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60화 (160/171)

160화. 무정한 아버지

“전하, 그림자가 다녀갔습니다.”

말없이 내미는 손에 서신 몇 통이 올려졌다. 로아드네스의 서늘한 눈이 휘갈겨 쓴 듯한 글씨들을 읽어 내렸다.

실상은 서신을 빙자한 보고서였다.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감시하는 그림자들의 보고서.

“계속 쫓아야 할지 물어봅니다. 아직 별다른 특이점은 없고,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다는 정보만 있습니다.”

“접근은 하지 말고. 계속 쫓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건 어떠십니까?”

빈센토가 망설이다 질문했다. 로아드네스는 대답 없이 다음 서신을 훑어보았다.

“황제께서 레티나 황후 폐하의 장례를 다시 치르고 싶어 하십니다.”

“장례를 두 번 치르는 사람도 있나?”

“이번엔 황실의 전통대로가 아니라, 짧고 경건하게 치르고 싶어 하십니다.”

“죽은 사람을 오래 붙들고 있는 것도 좋지 않지. 그래도 내 의사를 묻는 척이나 해주셔서 감사하다 해야 하나?”

심드렁한 말투와는 달리 날카롭게 벼려진 눈은 쉬지 않았다. 빈센토가 한숨을 푹 쉬고 천막을 벗어났다.

로아드네스는 그제야 가장 아래에 있던 서신을 뜯어보았다. 서신을 뜯자마자 날카롭게 치떴던 눈이 아래로 축 처졌다.

아드리엔에게서 온 편지였다.

로아드네스는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깨끗하고 말간 아드리엔의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려 죽을 맛이었다.

그는 어머니 레티나 황후의 관을 끌어안고 황제궁에 칩거한 황제를 대신해 급한 정무를 처리해왔다.

썩어빠진 눈치로 일거리를 한아름 안고 신방으로 찾아오는 시종의 멱살을 몇 번 쥐고 흔들면 하루이틀은 잠잠했다.

하지만 마물 토벌은 다른 이야기이다.

‘광증은 집착을 끊어내면 사라질 거야. 본래 인간의 범위를 넘는 힘을 가진 자들은 그 힘을 지속적으로 쏟을 곳이 필요한 법이니까.’

롯시의 음성이 귀에 들리는 듯 선명했다. 그는 아드리엔의 편지를 두 손에 모아쥐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아드리엔이 황자님이 겪는 목마름의 원인이라면, 그만큼 그녀가 특별하기 때문일 테지. 온 힘을 쏟아서 집중하는 상대이니 어린 시절 그 광증의 대상이 아드리엔이라 여겼을 만해. 마물의 피를 보고 광증이 도지는 이유는 마력을 아직 이로운 힘이라고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해서고.’

‘그럼 어찌해야 하지?’

‘아드리엔이 제 마력을 찾았으니, 그 애에겐 힘을 누르지 않아도 될 테야. 그 애의 마력이 당신의 마력을 받아줄 테니까. 마물을 보고 제정신으로 그것들을 없애려면 본인의 힘이 이로운 것이라는 걸 충분히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 힘을 쓰시면 해결될 일이고.’

드물게 동정 섞인 목소리가 머릿속을 배회했다.

‘황자님은 그동안 뭐든, 너무 참고 산 것 같군.’

롯시의 말대로.

숨기고 제어하기 급급했던 힘을 이제는 마음껏 썼다.

짧은 토벌전에 참여한 군사들의 수고가 반으로 줄었고 그는 이전만큼 피를 원하는 괴물처럼 싸우지 않았다.

아드리엔과 함께하고 싶다는 집착이 만들어낸 광증.

불길한 놈이 마력까지 가져 형님에게 쏟아질 관심을 뺏을까 봐 필사적으로 제어했던 인내가 만들어낸 광증.

그 모든 게 그저 참지 않으면 해결되는 것이었다니.

허무할 만큼 간단한 해결책이 아닌가.

로아드네스는 쓰게 웃으며 간이 침상 위에 누웠다.

그리 죽인 마물들의 심장에는 마치 아드리엔의 눈을 꼭 닮은 청록빛 보석이 생겼다. 안에 순도 높은 마력을 가득 담은 영롱하고 아름다운 귀물이었다. 아, 아드리엔…….

로아드네스는 소중하게 쥐고 있던 서신에 입을 맞추었다. 아드리엔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한 달 일정이던 마물 토벌이 근 2주 만에 끝나가고 있었다. 밤에는 출몰하는 마물들을 쓸어버리고 낮에는 죽은 마물의 사체를 뒤져 심장을 뽑고, 보석을 얻었다.

