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블리에의 사정 (1)
그날 밤.
블리에는 가출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편의상 ‘삼촌’이라 부르던 친척 한 명이 그날 술을 먹고 빗길에 미끄러져선 그 화풀이를 블리에에게 했기 때문이다.
몇 대 맞아주려던 블리에는 그날따라 지독하게 이어지는 폭력을 참지 못하고 그를 작살냈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를 뒤져 돈을 훔쳐 달아났다.
“론타. 론타 동부의 피레타 영지로 가줘요.”
비가 억세게 내리는 날이었다.
블리에는 싸구려 공용마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론타와 가까워질수록 강박적으로 신문을 사 모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닮을 수 있지?’
눈에 띄는 금발이라 롯시의 도움으로 검게 염색한 머리를 매만지며, 블리에는 손을 떨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자 옆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활짝 웃고 있는 초상.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너무 비슷하게 입은 데다 웃는 입매며 눈동자 색깔까지 안 닮은 구석을 찾기 힘들 만큼 닮았다. 아니 똑같았다.
온갖 험한 꼴은 다 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살아온 자신과는 다른 분위기였지만, 분명 그랬다.
“아드리엔…… 피레타.”
어머니가 일하는 곳. 론타의 동부 피레타.
어느 귀족가의 유모로 일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귀족가가 동부를 주름잡는 대귀족가인 피레타일 확률은 얼마일까.
그리고 만에 하나…….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이 소녀가, 어머니인 올리비아가 유모로서 모시는 아가씨일 확률은 도대체 얼마일까.
***
늘 전서국을 통해 편지만 보냈지, 엘라콘으로 거처를 옮긴 후 직접 온 것은 처음이었다.
삼촌에게 훔친 돈은 이미 다 떨어졌고, 블리에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지독하게 내리는 비는 피레타 영지에 다다라서도 멈추질 않았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으니 올리비아가 자신의 가출에 대해 알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블리에는 올리비아가 자신을 찾아 헤매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잰걸음으로 그녀의 저택에 도착했다.
아주 어렴풋이 어린 시절 기억이 남아 있었기에 저택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규모의 집은 눈에 익숙했다.
밤중에 들이닥친 그곳.
블리에는 올리비아가 혼비백산하며 짐 싸는 모습을 응시했다. 자신을 찾기 위해 엘라콘으로 가려는 게 분명했다.
그제야 호위 하나 없는 저택의 침입자를 발견한 올리비아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엄마.”
“브, 블리에? 블리에니?”
“아드리엔 피레타가 누구야?”
품에 끌어안고 왔던 신문이 바닥에 우수수 쏟아졌다.
비에 젖은 신문이 더러워진 신발 위로 치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붙었다.
“나는…… 누구야?”
그 어떤 변명도 없었다.
어머니 아니, 어머니라 생각했던 유모 올리비아는 막았던 둑을 터트린 댐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우박같이 떨어지는 비를 뚫고 온 자신보다 흠뻑 젖은 얼굴로 믿기 힘든 진실들을 쏟아냈다.
눈앞이 아득하고.
억울함에 심장이 끓었다.
아비 없이 태어나 어머니와 떨어져 자라면서, 블리에는 친척 집에서 모진 수모와 구박을 견디고, 싸우며 살아와 분노에 익숙했다.
하지만 살아생전 이만큼 격렬한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블리에 님. 다, 다 제 잘못이에요.”
자신에게 존대하는 어머니는 너무 낯설었다. 블리에는 굵은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내저었다.
“부모도 없는 그곳에서 내 한 몸 지키기 위해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지속적인 학대로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제 몸 하나 지키기 위해 용을 쓰다가 마력이란 게 발현됐다. 심장이 타오르는 것 같은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롯시를 찾아가 도움을 부탁하며 빌붙어 지냈다.
일반인들에게 마력을 사용하면 다신 도움을 주지 않겠다기에 블리에는 롯시를 통해 단검술까지 익혔다.
