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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50화 (150/171)

150화. 블리에의 선택

마력을 죄다 쏟아붓다시피 했으니, 회복하기 전까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블리에는 방에 칩거하며 겨우겨우 떨리는 손으로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이 선명하게 바닥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블리에는 마법진이 사라졌다 되돌아오는 것을 보며 뺨이 흠뻑 젖을 만큼 울다가, 다시 미친 듯이 웃기를 반복했다.

중간중간 하녀들이 문을 두드리며 안부를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두 팔로 제 몸을 감쌌다.

‘이미 저질러버렸어.’

블리에는 직감적으로, 아드리엔과 자신이 이어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드리엔과 마주한 이후, 쉴 새 없이 심장이 조이는 것 같은 감각이 그랬다.

아드리엔의 숨이 끊어져 가는 것이, 폐부로 선명히 느껴졌다.

‘미안하다 아드리엔. 내 자매였던 아이야.’

어째서 그 연약한 얼굴이 머릿속을 헤집는지, 블리에는 깨달았다.

미안해서였다.

우습지도 않은 감정이었다.

‘이리하면 너 역시 잠깐은 위험할지 몰라. 하지만 진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보다 죽어 다시 살아나더라도 진실을 아는 것이 낫다는 걸 너 역시 알게 되겠지.’

진실을 모른 채 바보처럼 살고 있는 그 애의 얼굴에서 이전의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못난 언니였지만, 이렇게라도 속죄하는 나를 용서해줘.’

블리에는 의식이 끊어져 가는 아드리엔의 기운을 느꼈다.

롯시의 오두막에서 닳도록 읽은 고대 마법서에 나온 영혼을 바꾸어주는 마법.

금기된 마법. 용서받지 못할 마법.

그 마법에 대해 수식하는 말은 다양했지만 블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블리에의 떨리는 손이 미리 그려놓은 마법진 위로 향했다.

바닥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마법진이 두둥실 떠올랐다.

‘네게도 기회를 줄게.’

진실을 알고 화낼 기회.

‘그런 몸을 하고도, 나를 도와준다 했었지?’

블리에는 아드리엔과 마주쳤던 날을 떠올리며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한번 도와줘 봐. 너 자신도. 나도.”

네가 그토록 갖고 싶었을 건강한 몸을 줄게.

‘재미로만 읽어. 그런 마법 잘못 썼다간 죽을지도 모르니까.’

롯시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잠시 스쳤다.

“빌어먹게 어려운 고대 마법아. 부디 우리의 영혼을 바꾸어 아드리엔에게 내 육체를 선물해줘.”

너는 나보다 똑똑하니 뭐라도 밝힐 수 있겠지. 어쩌면 네가 가질 몸이 네 쌍둥이 언니라는 사실도.

의식이 끝없는 물속으로 빠진다.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올리비아를. 블리에는 죽음에 가까워지고서야 이해했다.

‘올리비아에게 난 진짜 딸이었구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을 애틋하게 키웠다는 이유만으로 더 나은 삶을 포기할 수 있었던 그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감정이 아드리엔에게 든다.

마나석 관에 거의 모두 쏟아놓고 온, 갈 곳 잃은 마력이 멀리서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아.

‘나도 네게서 빼앗은 게 있구나.’

의식이 점점 물속에 잠겨 드는 것 같을수록 블리에는 확신하기 시작했다.

‘주제에 맞지도 않게 넘쳐흘렀던 이 마력은 본래 너와 나누어야 했던 것이었구나.’

블리에는 이제 울었다.

아 진짜 어쩌면 나…….

‘죽을지도 모르겠어.’

정말 깊은 물속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멈출 수가 없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생전 처음 해보는 이 고대 마법 나부랭이를 놓칠 수 없었다.

‘그 애를 살리고 싶어.’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빠진다.

두 손을 힘껏 뻗어도 아무도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블리에는 미소 지었다.

물 아래에서, 살려 달라 외치는 동생 아드리엔 피레타를 보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아 자신의 위로 건져 올렸다.

***

“참 우습지. 내가 너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단 한 번도 가족이었던 적 없는 널 살리려고.”

