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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49화 (149/171)

149화. 블리에의 사정 (4)

롯시가 늘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약하게 희석해도, 사람을 죽이는 강렬한 향은 감출 수 없다고.

롯시에게서 귀가 닳도록 독에 대해 들어왔던 블리에는 코끝을 잠깐 스치는 향을 맡자마자 어린 시절 기억의 한 귀퉁이를 뜯어올 수 있었다.

‘윈스터 영지에나 나는 독초가 여기도 있네. 지질이 비슷해서인가? 블리에! 아무거나 킁킁대지 마!’

‘독은 무슨? 코가 맵긴 해도 허브구먼.’

‘향인 척 누굴 죽이기 딱 좋은 독이니, 너같이 허영심 그득한 애한테 누가 최고급 향이라 선물하면 대번에 죽겠구나. 네 명줄이 단번에 타들어 갈 테니.’

“향이 좋네요, 비 전하.”

“콜록.”

기침을 시작한 아드리엔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틀어막곤 블리에를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하얀 손수건에 붉은 각혈 자국이 선연했다.

아드리엔은 기침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황실에서도 신경을 많이 써주신단다. 네게도 좀 줄까? 안색이 안 좋은데 몸에 좋은 향이라 네게도 도움이 될 거야.”

아드리엔은 마치 하녀와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처음인 양 상기된 얼굴로 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향을 나누어준다면 블리에가 잠시 얼굴을 빌린 이 하녀가 노에비안의 소식을 집사를 통하지 않고 전달해줄 거라는 희망이 얼굴에 두둥실 떠올랐다.

처음이었다. 아주 잠시지만 생기로 반짝이는 연녹빛 눈동자는.

“애, 애니에게는 비밀이야.”

정말 그 독을 나눠주기라도 할 생각인지 아드리엔이 창문 안으로 느리게 사라졌다.

블리에는 민들레 홀씨처럼 팔랑거리는 금발을 멍하니 보다 입매를 우그러뜨렸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꾹 말아물곤 아드리엔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왔던 방향으로 내달렸다.

욕이 쉴 새 없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달린 블리에는 그길로 대공저를 벗어났다.

급하게 쫓아오는 마차조차 버리고, 블리에는 해 질 녘의 거리를 미아처럼 걷고 또 걸었다.

“마님! 장 아저씨가 혼자 돌아와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마차까지 버리고 어딜 다녀오셨어요? 진짜 대공저에 다녀오신 거예요?”

까마득한 밤이 되어서야 도착한 백작저.

늦게까지 그녀를 기다린 요나에게 어떤 대답도 못 한 채 블리에는 분홍으로 칠해진 방에 틀어박혔다.

아드리엔이라면 이런 방에서 지내지 않을까 상상하며 결혼식을 치르기 전부터 백작에게 요구했던 방이었다.

뒤틀린 분노로 가득했던 불과 얼마 전의 모습을 떠올리자 자신을 향한 비웃음만 흘러나왔다.

“하. 아…… X발 진짜…….”

문에 등을 기대로 스르르 주저앉아버린 블리에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뭔가 잘못된 거 같을까.

왜 이렇게 심장이 죄는 것 같고 그 애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고…….

‘이렇게 괴로운 거야.’

무언가 잘못됐다. 처음부터 잘못됐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드리엔 피레타라는 애가 저렇게 살고 있단 걸. 저런 애라는 걸 조금만 알았어도…….

‘저 애에게 말이라도 해 봤을 거야.’

어떻게든.

저 애도 피해자인 걸 알았더라면!

날카롭게 세운 손톱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난 타고나길 무식하고 지랄 맞아서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블리에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대로 밤을 새운 블리에는 날이 밝자마자 돌연 엘라콘으로 떠나 롯시를 찾아갔다.

마음이 힘들 때면 습관처럼 롯시를 찾았던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이었다.

“이번엔 또 며칠이나 있다 가려고? 헛바람 들어서 위험한 짓 하고 다니는 거 아니야?”

“…….”

블리에는 며칠이나 있다 갈 거냐는 롯시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스승님.’

어둑한 블리에의 시선이 분주한 롯시의 뒷모습을 훑었다.

‘나 뭔가 굉장히 잘못한 거 같아.’

난 피해잔데.

