을 타 여기로 와? X나 지독한 치정이네.”
“에페로, 네게는 볼 일이 없다.”
“당신은 없어도 이쪽은 볼일이 많거든. 부인, 괜찮아요? 저 새끼가 무슨 짓 했어요?”
대치 상태의 노에비안과 에페로가 동시에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에페로의 뒤에서 벗어나 되레 에페로를 끌어당겨 내 뒤로 세웠다.
“부인!”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게 딱 하나 있긴 해.”
정신이 번쩍 든 내가 노에비안에게 말했다.
에페로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만큼, 노에비안의 표정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노에비안은 아주 자연스럽게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예전에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했음에도 용서를 구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나는 잠깐 솟구치는 연민의 감정을 내리누르고 억지로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에게 단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날 위해 죽어줘.”
내게 단검을 받아든 노에비안의 눈이 거칠게 일렁거렸다.
***
성녀 추대식 날짜가 잡혔다.
일주일 뒤에 바로 성녀 추대식을 한다는 소식에 백작령은 비상이었다.
우리는 황급히 짐을 꾸려 수도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로아드네스는 성녀 추대식이 끝나고 올 것을 당부했지만 이미 대신관의 성녀 추대식을 돕겠다고 했기에 지체할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우리와 함께 가지 않고 동부로 향하기로 했다.
“비앙카에게는 이미 전서구를 보냈으니, 올리브는 아버지를 만나서 내 서신을 전해주기만 하면 돼.”
“몸조심하세요, 아가씨.”
올리비아가 나를 강하게 한번 끌어안고 기사 몇 명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 모습을 보던 롯시도 조용히 다른 마차에 올라탔다. 롯시는 기꺼이 수도로 함께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카뉼라는 혼자 마차를 타는 게 편하다며 후작저의 마차를 탔고, 에페로가 내 마차를 함께 탔다.
아카시아 백작은 아직 정체가 드러나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 은밀히 따로 오기로 약속을 했다.
“죽일 거면 그냥 찔러버리지. 단검 주고 죽어달라면 잘도 죽겠네요, 그 대공이.”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에페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불만을 터트렸다.
어젯밤.
노에비안에게 죽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나는 또 다른 부탁을 더했다.
에페로에게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에페로는 그게 불만인 얼굴이었다.
“그 새끼 눈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던데. 로안 형님이 아시면 얼마나 열 받겠어요? 나 입 가벼운 거 알죠? 수도에 가자마자 로안 형님께 어제 있었던 일을 모조리 말할 거예요.”
“제게도 다 계획이 있어요. 그리고 친구는 보통 그런 짓을 안 할 텐데요.”
“진짜 친구는 자기가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는지 전부 공유하겠죠. 어제 그 새끼 보내기 전에 무슨 말을 그리 오래 했어요? 뭐 그리 대단한 비밀이라고 어떻게 도리스 카스타냐를 죽일 건지 말도 안 해주고. 혼자만 꽁꽁…… 그 계획 성공 안 하기만 해봐요, 아주.”
“그래서 친구 안 하신다고요?”
단번에 그렇다고 답할 것 같던 에페로의 입술이 달싹이다가 꾹 다물렸다.
희미하게 웃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던 에페로가 고개를 팩 돌리고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쩐지 얼굴이 좀 붉어진 것도 같았다.
“……누구 장례 치를 일 있나.”
“저는 당분간은 더 황자님과 친구 할 마음이 있으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친구라면 믿음도 필요하니 저를 좀 믿으세요. 제가 장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에페로 님께는 폐 끼치지 않을 테니까요.”
“당분간? 뭐야, 계획 끝나면 적으로 돌리겠단 거예요, 뭐예요?!”
다급해진 에페로의 목소리가 마차를 쩌렁쩌렁 울렸다.
어젯밤부터 가라앉고 긴장되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왜 대답 안 해요? 부인!”
겨우 웃음을 되찾은 얼굴로, 나는 수도로 가는 내내 에페로를 달래주어야 했다.
***
엘라콘으로 보낸 올리비아에게서 소식이 없자 드러누워 끙끙 앓던 피레타 공작이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버지의 피를 이은 딸, 블리에 피레타가 2황자 로아드네스를 유혹했으니 아버지의 딸이 황태자비가 될 수 있도록 도우세요. 2황자 전하를 동부의 이름으로 지지해주세요. 아버지를 차기 황제의 장인으로 만들어드릴 테니.]
뒤늦게 돌아온 올리비아로부터 그 서신을 전달받은 피레타 공작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공작은 창백하게 질려 있던 얼굴에 급격히 화색이 돌고 이까지 드러내며 잘 보이지 않던 웃음을 지었다.
그 극적인 표정 변화를 비앙카와 올리비아가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그레고리, 성녀 추대식에 나도 가겠다.”
아직 블리에의 정체에 대해 모르는 그레고리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버지가요……? 몸이 안 좋으시잖아요?”
“몸이 안 좋아도, 몇백 년 만에 추대되는 성녀를 보러 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토록 염원하던 중앙 정계로의 진출.
피레타의 데릴사위가 아닌, 당당한 피레타 공작의 이름으로 중앙의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늘 차갑던 공작의 얼굴에 욕망의 그늘이 진하게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