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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51화 (151/171)

151화. 혼인 신고서

로아드네스는 닐과 빈센토가 곁에서 읽어주는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을 들어넘겼다.

[불길한 붉은 눈의 괴담을 퍼트린 건 푸른 눈의 황가였나.]

[주신의 뜻은 서부의 딸이 아닌, 동부의 딸이었다!]

[도리스 카스타냐의 거짓과 진실]

[도리스 카스타냐는 정말 바르데날도 론타를 죽였나? 그날 밤의 진실과 증언.]

“신문사들도 기적을 보더니 미쳐 날뛰는군.”

“시정하라 공문을 보낼까요?”

“둬라. 뭐라 지껄이든 지금은 내게 좋은 말뿐일 테니.”

빈센토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로아드네스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 여자는?”

지하 감옥에 갇힌 도리스를 묻는 말이었다. 닐이 냉큼 대답했다.

“말도 마십시오. 간수도 그런 독종은 처음 본답니다. 한 끼도 안 먹고 전하를 만나게 해달라 버틴다는데 우리 개화…… 아니, 차기 황태자 전하께서 그런 협박에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는 걸 모르나 봅니다.”

“적당히 먹여둬. 강제로라도.”

“예?”

“제 발로 걷게 해서 단두대에 세울 거니까.”

집무실로 함께 향하던 부관들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분주해졌다.

“재, 재판 없이 단두대에 세우실 겁니까?”

“공개 처형이라도 하신단 말입니까?”

어느새 집무실에 다다른 로아드네스가 닐과 빈센토의 이어지는 질문을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집무실 책상 위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서류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재판은 한다. 재판 준비도 끝났고. 결과는 사형. 그 딸도, 아비도. 서부의 대가리들은 모조리 자르고 새롭게 세운다.”

로아드네스가 사납게 웃으며 두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탁탁 쳤다. 닐이 오싹 돋는 소름을 느끼며 팔을 쓸었다.

이빨을 드러낸 로아드네스의 일 처리는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그럼 이 기세를 몰아, 형사취수제 폐지도…….”

“아니, 그건 그냥 둬.”

닐이 큰 눈을 끔뻑였다. 로아드네스가 제 자리에 방만하게 앉은 채 서류 하나를 뚫어져라 봤다.

“저번에 따로 가둬둔 놈은?”

“대공저의 집사 말씀이십니까?”

“그놈 불러와. 반쯤 죽여놔도 좋으니 고분고분한 상태로 대령해.”

“제 전문이죠.”

“잡소리는 하지 말고.”

닐이 재빨리 집무실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빈센토가 불안한 시선으로 로아드네스에게 다가갔다. 빈센토의 시선이 로아드네스가 더듬고 있는 서류로 옮겨갔다.

“전하……?”

“사람 일은 참 재밌지 않나.”

마디가 굵고 길쭉한 손가락이 느릿하게 제 턱을 쓸었다. 도톰하게 살이 오른 관능적인 입술 끝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로아드네스의 손에 들린 건 황족이 혼인했을 때 황실에 제출해 보관해야 하는 혼인 신고서였다.

“바르데날도가 도리스 카스타냐와의 혼인 신고서에 서명하지 않았더군.”

아드리엔이 대신전에 머무는 동안, 로아드네스는 황태자 궁과 별장을 한바탕 뒤집어엎었다.

혹시나 싶어 들른 지하의 비밀 방에서, 그는 금고 하나를 찾아 부수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습득했다.

“더 재밌는 건…….”

로아드네스가 뒷장을 들고 팔랑였다. 빈센토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억, 하는 소리가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런!”

“대공과 아드리엔의 혼인 신고서에 동의하는 서명도 하지 않고 보관 중이었어.”

로아드네스는 혼인 신고서를 발견하자마자 척추를 관통하는 짜릿함을 느꼈다.