쏟아지는 블리에의 원망에 올리비아가 충격 어린 눈으로 그녀를 끌어안기 위해 다가왔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니, 왜 내게…….”
“이미 다 가진 아드리엔의 엄마 노릇을 하느라 딸의 옷 사이즈도 모르는 엄마에게 내가 무슨…….”
아드리엔 피레타가 팔자 좋게 아카데미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캠퍼스 생활을 즐기고. 집으로 상인들을 불러들여 보석이나 꽃을 고르고 앉아있을 때.
자신은 롯시의 연구를 위해 마나석 광산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다 돈이 필요하면 남의 집 담장을 넘어 손이 헤질 만큼 장미를 훔쳐다 꺾어 팔았다.
그런데…….
“내가 원래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고?”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축축한 것으로 젖은 블리에의 눈가가 왈칵 일그러졌다. 상처받은 어린 짐승 같은 눈이 어둡게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보낸 이 옷들…… 그 계집애의 옷들이겠네?”
그동안 입었던 화려한 옷들은 죄다 자신의 것이었어야 했던 옷들이었다.
아드리엔이 입고 남은 헌 옷들!
“X발 진짜…….”
가뜩이나 거칠게 살아온 블리에의 입에선 도저히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실 블리에도 알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본래 그다지 부유한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블리에가 그렇게라도 친척 집에 빌붙어 굶지 않았던 건 다 올리비아가 그녀를 맡아준 친척 집에 보내준 생활비 덕분이었으니까.
비록 아드리엔이 입다가 작아서 버린 옷이라 할지라도 아드리엔의 드레스며 장신구들은 감히 평면이라면 만져보지도 못할 귀한 것이었다. 그까짓 작은 옷소매나 짧은 치마는 늘려 입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서러움이 폭발했다.
그렇게라도 아드리엔이 누리던 것을 블리에에게도 누리게 해주고 싶었던 올리비아의 애정보다 자신의 슬픔과 배신감이 더 거대하여 분노의 방향을 도대체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몰랐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라는 작자보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눈으로, 다른 것을 보고 자랐을 아드리엔이 부럽고 미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나 찾지 마.”
“블리에 님!”
“빌어먹을 블리에 님이라고도 하지 마, 제발!”
블리에는 배신감과 분노에 휩싸여 저택이 떠나가라 소리를 내질렀다.
“뭐든 다 제게 푸세요. 하지만 제발, 제발…….”
저택을 뛰쳐나가려는 블리에에게 달려온 올리비아가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부여잡고는 말했다.
“제발 피레타 공작님께나 저택으로 가진 마세요. 여기서 일을 벌이지 마세요……. 분명, 분명 블리에 님을 죽이고 말 거예요. 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에요. 제발…….”
콰쾅-!
저택을 꿰뚫을 듯 강력한 천둥이 내리쳤다. 다른 운명의 쌍둥이가 태어났던 그날처럼.
블리에는 그제야 낡은 저택을 눈으로 훑었다.
비가 새는 천장.
검소한 올리비아의 복장.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대귀족가의 유모로 일한다고 할지라도 10명이 넘는 입들을 위해 돈을 보내면 남는 게 없다.
‘정말 바보 같아.’
그게 바보 같이 살아온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낡은 집에서 홀로 살며 자신에게 이런 원망이나 듣는 올리비아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도 구분이 가질 않았다.
“……나 찾지 마.”
“블리에 님. 블리에 님! 절대, 절대 피레타로는 돌아오시면 안 돼요! 어디서든 제게 연락하세요. 괜찮아지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가자마자 날 죽이려 들 텐데 내가 거길 왜 가?! 청승 떨지 말고 이제부터 엘라콘으로 생활비 보내지 마. 나 거기서 안 살 거니까.”
블리에가 저택의 문을 열었다. 돌풍 같은 바람이 작은 저택으로 몰아쳐 들어왔다.
올리비아가 떨리는 손으로 블리에를 잡기 위해 애썼지만 블리에는 외면하고 말았다.