내 아비라는 공작도 만나서 조져놓고 싶고. 혼자 잘 먹고 잘산 여동생을 좀 많이 혼내주고 싶었어. 그런데…….

‘마음이 너무 불편하잖아.’

내 잘못도 아닌데.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무수히 많은 자기변명을 시작하던 블리에가 순간 숨을 멈추었다.

‘나 정말…… 잘못이 없나?’

손끝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애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나?’

그 애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 남자에게 대놓고 꼬리를 치고.

결국엔 그 애가 죽으면 정부가 되기로까지 했는데. 그날만 기다리며 멍청하게 남편을 빼앗길 그 애를 비웃었는데.

‘정말 그 애에게 나는 잘못이 없나?’

아드리엔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보란 듯이 노에비안, 그 남자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대공비가 되고 싶다는 말까지 은근슬쩍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떳떳한가?’

모든 일의 원흉인 피레타 공작이 멀쩡하게 살아 있을 동안.

애꿎은 아드리엔이 죽기만을 바라며 비겁하게 싸움을 피하진 않았나?

블리에는 아주 고요하게, 절망했다.

‘멍청한 블리에.’

멍청한 건 아드리엔이 아니다. 자신이었다.

블리에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바르작거렸다.

‘아 변덕도 제멋대로인 블리에!’

지랄 맞을 거면 끝까지 지랄 맞을 것이지. 도대체 뭘 어쩌자고 이제 와서…….

그리고 그때.

돌연 부엌 찬장을 노려보던 블리에는 발견했다.

살아 있는 죽음의 약.

그게 들어 있는 찬장 위 작은 서랍을.

일단 그 애를 한번 살려볼까. 살려서…….

‘살리면 어떻게든…….’

물론, 폭탄 같은 블리에가 아무 약이나 주워 먹을까 봐 롯시가 약에 대해 신신당부했던 말이 번개처럼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조금씩 타오르기 시작한 눈을, 블리에는 그 서랍에서 떼지 못했다.

‘만약 실패하면……?’

그 애만 살고 자신이 들켜서 죽임이라도 당하면?

머릿속을 스치는 계획이 하나 있긴 했다. 중요한 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복잡한 생각과는 반대로 이미 버릇이 나쁜 손은 서랍 안에 고이 잠들어 있던 약으로 향했다.

롯시가 잠깐 제 방으로 들어간 틈을 탔다.

밤새 롯시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블리에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롯시에게 말했다.

“나 아마 당분간 못 볼지도 몰라.”

“론타로 가는 게 아니야?”

“진짜, 못 볼지도 몰라.”

블리에가 더는 묻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면…… 그땐 내가 죽은 뒤일지도 몰라.”

“뭔 헛소리야. 하여튼 맨날 뜬금없는 소리는.”

블리에는 주머니에 숨긴 약주머니를 손에 꽉 쥐었다.

그리고 그날 밤.

롯시의 옆방에서 잠들었던 블리에가 홀연히 오두막에서 자취를 감췄다.

***

블리에는 국경을 넘어 론타로 돌아오기 직전, 요나를 시켜 약에 대한 소문을 흘리도록 했다. 그리고 약을 정보상에 넘겨 노에비안이 스스로 그 약을 찾도록 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먹이면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묘약.’

이런 소문은 북부 트로비카 영지에서만 돌게 할 것이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아드리엔에게 그 약을 먹이려면 노에비안을 이용해야 했다. 아드리엔의 죽음을 기다리는 정부가 가져다주는 약보다 그편이 훨씬 신뢰를 사기엔 좋았다.

‘2황자가 구하려고 혈안이 됐다는 소문을 퍼트리면 구하지 않곤 못 버티겠지.’

2황자 로아드네스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그가 보내는 약이라면 눈을 일렁이면서도 의심 없이 제 아내에게 보내곤 하던 노에비안이었으니까.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의심 사지 않기 위해 며칠 밤을 방에 칩거한 블리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노에비안과 황태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 피레타 공작과 황태자 사이에도 뭔가 있는 듯하고……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알아내는 데 한계가 있어.’

블리에는 구깃구깃해진 신문 속 초상을 응시했다.

“하지만 노에비안도, 피레타 공작도 알고 있는 너라면……. 나보다 뭐든 아는 게 더 많은 너라면 밝힐 수 있겠지.”

자신도 궁금했다.