단순히 도리스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않는 것만으로, 피레타 공작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까? 라는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된 큰 수확이었다.

“이리되면……”

“그 형사취수제, 내가 좀 다르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빈센토는 곧장 그 말을 알아들었다.

“내 멋대로 행동하면 또 빈센토 너나 할머님이 난리가 날 테니 묻지.”

배부른 맹수처럼 웃던 로아드네스가 돌연 눈을 빛내며 빈센토를 응시했다. 마치 그를 시험해보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눈이었다.

“나는 대공저 집사 놈에게 바르데날도의 혼인 신고서를 던져주며 똑같이 적으라 명할 거야. 단, 황태자비가 될 여자의 이름엔 아드리엔 피레타의 이름을 적게 할 테지.”

“전하!”

“대공과 아드리엔의 혼인 신고서는 신문사에 팔아넘기려고.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마음속으로 정한 황태자비는 아드리엔이었다 공표하고, 작당한 피레타 공작까지 쳐내려 하는데.”

“제게서 무슨 대답을 원하십니까?”

“이로 인해 동부의 세력이 휘청하게 되면, 윈스터 후작가가 아드리엔을 지지해줘야겠어.”

“!”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멋대로 보관한 아드리엔의 혼인신고서는 내 손에 의해 밝혀지고. 나는 그의 죄를 인정하고 책임지겠다 공표하지. 형사취수제에 의해 서류상 형님의 아내였던 아드리엔을 황태자비로 세울까 해.”

빈센토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몸을 가까스로 세웠다. 로아드네스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동의를 구하는 것도, 의견을 묻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리 정했으니, 잠자코 따르라는 명령이었다.

“묻지. 내가 대공저 집사 놈을 이용해 필체를 위조하고. 바르데날도의 혼인 신고서를 다시 꾸며 그런 짓을 벌여도 나를 지지할 것인지.”

빈센토가 크게 앓는 듯한 신음을 냈다.

어차피 다 정해놓고 뭘 더 어쩐단 말인가?

아드리엔과 블리에의 몸이 바뀌었다는 말도 안 되는 진실을 전해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참이었다.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바르데날도가 저지른 짓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대신 바르데날도가 더 이상 어머니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이후론 입조심을 하지.”

이미 그런 사실을 공표하는 것만으로 ‘성자’ 바르데날도의 이미지는 처참해질 테다.

하지만 바르데날도의 용서받을 수 없는 짓거리의 가장 큰 피해자인 로아드네스가 하는 일을 빈센토는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저 사악하고 아름다운 주군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피레타 공녀와 혼인하고 싶다는 말씀을 참 무섭고 어렵게도 하십니다.”

빈센토가 깊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카뉼라에게 어찌 전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졌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빈센토에게 승리의 미소를 머금던 로아드네스는 이어지는 빈센토의 말에 잠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데 그 결심, 공녀께서는 아십니까?”

“…….”

그리고 빈센토는 아주 잠깐의 그 멈칫하는 기운을 동아줄처럼 꼭 붙들었다.

카뉼라를 설득하고 민심을 수습하고, 로아드네스를 황태자로 확실히 옹립하기 위해 혼란스러운 귀족들을 규합하려면 시간을 벌어야했다.

오로지 피레타 공녀만이 목적인 듯 구는 로아드네스를 위한 길이기도 했다. 황태자가 되기도 전에 황태자비 후보부터 로아드네스의 입에서 나오는 경우만큼은 막아야 했다.

“공녀님과 혼인하고 싶다는 말씀을 저보다는 공녀님께 먼저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주 서서히 창백해지는 로아드네스의 얼굴을 보고, 빈센토는 자신이 시간을 얼마간 벌었음을 확신했다.

***

나는 눈을 뜨자마자 대신관 텔른의 얼굴을 봐야 했다.

아바델리아는 어땠냐느니 주신의 존안을 뵈었냐느니 하는 부담스러운 질문들이 이어졌다.

