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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45화 (145/171)

145화. 비겁한 한마디

숨이 막힐 만큼 나를 껴안고 있다가 갑자기 쓰러진 블리에 때문에 행사는 급하게 마무리되었다.

대신관은 쓰러진 블리에가 제 딸이라도 되는 양 전전긍긍하며 대신전에 방을 마련해주었다.

황궁보다 대신전이 광장에서 훨씬 가까웠기에 우리는 급히 그곳으로 향했다.

“살아계십니다. 다만 과로하신 것 같으니 휴식 기간이 좀 필요하실 겁니다.”

대신관 텔른은 그 소리에 경이로움에 가득 찬 얼굴로 누워 있는 블리에를 바라보았다.

“웩! 예하. 그런 느끼한 눈으로 보고 있으면 깰 사람도 자기 눈을 찌르고 다시 기절하겠네요.”

“살아, 살아계신…….”

“일단 나가죠. 살아 있는 거 봤잖아요?”

에페로가 문 앞을 지키듯 서 있는 로아드네스를 힐끔 살피더니 대신관과 주치의를 끌고 손님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계속 블리에를 내려다보았다.

잠든 듯 편안히 누워 있던 유리관 안에서와는 달리, 조금 아파 보였다.

롯시는 물수건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블리에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이 미친 게, 나를 위해서…….”

롯시는 아까부터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어린 블리에가 나더러 왜 그리 방랑하며 사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어.”

“…….”

“이 녀석이 쪼끄마할 때는 대답 대신 그저 웃기만 했는데. 나도 사람이니 지치고 힘들 때가 있었지.”

롯시는 과거를 떠올리는 듯 흐려지는 눈 사이로 눈물을 떨궜다.

“오래 감춰진 진실. 그거 하나를 밝히고 바로잡고 싶어 기록을 찾고 있다고 말했어. 바보같이, 그 어린애에게 몇 가지 알려줘 봤자 짐작도 못 할 거라 생각하고 말이야.”

롯시가 괴로운 듯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이 애가 깨어나서 내 눈을 마주하고, 그 기록을 내게서 빼앗아 사람들 앞에서 신의 뜻인 양 공표했을 때 나는 깨달았어.”

내 소원을 이루어주려고 했던 거란 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롯시가 조용히 흐느꼈다.

위로를 해야 할지, 조용히 있어야 할지 헷갈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얘기 좀 해.”

단상 위에서부터 줄곧.

저런 타오르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쏘아보던 로아드네스였다.

***

쏘아보던 기세처럼.

거칠거칠한 입술이 맞붙는 건 순식간이었다.

밀어낼 생각도 없었지만, 그는 마치 내가 밀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빈방으로 넘어오자마자 나를 몰아붙였다.

침대 하나 없는 방이었지만 나는 마치 그와 뒹구는 침대 위에 있는 것만 같았다.

양손을 맞잡고 벽에 몰아붙인 로아드네스가 내 입안을 헤집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 아침까지 나누었던 열기를 떠올리게 하는, 금세 몸이 달아오를 만큼 열렬한 몸짓이었다.

그는 내가 제 목에 매달리는 것마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벽에 붙여놓은 내 손을 꽉 쥐고 내 숨을 탐했다.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열기가 온몸을 데웠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진 건,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다리가 아파질 때쯤이었다.

그동안 로아드네스의 가라앉은 눈을 본 적은 많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화가 난 건지 흥분한 건지 모를 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입술을 떼고도 한참 나를 벽에 붙들어놓고 제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댔다.

훈기가 도는 방 안.

거친 숨소리만 오갔지만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눈 것처럼 결국 서로를 끌어안았다.

아직 젖어 있는 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를 살짝 깨물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움푹 팬 빗장뼈에 뜨거운 숨이 흩어졌다. 안개처럼 달라붙는 진득한 숨결에 나는 얕게 전율했다.

“널 어떡하면 좋지.”

“……로안.”

이름이 불리자 그가 더 깊게 입술을 묻었다. 그가 닿은 목덜미부터 닿지 않는 발끝까지 짜릿한 감각이 내달렸다.

“네가 내 말을 안 들어줘서 미치겠는데…….”