아드리엔이 왜 저렇게 살아야 했는지.

그리고 자신은 왜 버림받아야 했는지. 단지 어머니가 자신을 낳다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그토록 비참하게 버려져야만 했는지.

문득문득 무서운 미래가 그려질 때마다, 블리에는 일기를 썼다.

[후회와 죄책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이다.]

[아카시아 백작 역시, 노에비안 트로비카와 한통속이었다가 버려질 사람일 뿐.]

[모든 걸 뒤로하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반대로 잃어버렸던 내 삶에 대한 연민에 견딜 수 없는 밤이 온다.]

자신의 몸을 취해 건강해진 아드리엔도 언젠가는 도망치고 싶을 때가 올지도 모른다.

황태자의 낮은 웃음소리와 이해할 수 없는 노에비안의 냉정한 말투가 블리에의 심장을 아무렇지 않게 밟아 짓뭉갰던 그날처럼.

아드리엔 역시, 모든 걸 뒤로하고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분명 오겠지.

[도망가고 싶니?]

아드리엔에게 하는 말이자,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어.]

그래.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자신은 피레타 공녀로서의 삶을 살 수 없었고. 애꿎은 아드리엔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돌렸던 과거를 돌이킬 수도 없었다.

아드리엔 역시 조금 더 건강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황태자나 노에비안이 그녀를 속이지 않았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돌아갈 수 없다면 맞서 싸우는 수밖엔 없었다.

[도망가지 마. 대공저로 들어가. 모든 비밀을 밝혀내.]

이미 외부 집무실이란 집무실은 모조리 다 뒤져보았다.

지금 블리에가 몰래 들어온 아카시아 백작의 집무실에도 노에비안과 관련된, 황태자와 관련된 그 어떤 구린 것도 없었다.

블리에는 잠시 훔쳐둔 금고 열쇠로 백작의 금고를 열었다.

고지식할 게 분명한 아드리엔이 이 금고까지 손을 뻗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좀 얌전해지면 안주인의 열쇠를 맡겨달라 백작에게 부탁했으니 답답하면 열어 보리라.

[도망가지 마.]

간절한 바람이었다.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인 블리에는 그대로 분홍색 일기장을 금고에 집어넣으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일기장을 펼쳐 마지막에 한마디를 더 붙였다.

[아드리엔 스완 피레타.]

처음 제 손으로, 제국어로 써보는 동생의 이름이었다.

***

아드리엔의 죽음을 직감한 황태자의 명으로, 궁이나 곳곳에 흩어진 황태자의 별장으로 보내지던 마나석 관이 이번에는 트로비카 대공저로 향하게 되었다.

블리에는 직감적으로 그 관이 아드리엔의 것임을 깨달았다.

홀로 남은 창고에서, 블리에는 내일 보낼 마나석 관에 있는 힘껏 자신의 마력을 끌어다 담았다.

열쇠 역할을 할 자그마한 마나석에게까지 마력을 밀어 넣은 블리에는 눈에 띄게 지친 얼굴로 백작저로 돌아갔다.

“블리에 님. 대공 전하께서 말씀하신 약을 구하셨대요.”

요나는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블리에가 시킨 일을 완수했다.

블리에는 말없이 일기장을 응시했다.

[불쌍한 아드리엔 피레타.]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마침내 약을 구했다.]

[어차피 아드리엔은 오래 살지 못한다. 죽음의 징후는 이미 아주, 아주 많이 보이고 있다. 시간이 없다.]

[불쌍한 아드리엔 트로비카. 결국엔 저가 정말로 아파서 죽는 것이 아니라…….]

[……제 남편이 저를 죽이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테지.]

황태자가 제 진짜 남편인 줄도 모르는 멍청한 아드리엔 피레타.

그 황태자가 가짜 남편인 노에비안과 한통속인 줄도 모르는 아드리엔 피레타.

그런 남편도 남편이라고 파리한 얼굴로 기다리는 꼴을 떠올리자 화가 끓었다.

‘내 몸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아드리엔은 아카시아 백작과 이혼을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블리에는 늘 일기장을 숨겨두던 집무실로 향했다.

【이혼하는 귀부인을 위한 지침서】

이 책을 빼 드는 순간, 자신의 일기장을 발견하길.

아드리엔의 화를 부추기는, 이런 단순한 방법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제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런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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