블리에는 내가 잠든 척하는 동안 지독하게 텔른에게 시달린 듯 아까보다 핼쑥해져서 ‘이제 네가 저 영감을 감당해.’라는 얼굴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블리에를 향해 산뜻하게 웃으며 텔른을 향해 말했다.

“죄송해요, 아무런 기억도 안 나는 걸요.”

“아, 아 그러십니까? 일단 약을 좀 드시고, 천천히 생각을…….”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주신의 뜻이 아닐까 해요.”

텔른은 멍하게 내 입술을 바라보다가 돌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팽! 풀었다.

그리곤 어깨를 들썩이며 격렬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보조 신관으로 보이는 자가 급하게 텔른을 밖으로 이끌었다.

“너 아주 여우 새끼가 따로 없구나, 아드리엔. 내가 빌어먹을 성녀 소리를 들으면서 얼마나 사뿐사뿐 걸으려 노력했는지 알면 네가…….”

대공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도 블리에는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요나가 중간에 합류해 그녀를 끌어안고 엉엉 우는 걸 달래면서도 말이다.

마차 문이 열리자, 닐과 빈센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블리에는 성녀의 이미지 때문에 입을 꾹 닫은 채 나를 한번 노려보고 내렸다. 빈센토가 기꺼이 그녀를 에스코트해주었다.

나는 닐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전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아, 그렇군요.”

나는 로아드네스를 찾았던 시선을 들킨 게 부끄러워 살짝 얼굴을 붉히곤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일자리를 잃고 쫓겨난 공간은 어쩐지 좀 황량했다. 그만두지 않은 마리와 우리와 함께 온 요나가 부지런히 응접실에 따뜻한 차를 끓여 나르기 시작했다.

“아, 공녀님. 그리고 오늘 가스팔이 왔어요.”

“가스팔?”

나 대신 블리에가 요나의 말을 낚아챘다.

그리고 동시에, 응접실 문이 살짝 열렸다.

익숙한 얼굴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옷차림은 이전처럼 말끔하지만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고 초췌한 빛이 역력한 가스팔이었다.

“저놈 아직 살아 있네. 눈깔 기름에 담갔다 뺀 새끼. 감히 어딜 쳐다보고 지랄이야?”

가스팔의 눈이 우리를 향하자마자, 블리에가 벌떡 일어나 날카롭게 소리쳤다.

“블리에.”

내가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블리에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자네는 2황자 전하께서 특별 가옥에 구금시킨 걸로 아는데. 대공저에는 어쩐 일이지?”

가스팔은 차분히 질문한 나와 블리에를 번갈아 보며 눈을 점점 키우다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닐이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자 고개를 푹 숙이고 답했다.

“2, 2황자 전하의 명으로…….”

“말꼬리 길게 늘이는 꼴 좀 봐. 사내새끼 말하는 게 저게 뭐야. 똑바로 말 안 해?”

블리에의 호통에 가스팔의 어깨가 움찔 튀더니 겨우겨우 고개를 들었다.

“중요한 일로 차출되었습니다.”

“재수 없는 놈.”

“블리에.”

가스팔은 블리에의 말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얼굴로 결국 닐에게 끌려 어딘가로 갔다. 요나가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블리에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때, 열린 문틈으로 마리가 쏜살같이 뛰어왔다.

“마님!”

마리는 나와 블리에 중 누구에게 아뢰야 할지 헷갈리는지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내게 아룄다.

“마님의 친정분들께서 오셨는데 어찌할까요?”

가스팔 때문에 열 받는다며 부채질을 하던 블리에의 동작이 딱 멈추었다.

“아버지도 오셨니?”

“네, 마님.”

나는 블리에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블리에의 눈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잠자코 곁에 앉아 있던 롯시가 블리에의 손을 꼭 잡아주자 블리에는 그제야 깊게 한숨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로 모시렴.”

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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