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피레타 소공작
그레고리는 수도의 별장에서 어렵지 않게 피레타 공작을 찾았다.
그는 굳이 동생들의 영혼이 바뀌었다느니 따위의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다만 신문만 줄창 읽어댄 흔적이 역력한 소파 주위를 살폈다.
건강이 악화된 이후로 끊었던 시가의 흔적들이 재떨이에 남아 있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아버지는 불안하거나 흥분할 때마다 시가를 손에 잡곤 했으니까.
“그레고리, 잘 왔다. 수도에 시가가 다 동이 났다는데 네가 좀 구해 와. 멍청한 동부 촌놈들이 시가 하나 구하지 못해 허둥대는 꼴이라니.”
현관을 지키고 선 시종들이 얼굴을 붉혔다. 그레고리는 대답 없이 공작이 읽고 있는 신문을 살폈다. 로아드네스 2황자가 황태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조의 기사였다.
“블리에는?”
“아드리엔은 안 찾으십니까? 걱정 되지 않으십니까?”
“그 애는 네 안사람이 잘 챙기겠지, 늘 그랬듯이. 동부로 데려가 재취 자리나 알아봐 주면 될 테다. 블리에는? 2황자와 좀 어떻다더냐?”
“아버지가 이러시는 게…… 블리에가 아버지의 후계가 되어 제 자리를 차지할까 봐서입니까?”
불붙이지 않은 짧은 시가를 씹어대던 입술이 뚝 멈추었다.
공작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레고리의 얼굴을 갈랐다. 아름다운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
“제가 모르리라 생각하십니까? 저도 눈이 있고 귀가 있습니다. 어째서 피레타의 후계인 제가 반쪽짜리 역사를 배워야 합니까?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마력을 가진 후계가 모계 계승을 해왔다는 것을 어찌하여 제가 몰라야 합니까?”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그래서 블리에를 죽이라 하신 겁니까? 모계 승계를 끊기 위해서? 저를 위해서? 무슨 방법을 쓰신지는 몰라도, 그 애에게서 마력을 느끼셨지요?”
공작이 빠르게 시종들을 물리고 짧은 시가에 불을 붙였다.
지병의 악화로 덜덜 떨리는 손은 위태로워 보였다.
그레고리는 노쇠한 공작의 손에서 이질적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반지를 응시했다.
어머니가 가문의 운영을 맡기며 아버지에게 선물한 가주의 반지.
블리에가 태어나자마자 새로운 마력을 인식한 저 반지가 분명 번쩍 빛났을 테다. 피레타의 후계는 대부분 마력이 있었다는 말을 롯시라는 대주술사로부터 들은 참이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마력을 가진 후계들이 필요했다. 마법을 금지했던 시절이 아니니까. 하지만 제국이 된 론타는 여태껏 마법을 금지했지.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짐작이 가느냐? 피레타의 후계들은 자신의 마력을 감추고 동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지만 그게 어디 귀족이란 말이냐? 나는 광활한 영지를 가지고도 촌구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려는 네 외할머니가 싫었다.”
“피레타의 데릴사위란 말이 듣기 싫어 제게 영지를 맡기고 수도로 도망치시려던 건 아니고요?”
공작의 눈썹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어머니가 몸이 약하시긴 했지만 영지 일을 못 살피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임신과 출산이 여인의 몸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아시는 분이…….”
“네 어미를 사랑했다. 하지만 난 피레타도 사랑했어. 구시대적 악습은 끊어야지! 내 후계는 너야! 내가 마력 없이 피레타를 잘 이끌었듯이 너도 그럴 수 있다! 네가 피레타를 이끌어야 해!”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공작은 신경질적으로 마지막 남은 시가를 창밖으로 내던지곤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블리에를 만나러 가자고 날 찾아 온 거겠지? 그 애가 내게 약속한 게 있다. 황태자의 장인이 되게 해주겠다고.”
“…….”
그레고리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공작이 빠르게 아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주름진 손으로 강건한 아들의 어깨를 꽉 쥐었다.
“사내로 태어나, 권력을 손에 쥐지 않는 것은 수치다. 아들아. 나는 네게 그것을 가르치려 함이야.”
***
응접실이 때아닌 손님들로 북적였다.
나는 마침 방문한 에페로와 함께 잠시 물러나 상황을 관전했고, 블리에와 아버지, 그리고 그레고리가 원탁에 둘러앉았다.