그가 우는 듯 웃는 듯 몸을 꿀렁였다. 나는 그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까 봐 그의 품에서 숨을 죽였다.

“그런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또 미칠 것 같아.”

기어코 목덜미 깊은 곳에 흔적을 남긴 로아드네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대리석 같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강렬하게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

떨리듯 벙긋거리는 입술은 다시 내 입안을 탐미하고 싶어 조르는 듯 반짝거렸다.

“거기가 어디라고 와, 응?”

신음처럼 내뱉는 말에 나는 조용히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로아드네스는 원망 섞인 눈으로 나를 보면서도, 기꺼이 내 작은 손바닥에 뺨을 묻고 이어 숭배하듯 깊게 입 맞췄다.

“사랑해, 로안.”

순간.

거칠게 몰아쉬던 그의 숨이 멈추었다. 두드러지게 각이 진 턱뼈가 힘줄과 함께 불룩 불거져 나왔다.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춘 채로 굳어버린 로아드네스가 서서히 내게로 고개를 들었다.

“사랑해.”

내 사랑은 미련하고, 이기적이어서.

상대가 기뻐할 만한, 상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해주지 않으면 백번을 말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노에비안을 사랑했던 기간 동안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았던 그의 인생을 닮아버린 것인지도 모르지.

노에비안도. 로아드네스도. 내가 뭘 하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기뻐해 줬을 거란 걸 알면서도.

“사랑해, 로안.”

나는 나 스스로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야 이런 말을 겨우 할 줄 아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내 마음을 절대 거절할 수 없도록 말이다.

그런데.

그 비겁한 한마디에.

몇 번이나 뜨거운 밤을 보내고 몸을 섞어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 로아드네스에게서 떠올랐다.

로아드네스의 두 손이 내 뺨을 감싸 쥐고, 일렁이고 일렁이다 결국 무너진 적안이 내 입술을 태우듯 응시했다.

“사랑해.”

세상에 태어나 그 말만 기다렸던 사람처럼.

무표정을 가장한 환희의 빛이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떠올랐다 바스러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곧.

젖은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짐승이 상처를 보듬듯 아랫입술을 핥던 온기가 곧 으르렁거리는 화난 신음을 흘리며 내 입안에서 폭주했다.

달아올라 뜨거워진 코끝이 쉴 새 없이 맞붙어 비벼지고.

그보다 뜨거운 손이 내 뒤통수를 끌어당겨 거침없이 날숨을 마시고 또 핥고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흉포한 기세와는 달리, 지나치게 달아빠진 숨결이라 우리는 그것이 달콤한 술인 양 마시고 취했다.

“아드리엔, 아드리엔 넌 진짜, 진짜…… 비겁해.”

질척이는 소리 사이로 뜨거운 한숨과 함께 그가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내 비겁함과 내가 아는 것은 결이 달랐지만 상관없었다.

눈가가 시뻘게진 그를 보며 내가 웃으며 답했다.

“알아.”

“네가 그런 말 하면 나는…….”

입술을 베어 문 잇새로 목을 긁고 나오는 낮은 신음이 내 입술을 적셨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해.”

아무것도 못 한다기엔 금방이라도 입고 있는 옷이며 망토를 끌러내고 바닥에서 뒹굴 수도 있을 것 같은 남자가 말했다.

뜨겁게 젖은 입술이 입가를 시작으로 두 뺨과 눈가, 그리고 이마까지 맞붙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그 어떤 것도 그 말 한마디보다 내게 크지 않아.”

그는 그 상태로 한참 나를 끌어안았다. 숨을 쉴 때마다 점점 조여드는 품이었다.

눅진하게 녹아버린 몸이 그의 뜨겁고 커다란 몸에 잠겨 들어간다 생각할 때쯤, 그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사랑해.”

기뻤다.

“사랑해, 아드리엔.”

그도 이만큼 기뻤을까?

그런 생각은 잠시였다. 환희로 가득 찬 입맞춤이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진득하고 열렬한 입맞춤이 계속될수록.

내가 묻지 않아도, 그가 답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로아드네스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 인해서.

***

해가 다 질 때쯤에야.

로아드네스와 나는 블리에가 누워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롯시가 여전히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블리에!”

그리고 인상을 팍 찌푸린 블리에가 흐릿한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며 눈을 떴다.