마물을 연구한다며 토벌전을 따라나선 롯시의 말로는 그 보석 하나의 값이 거대한 성 두어 채쯤은 될 거라 했다.

하지만 로아드네스의 귀에 그런 말은 아예 들리지 않았다. 아드리엔의 눈을 닮은 그 보석을 보자마자 그는 곧장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목에 그것을 걸어줄 상상을 하기 바빴다.

그 목걸이를 걸어주며 핏줄이 다 비칠 만큼 여린 그 목덜미를 깨물고 핥고……. 로아드네스는 이를 악물고 본래 3일 뒤이던 귀환을 앞당겨 내일 저녁에는 황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미 앞당길 만큼 앞당겨 모두가 수면 부족 상태였지만 마물을 다 죽였으니 뒤처리는 이 영지의 영주나 빈센토에게 맡기면 될 테다.

그는 최근 황태자비의 치마폭에 휩싸여 일은 뒷전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버틸 만큼 버티는 중이었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침대에서 뒹굴기 바빴지 그 흔한 초상 하나 그려놓지 못해 허공에서 아드리엔을 그리워하는 일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로아드네스는 아드리엔의 향기가 스민 서신에 오래 입맞추다가 누운 채로 그 서신을 뜯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서신의 내용은 매우 짧았다.

서운함에 잔뜩 처졌던 눈이 내용을 확인하자 금세 번뜩였다.

“빈센토!!”

“예, 전하-!”

“마물은 다 죽었으니 나머지는 네가 맡아. 나는 지금 곧장 황궁으로 간다.”

“예?”

갑작스러운 주군의 변덕에 빈센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놀라는 부관의 눈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로아드네스가 사나운 폭군처럼 천막 밖에서 누군가에게 제 말을 가져오라 소리쳤다.

그 이후로는 붙잡을 새도 없었다. 제 망토를 둘러맨 로아드네스가 간이 책상에 대충 풀어둔 비상용 꾸러미를 허리에 둘러매고 곧장 천막을 나섰기 때문이다.

황궁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제 아내에게 돌아가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을 한 주군을 어르고 달래며 여기까지 왔다.

할 일을 깔끔하게 마쳐놓고는 당장 제 아내를 보러 튀어갈 것처럼 강박적으로 몸을 씻는 로아드네스를 감시하며 이만큼이나 붙잡아 둔 것도 빈센토였다.

“전하! 전하!!”

빈센토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런, 젠장.

벌써 저 멀리 점이 되어버린 주군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빈센토는 퀭한 눈으로 도대체 황태자비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길래 저리 미친개처럼 달려 나가는지 확인하려 그가 떨어뜨리고 간 서신을 주웠다.

“……젠장, 로아드네스.”

제 사촌인 주군의 이름이 몇 년 만에 욕과 함께 빈센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로아드네스를 움직인, 서신에 적힌 말은 단 한마디였다.

『오늘따라 너무 보고 싶어, 나의 안.』

늘 그랬듯 수습은 빈센토의 몫이었다.

***

새로운 황태자비가 황궁에 들어오고 활기를 되찾은 온실이 평소보다 더 분주해졌다.

빈센토 윈스터 소후작이 보낸 로아드네스의 귀환 소식 전서구 때문이었다.

“내가 직접 할 테니 이제 다 나가보렴.”

“하지만…….”

“난 유리가 아니란다.”

황태자궁의 사용인들은 귀한 황손이 상하기라도 할까 봐 아드리엔이 걸어 다니는 것도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병자 취급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드리엔을 알고 두말하지 않고 명에 따랐다.

블리에가 기어코 꽂아놓고 간 하녀, 요나만 온실 앞을 굳건히 지키며 아드리엔이 조금이라도 힘든 기색을 보이면 튀어올 준비를 마쳤다.

아드리엔은 시종이 모두 사라진 공간에서 간만에 자유를 누렸다.

끝을 향해가는 겨울의 추위도 온실에서는 거뜬했고 동부의 꽃들을 옮겨 심은 내부는 아드리엔 덕에 근 몇 년간 최고의 싱그러움을 뽐냈다.

아드리엔은 로아드네스의 귀환 소식을 듣자마자 아침부터 직접 구운 과자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며칠 전. 회임소식을 듣고 로아드네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쓴 서신을 보냈었다.

절대로 그의 일을 방해하고자 쓴 건 아니었다. 어릴 적처럼 서신을 주고받고, 그가 자신도 보고 싶다고 답장하면 돌아올 때 줄 선물이 있다고 운을 띄울 생각이었다.