아직 우리가 쌍둥이라는 사정만 알고 있는 에페로는 내가 이전처럼 친근하게 인사하자 어색하게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죽은 대공비 아드리엔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일 테니 당연했다.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둔 이들은 생각보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블리에의 성격상 공작이 오자마자 뭐라도 집어 던질 것을 예상했던 나는 조금 놀란 참이었다.
블리에는 아버지가 건네는 ‘그리웠다’느니 ‘너를 죽이라 했던 것은 진심이 아니었다’느니 ‘유모가 너를 거둘 것을 진즉 알고 있었다’따위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대신 두 팔을 팔걸이에 걸치고 다소 방만한 자세로 앉아 아버지가 말할 때마다 턱만 까딱였다.
“2황자께서 대공저에 계시단 말을 들었는데. 어디 계시냐? 네가 황태자비가 될 수 있는지 그게 제일 궁금하구나.”
블리에가 미소 띤 얼굴 그대로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블리에의 눈치를 조금 살핀 아버지가 흠칫하고는 말을 고쳤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제일 궁금하구나. 늦게나마 아비 노릇을 하려면…….”
“2황자랑은 끝났어요. 그는 아드리엔이 좋다지 뭐예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파며 대답하는 블리에의 말에 아버지가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다 다시 돌아갔다.
“네가 있는 이상, 그럴 수 없어. 네가 2황자 전하와 이루어져야 해!”
아버지가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 역시 두 눈썹을 서서히 모았다. 이상한 소리를 하면 내가 나설 참이었다.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그레고리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아버지가 블리에를 비난하기 시작하자 목소리를 냈다.
“아버지, 그만하십시오.”
“넌 가만히 있어라, 그레고리!”
“제가 소공작 자리를 내려놓겠습니다.”
순식간에 응접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잘못 들었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없이 자리를 떠나려는 그레고리를 붙잡곤 민낯을 드러냈다.
“줘도 못 받아먹는 놈 같으니라고! 아드리엔이 황태자비가 되고, 블리에가 동부로 온다면 네 자리를 뺏길 수도 있단 걸 몰라?! 헬레네가 건강이 좋지 않아 내게 이 자리를 맡겼지만 제 딸이 마력을 타고났단 걸 알면 후계자 수업을 받은 네가 아니라 블리에에게 물려주려 했을 게다, 이 멍청한 것!”
“단 한 번도 그 자리가 당연히 제 자리라고 생각했던 적 없습니다. 심지어 어머니께서는 쌍둥이를 임신하셨을 때 제게 소공작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말씀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피레타의 악습을 끊는다고 하셨지만 되려 어머니야말로 그런 전통과는 관계없이 피레타를 가장 사랑하는 후계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레고리!”
“그러니 아버지는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뒷목을 감싸 쥐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블리에에게로 몸을 틀었다.
“블리에! 네 오빠를 말려봐라. 네가 황태자비가 되려면, 친정의 든든한 지원은 필수야! 배운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네가 동부에 와 봤자 뭘 하겠느냐? 2황자 전하의 사랑을 받고 네 오라비를 지원해 수도로…….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네가 어쩌고 싶은지 말해 봐라. 네게 결정권을 주마.”
당연히 황태자비가 되고 싶다고 말할 줄 알았는지 아버지가 다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블리에는 한참 대답 없이 아버지를 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일어나 아버지를 마주하자 아버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는 피레타 공작이 되고 싶어요.”
“……뭐?”
아버지는 제 것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가 어쩌고 어째?”
“피레타로 돌아오지 말라는 올리비아의 경고만 들었는데, 지금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거기 내 것이었네?”
“너……!”
“내가 원하는 것?”
블리에가 싸늘하게 피식 웃고는 보란 듯이 마력으로 활짝 열려 있던 창문을 닫았다.
햇살을 안으로 들여오던 작은 창문들이 차례로 탁탁 소리를 내며 닫힐 때마다 아버지는 공포에 질린 눈을 했다.
“자격 없는 데릴사위가 내 어머니의 땅을 점유하고 있는 꼴이 보기 싫네요. 물러나세요, 자격 없는 공작 각하.”
***
“이…… 이……!”
“물러나게, 공작.”
순간 응접실에 있던 모든 시선이 반쯤 열린 문으로 향했다.
성장을 한 로아드네스가 푸른 망토를 펄럭이며 응접실로 들어서자 공작은 예조차 갖추지 못한 채 숨을 멈추었다.
로아드네스의 곁에 엄숙한 얼굴의 빈센토가 파일로 묶어둔 서류를 한아름 안고 있었다.