“노에비안을 사랑했어?”

나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블리에를 향해 겨우 물었다. 블리에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니 가슴이 떨린 적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그 새끼가 나랑 상의도 없이 날 이용해 먹으려 한 걸 알았을 때 정이 떨어졌어. 그리고 바보같이 그런 놈을 기다리고 있는 널 보니까 화가 나더라.”

“……내가 불쌍했어?”

“그래. 불쌍했어.”

블리에가 날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황태자인지 똥인지 하는 놈이 네가 자기 정부라고 했다가 아내라고 했다가 별 지랄을 다 하는데도. 넌 철석같이 노에비안 그 새끼를 믿고 기다리는 꼴이 X나 불쌍했어.”

“그 고대 마법이란 건 뭐야? 우리의 영혼이 바뀌는 거야?”

“맞아. 하지만 한쪽의 영혼이 아바델리아로 갈 만큼이나 육체에서 멀어질 때 시행할 수 있는 거야. 네가 딱 죽기 직전. 그때를 노렸어.”

블리에는 처음엔 롯시의 눈치를 보다가, 주절주절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머리를 열심히 굴렸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앞에 나섰다가는 곧장 어떻게든 죽임을 당할 것 같았고, 몰래 무슨 일을 꾸미자니 배운 게 주술이라 불리는 마법뿐이라 이런 방식밖에는 생각해내지 못했다고.

“……만약 네가 날 찾아왔다면, 난 널 도왔을 거야.”

그리고 그 말 한마디에 블리에의 심술궂던 표정이 아주 일순간이나마 일그러졌다가 돌아왔다.

블리에는 나를 빤히 노려보듯 응시하다가 곧 힘이 빳빳하게 들어갔던 입매를 풀었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야. 인정해. 내가 진짜 멍청했어.”

내가 대답이 없자 블리에가 덧붙였다.

“나는 네가 나처럼 지랄 맞고 변덕도 심한 애일 거라 생각했거든, 너를 만나기 전에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야. 나도 열받으니까 너 못지않더라고.”

허공에서 두 시선이 부딪혔다. 심각한 표정을 했던 우리 얼굴이 잠깐이지만 피식 웃고는 돌아왔다.

“네가 말하는 그 ‘개자식’들을 내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들으면, 너조차 나를 무서워할 만큼이었지.”

“오, 그래? 그럼 내가 어떻게 노에비안 그 새끼의 계획을 망치려고 아카시아 백작을 준비시켰는지 들으면 깜짝 놀랄걸? 아, 아카시아 백작! 그 영감 살아 있어? 그 불쌍한 영감…….”

“살아 있어.”

문득.

아카시아 백작의 생사를 확인하는 블리에를 응시하던 나는 계속 가시처럼 내 마음속에 박혀 있는 말을 꺼냈다.

“그보다, 너…….”

블리에가 눈썹을 까딱했다.

“죽을 생각이었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블리에에게 쏘아붙였다.

한참 감상에 젖어 있던 블리에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영혼을 바꾸려 했을 때? 내가 왜 널 위해 죽니? 그저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긴 했지만 멈추진 않은 거지.”

“원래 죽었어야 했다며.”

“그 더럽게 어려운 마법에 대한 롯시의 경고가 뒤늦게 생각났거든. 하지만 뭐 이미 저지른 걸. 아마 마력이 같은 쌍둥이라 마법이 좀 서툴렀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도?”

블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꼴을 본 롯시의 손이 망설임 없이 블리에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블리에가 말하는 동안 어찌나 참았는지 도톰한 입술에 이빨 자국이 선연했다.

“내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책장의 책도! 좀! 비었더라니!”

“아! 아야! 내가 황태자 놈의 뒤가 구려서 얼마나 조사를 했는데! 그 새끼가 왜 마나석 관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지 조사하려고 책 좀 훔쳤어! 결국엔 롯시도 잘됐잖아?”

“내가! 내가 너 죽은 줄 알고!”

롯시가 등짝 때리던 걸 멈추고 블리에를 끌어안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이게 다, 사실이야?”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 없이 열린 문으로 향했다.