성화가 그려진 화려한 천장을 끔뻑이는 눈으로 응시하던 그녀가 곧 롯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으익, X발! 아! 미친. 아 진짜 심장 떨어질 뻔했네!”

“너, 너……!”

“말했잖아, 스승님. 그 얼굴로는 절대 나 잘 때 들여다보지 말라고. 후…… 미친 한동안 또 꿈에 나오게 생겼네.”

“너는 몇 년 만에 만난 스승한테 그게 할 소리야!”

“과장은. 뭐 얼마나 오랜만에 만났다고? 중간에 몇 번 들렀잖아? 아니면 뭐야, 설마 나 죽어있는 동안 시간이 몇십 년이나 흘러버린 거야?!”

블리에가 벌떡 일어나 앉더니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입이 험한 그녀를 보며 눈을 키운 나를 보고 딱딱하게 굳었다.

“꿈인가?”

“안녕.”

내가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블리에의 시선이 나를 지나서 뒤에 있는 로아드네스로 향했다.

“……그 개자식은?”

블리에의 눈이 빠르게 방 안을 훑었다.

금방이라도 침대를 박차고 나올 것 같은 기세에 내가 빠르게 답했다.

“어떤 개자식을 말하는 거야? 개자식이 한둘이 아니라서.”

급하게 누군가를 찾는 듯하던 블리에의 행동이 뚝 멈추더니.

곧 격하게 고개를 젖히고 웃기 시작했다.

“아-. 내가 상상한 동생은 조금 더 고리타분한, 바보 같은 애였는데.”

나는 내가 긴장으로 주먹을 꼭 말아쥐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뒤에서 로아드네스가 내 주먹을 조용히 감싸 쥐기 전까지는.

“어떤 개자식이든 다 죽고 없어.”

그리고 내 대답에 블리에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상 위에서 보여준 것처럼 얄망궂게 눈살을 찌푸렸다.

“꿈이 아니었나 보네. 아까도, 그리고 예전에 들었던 그 목소리도.”

“……목소리?”

“네가 날 깨워준다며.”

“!”

“원래라면 난 죽어야 했거든.”

그제야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듯. 블리에의 시선이 한참 자신이 마구 휘두르던 손으로 향했다.

“나한테 궁금한 게 많다고 했지?”

나는 대답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평생 묻어놓고 죽을 뻔했는데, 한번 말해볼까.”

바싹 메마르고 창백했지만 벼락같은 웃음소리를 쏟아내던 블리에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

***

그러니까, 블리에가 처음 아드리엔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아주 우연이었다.

“지가 저렇게 차려입고 다니면 대귀족 나부랭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킥킥. 웃겨. 론타의 대공비인지 뭔지 닮고 싶어 안달이 났나 봐.”

“뭐라고 이 XXX들아?”

그날도 블리에는 롯시의 오두막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난한 영지에서, 블리에의 화려한 차림과 괄괄한 성격은 늘 모난 돌처럼 거슬리는 존재였다.

고로 시비가 걸리는 일은 아주 잦았기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론타의 대공비라는 새로운 시빗거리가 귀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마력으로 쓸어버리면 속이 다 시원하겠네, X-벌! 아야!”

“너 이제 다 큰 계집애 말투가 그게 뭐야?”

“왜 때려! 사내애라도 때렸을 거면서 계집애 타령은.”

“또 뭐가 맘에 안 들어서 입이 댓 발 나와서 왔냐고? 여기가 네 놀이터냐?”

“나랑 노는 사람이라곤 스승님밖에 없으니 놀이터 맞지 뭐.”

“스승은 개뿔!”

“나 마력 있다고 동네방네 소문낸다?”

저 성질머리하고는…….

롯시가 혀를 끌끌 차며 귀가 빨갛게 얼어 돌아온 블리에를 위해 벽난로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론타의 대공비는 누구야?”

“엘라콘 왕 이름도 가물가물한데 내가 어찌 알아.”

누군데 내가 따라한다 만다야.

짜증 섞인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던 블리에는 롯시가 불쏘시개로 쓰려고 가져다 놓은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

“불은 피웠으니 담요라도…… 블리에?”

그날의 블리에는 유독.

오늘 자 신문의 1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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