“천륜을 저버리고. 피레타 가의 재산을 개인의 명의로 돌려놓은 정황까지 발견했는데, 어쩌겠나.”
“전하!”
공작이 비명처럼 탄식했다.
“조용히 물러나거나, 서부의 카스타냐 일족과 나란히 서서 재판을 받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게 좋겠군.”
“아, 아드리엔. 아드리엔……!”
공작은 급기야 아드리엔을 불렀다. 아드리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공작은 등골이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늘 탕아라 생각했던 2황자의 존재감은 생각보다 압도적이었고, 그 위압감에 그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블리에, 블리에 네가 약속했지 않느냐.”
황태자의 장인이 되고 싶다면 2황자를 지지하라 했던 그것.
아드리엔이 블리에에게 눈짓했다. 블리에 역시 아드리엔에게 들어 그 약속을 알고 있었다.
“황태자의 장인이 되게 해드린다 했지, 그게 저라고는 말 안 했잖아요.”
매정한 말에 공작이 무너졌다. 결국 쓰러지는 공작을 그레고리가 부축했다.
“집안 문제에 나서시게 해 송구합니다, 전하.”
그레고리는 착잡한 얼굴로 로아드네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블리에 네 의견이 그렇다면, 내가 책임지고 아버지를 물러나시게 하고 이 자리를 네게 주마. 내게는 소공작 자리보다, 이제 막 돌아온 내 동생이 더 중요해.”
그레고리가 공작을 들쳐메고 응접실 문을 벗어났다. 블리에는 그레고리가 던져놓고 간 다정하고 단호한 말을 곱씹으며 굳어 있었다.
그리고 제게 다가오는 아드리엔을 향해 비뚜름하게 웃었다.
“잘됐네. 아카시아 백작이 돌아오면 나 이제 아카시아 백작 아닌 거잖아. 영감 부인 노릇도 지긋지긋하고. 좋은 거 입고 맛있는 거 먹다가 평민 생활 못 하겠어.”
블리에가 긴장했던 몸을 풀고 그제야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드리엔은 지금 당장 공작이 될 수는 없을 거라 조언했다.
영지 사정도 잘 모르고, 후계자 수업도 받아야 하니 동부로 가서 그레고리에게 후계자 수업을 듣는 게 좋겠다는 첨언까지 했다.
“……내가 공작이 돼도 상관없어?”
“너도 후계의 자격이 있잖아, 블리에 피레타.”
블리에는 아드리엔의 대답에 잠시 멍해져 있다가 씨익 웃었다.
“피레타 공작이 되면 사내도 두셋쯤 들일 수 있을까?”
아드리엔의 미간은 살짝 좁혀졌는데, 반대로 멀찍이 서 있던 에페로는 그 말을 듣고 큭큭 웃었다.
블리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에페로가 급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웃음을 꾹 눌러 참는 얼굴을 감출 순 없었다.
블리에는 그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보곤 아드리엔에게 속삭였다.
“근데 저놈은 누구야. 왜 아직 소개를 안 해줘? 제법 잘생겼는데 한 번 꼬셔볼까.”
아드리엔은 속삭이는 블리에의 목소리를 들으며 에페로를 살폈다.
웃음을 참는 에페로의 눈가가 어쩐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로아드네스가 블리에가 아닌 아드리엔을 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란 얼굴과는 다른 느낌의 붉은 얼굴이었다.
***
다음날.
폭풍전야와도 같은 론타를 뒤흔든 또 하나의 소식이 제국일보를 통해 전해졌다.
동부의 피레타가 모계 계승을 원칙으로 하는 전통을 이어, 블리에 피레타가 새로운 동부의 소공작이 된다는 소식이었다.
당분간은 그녀의 오라비인 그레고리 피레타가 공작의 대리가 되어 소공작을 지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새로운 소식에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신문은 이어 덧붙였다.
대공비 아드리엔과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쌍둥이 자매 관계이며, 제국 최초의 ‘성녀’ 칭호를 받은 자매라고 말이다.
[기적! 주신께서 이어주신 사상 최초의 성녀 자매! 대신관 텔른의 눈물의 증언 ‘그날도 눈이 내렸다.’]
그즈음 그런 헤드라인을 가진 기사와 함께 황태자 바르데날도와 재판을 앞둔 도리스 카스타냐의 결혼이 무효라는 소식이 떴다.
이어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점찍어둔 진짜 황태자비는 아드리엔이었다는 기사까지.
그리고 수도를 뒤흔든 그 소식이 지하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도리스에게까지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