“……연락할 테니. 걱정하지 마.”
터지기 직전인 분노를 겨우 삼키며 그길로 블리에는 다시 빗속에 뛰어들었다.
밤중이었지만 마지막 역마차를 타면 국경을 벗어나 마을로 들어설 수 있었다.
문 닫기 직전의 상점에 들러 제일 초라하고 볼품없는 원피스를 싸 들고 왔던 아드리엔의 옷과 맞바꾸었다.
늘릴 필요도 없이 여유 있게 딱 맞는 새 옷이었다.
블리에는 그날 싸 들고 나왔던 드레스를 가위로 난도질했다.
“아무리 개똥같이 초라한 옷이라도…….”
억수처럼 내리는 비가 창문을 때릴 때마다, 그녀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난 새것이 좋아.”
날이 잘 선 가위로 레이스며 프릴을 싹둑싹둑 잘라내며 블리에가 서러운 눈물을 토해냈다.
“난 이제 새것이 아니면 절대 안 입을 거야, X발.”
***
엘라콘으로 돌아온 블리에는 곧장 롯시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비 오는 날 그렇게 뛰쳐나가 버리더니, 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 온 마을에 널 찾으려고 수소문하는 네 친척들로 난리더군.”
“물주가 없어지니 이제야 찾는 거겠지. 그리고 이제 걔네 내 친척 아니야.”
그런 놈들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롯시는 늘 어머니가 보냈다며 입고 다니던 화려한 옷이 아닌, 초라한 옷을 입은 블리에를 낯설게 보았다.
“나 이제 스승님이랑 살려고.”
“뭐?”
“스승님 버려진 광산 같은 거 찾느라 돌아다닌다고 했지? 스승님이 아주 옛날에 쓴 기록도 찾아야 하고. 그거 내가 도울게.”
“네가 어떻게 도와. 나도 못 찾은 걸. 광산은 몰라도 기록은 분명 일반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게 분명한데.”
“어떻게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실마리 하나 못 찾겠어?”
롯시는 별다른 반항 없이 블리에를 받아들였다.
늘 귀찮아하긴 했지만 걸어 다니는 마력 폭탄 같은 아이를 두고 떠나느니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게 안심이기도 했고.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는 아이이니 확실히 쓸모도 있으리라.
그동안 블리에 때문에 이 작은 숲에서 오래 머물긴 했지만 롯시는 본래 기록과 광산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인물이었으므로 그들은 그길로 방랑을 시작했다.
그즈음 블리에는 광산에서 잡일을 하며 마나석 조각들을 빼돌렸다.
론타의 국경 근처에 위치한 광산은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엘라콘에서 아직 관리의 손길을 뻗지 않은 곳이었다.
블리에는 그곳에서 세공하다 남은 마나석 조각들을 몰래 팔거나 롯시에게 넘기며 후일을 도모했다.
피레타 영지로 가면 죽는다고? 그럼 피레타 영지가 아닌 곳에서 아비인지 뭔지를 만나면 되는 것 아닌가?
어릴 적부터 입고 신는 것만은 최고급품이었던 블리에에게 새것이지만 초라한 옷차림은 견디기 힘든 모욕이기도 했다.
아드리엔 피레타가 대공비로 호의호식한 지 두어 달쯤 지났을 무렵인가.
그날은 블리에의 인생을 뒤흔드는 만남이 있었던 날이었다.
블리에가 일하는 광산의 오랜 고객이라는 한 남자가 등장했다.
론타에서 직접 귀한 분이 행차했다며 다과를 차려오라는 광산주의 명령에 잠자코 시중을 들었던 날.
블리에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의 남자를 힐끔거리다가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노에비안 트로비카!’
매일 노려보던 신문 속.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자신의 남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남자.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아드리엔의 남편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흑발로 염색을 한 상태였음에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행색을 했음에도.
그녀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아본 게 분명한, 자신만큼이나 숨 쉬는 것을 잊은 듯한 남자의 아연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