“아드리엔!”

어떻게 말을 꺼낼지, 회임했다던 황궁의의 말이 사실은 오진은 아닌지 복잡한 감정으로 아랫배를 만지고 있는데 벼락같은 남자의 음성이 평화로운 온실을 가르고 들어왔다.

“로안!”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찬 기운을 묻히고 돌아온 빳빳한 옷깃 새로 그리운 향이 코를 적셨다.

달려와 그녀를 틈 없이 끌어안은 로아드네스가 곧장 그녀의 정수리로 입맞춤을 쏟아냈다.

따뜻한 차를 끓여내어 오던 하녀들이 화들짝 놀라 온실을 벗어나는 게 보였다. 아드리엔은 가까스로 로아드네스를 떼어냈다.

“보고 싶었어, 로안.”

“그게 끝이야?”

로아드네스의 눈은 무척 바빴다.

뜨거운 두 손이 말간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근 보름간 보지 못한 눈, 코, 입을 모조리 삼킬 기세로 헤집어보던 로아드네스가 깊게 신음하며 보드랍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를 향해 잔뜩 구부러진 몸에는 여유가 없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평소처럼 몰입하면서도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고 감지도 않은 로아드네스의 눈은 사납고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아까부터 묵직하게 아드리엔의 배를 누르는 바지춤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급기야 널찍한 야외테이블의 테이블보가 성마른 큰 손에 틀어 잡히고, 그 위에 있던 식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드리엔은 얼떨결에 뒤로 밀려나 테이블에 걸치듯 앉혀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테이블 끄트머리로 미끄러진 과자 바구니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행히 과자 바구니는 넘어지지 않았고 뻗은 손은 로아드네스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

“로안!”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는데, 차나 마시면서 시간을 허비할 순 없잖아.”

낮은 목소리가 아드리엔의 귓가에 사납게 경고했다.

붉어진 아드리엔의 얼굴을 확인한 로아드네스가 다급한 손길로 분홍색 드레스 자락을 끌어 올렸다.

뜨거운 손바닥이 보드라운 허벅지를 더듬어 올라가고, 벌어진 다리 사이로 거대한 남자의 몸이 불쑥 들어왔다.

이어 로아드네스의 간절한 입술이 드러난 빗장뼈에 닿았다.

순간 아드리엔은 정신이 번쩍 들어 로아드네스의 가슴을 세게 밀어냈다.

그녀의 기분을 파악하는 데는 귀신같은 로아드네스가 기세를 죽이고 쉽게 밀려났다.

다만 몸이 거부를 받아들이는 것과 머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달랐다.

한순간에 가련하게 밀려난 로아드네스가 상처받은 짐승처럼 그녀를 응시했다.

아드리엔은 말려 올라간 드레스를 내리고, 조금 헤집어진 앞섶을 여미며 경고했다.

“앞으로, 앞으로 적어도 두 달간은 너와 닿지도 않을 거야.”

흉흉하던 눈이 기세를 잃는 건 한순간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귀가 순식간에 축 처지는 것 같았다.

코완이 아끼는 장난감을 빼앗겼을 때 삐-삐- 하고 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은 애처로운 얼굴이 그녀를 향했다.

“내가…… 뭘 잘못했어?”

로아드네스가 처량하게 물었다.

“네게 주려고 마물의 심장도 몇 개나 가져오고, 보석이며 금화 상자까지 빈 수레를 꽉꽉 채워 도착할 거야, 리엔.”

그는 하지도 않은 잘못을 만회하듯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아드리엔이 묘한 눈으로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로아드네스를 보았다.

“네가 내게 뭘 주든,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것보단 못해.”

“……너? 널 말하는 거야?”

“난 이미 날 네게 줬는데?”

아드리엔이 조금 유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 짧은 다정함에 불안함을 약간 잠재운 로아드네스가 버려졌다가 주워진 짐승처럼 슬금슬금 다가와 조심스레 아드리엔을 안았다.

묵직한 바지춤은 그대로지만 조금 진정된 상태임을 확인한 아드리엔이 말없이 그의 품에 폭 안겼다.

“뭘 줄진 몰라도, 난 너 하나면 충분해. 내게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어.”

로아드네스가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아드리엔의 이마에 잘게 입을 맞추었다.

아드리엔이 낮게 웃으며 두 손으로 아랫배를 슬며시 쓸었다.

“무정한 아버지로구나. 아가야. 나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으시다는데.”

그새 꿀처럼 흘러내리는 금발을 헤집던 입술이 한참 있다가 뚝, 멈추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