“그레고리……!”

그레고리와 비앙카, 그리고 올리비아였다.

***

“……저렇게 보내도 되는 거야?”

“오빠도 언젠간 알아야 할 이야기였어.”

그레고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말을 탄식처럼 내뱉다가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올리비아와 비앙카까지 입을 열자 몸을 떨었다.

어떻게 그런 큰일을 아무도 제게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원망의 빛이 얼굴에 그득했다.

그는 아버지가 단순히 어머니의 죽음으로 블리에를 버렸을 리가 없다며 중얼거렸다.

그레고리는 그 후로 한참 뭔가 짐작하는 표정을 하다가 아버지를 찾아오겠다며 사라졌다.

“오빠라, 오빠…….”

블리에는 샐쭉하게 저와 닮은 오빠의 잔상을 쫓았다.

그러다 금세 머리가 아파지는지 이마를 짚고는 쉬고 싶으니 다들 나가달라 말했다.

“아니, 나가야 할 건 너야. 블리에.”

“?”

나는 계속 입고 있던 하얀 신관복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로아드네스가 얼떨결에 내 겉옷을 받아냈다.

“뭐야? 왜 갑자기 옷은 벗고 지랄이야?”

“다시 바꿔야지. 우리 둘.”

“!”

블리에는 그제야 저가 입은 옷을 손가락으로 집어 살폈다.

바르데날도의 지하실에서 내가 갈아입힌 미색의 드레스였다.

“지금 누워 있는 건 ‘아드리엔’이어야 하잖아.”

“이렇게 갑자기? 네가 내 몸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제야 몇 개 주워들었는데? 나는 너만큼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금방 까먹었다고.”

“요나가 우리 사정을 대충 알아. 당분간 적당히 나처럼 굴어.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은 아직 황태자비의 시녀이자, 돌아가신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이기도 했으니 이전과는 상황이 달라.”

“곧 재판받고 죽을 황태자비 시녀가 뭐라고…….”

블리에가 얼떨결에 비척비척 일어나 옷을 갈아입을 태세를 취하자 결국 로아드네스가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힐끔 보던 블리에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그럼 네 연인도 내가…….”

“꿈도 꾸지 마.”

“이거 봐. 저 사나운 거 좀 봐. 저거 내 동생 아니라니까?”

툴툴거리던 블리에는 금세 언더드레스만 입고 짝다리를 짚었다.

나 역시 언더드레스만 입은 상태로 신관복을 건넸다.

“이전과는 많이 다를 거야.”

“그래, 뭐. 다르겠지.”

“이제 달라진 네 위상으로 아버지한테 제대로 복수해 봐. 하고 싶은 것도 맘껏 하고. 욕은 좀 자제하고. 내가 다시 쌓아둔 이미지도 있으니까.”

“이게 언니한테 이래라저래라…….”

똑똑.

블리에가 신관복을 입으며 발끈하자마자 공손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침대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살짝 뜬 실눈으로 블리에가 우왕좌왕하다가 어설프게 허리를 곧게 펴는 게 보였다.

벌컥!

문이 열리자 대신관 텔른이 신관들을 잔뜩 이끌고 와선 눈을 빛내고 서 있었다.

텔른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신관복을 입고 선 블리에를 향해 다가가 손을 덥석 마주 잡았다. 그러고는…….

“제가 직접! 대공비 전하뿐만 아니라, 부인까지 성녀의 이름을 쓰실 수 있도록 힘써보겠습니다!”

“이게 뭔, 개…….”

“그토록 정확한 신탁을 여러 번 받으셨으니, 부인께서도 성녀의 칭호를 받아 마땅하십니다! 제가 증인이 아닙니까? 윈스터 후작님과 에페로 황자께서도 보셨고요!”

블리에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실눈을 뜬 채 누운 내게로 향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녀로 기록되실 수 있도록! 이 텔른이 곁에서 돕겠습니다!”

다소 창백한 블리에의 입술이 험한 욕을 내게 소리 없이 그려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리고 신관들의 환호를 받으며 방 밖으로 거의 끌려가듯 사라지는 블리에의 발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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