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행복해
로아드네스는 아드리엔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한참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 불에 댄 것처럼 화들짝 놀라 그녀의 양어깨를 그러쥐고 제 몸에서 떨어뜨렸다.
마담 르블레아가 조용히 찬양하던 ‘단정하고도 화려한 이목구비’ 사이사이로 혼란스러움이 떠올랐다.
“……아버지?”
제가 듣기엔 심히 낯선 단어에 심란해진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렁이는 붉은 눈이 아드리엔의 얼굴을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찬란하기 그지없는 진한 금발이 굽이치고, 그가 신경 써서 식사를 챙긴 얼굴은 처음 몸을 되찾았을 때보다 약간 살이 올랐다.
윤기가 흐르는 뺨은 생기로 가득해 붉은빛을 띠었고 말이다.
다만 표정이 평소와는 달랐다.
웃음기가 어린 연녹빛 눈동자가 맑게 일렁이고, 커다란 눈이 조금 휘어진 채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로아드네스가 고개를 저었다.
모든 사고가 정지되어 육체의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아드리엔이 여전히 제 어깨를 그러쥐고 있던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제 배에 가져왔다.
배에 손이 닿자마자 로아드네스가 움찔했다.
그는 이 상황이 전혀 이해 가지 않았다.
“우리에게 아기님이 오셨대.”
로아드네스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한 얼굴로 멍하니 아드리엔의 배만 보았다.
살짝 그을린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 아래에서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내가 엄마가 되고, 네가 아빠가 되는 거야, 로안.”
떨리는 손은 아드리엔이 이끄는 힘 외에는 아무런 힘도 납작한 배에 가하지 않았다.
아니 가할 수 없었다.
창백하게 질리던 얼굴이 이제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했다.
저렇게 가는 허리에, 납작한 배에 무언가 들어 있다니 믿기지도 않았다.
“두 달쯤 된 것 같대. 우리가 처음 신방에 들었을 때, 그날 바로 생긴 게 아닐까?”
아드리엔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응? 응? 하며 대답을 보챘다. 그러나 로아드네스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로안?”
“나는…….”
“기쁘지 않아?”
로아드네스는 아드리엔의 들뜬 목소리를 듣고도 한동안 입술만 벙긋거렸다.
잡아먹을 듯 입을 맞추던 흉흉한 기세를 몸 안 깊숙이 묻어둔 남자의 눈이 한참 일렁이다가 이내 일그러졌다. 극적인 변화였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아드리엔이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로안?”
“하.”
짧은 탄식과 함께, 그의 품에 아드리엔이 빨려 들어갔다.
쉽게 깨어지는 유리 인형을 보듬듯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기쁘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 그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드리엔은 사고하는 법을 까먹고 천치같이 구는 로아드네스를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따뜻한 품에 잠겨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되레 그녀가 더 차분해졌다.
거칠게 뛰어대는 그의 심장 소리를 배 속의 아이가 듣는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감격에 겨웠다.
그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아드리엔은 그 누구보다 그의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의 결실이 생겼다는 환희와 기쁨.
부모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인을 향한 끓어오르는 애정과 생명을 품은 이에 대한 경외심.
그 외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작은 폭죽을 단전에 매초 터트리는 것 같은 고양감까지.
모조리 지난 며칠간 그녀가 겪은 감정들과 닮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드리엔은 자신을 틈 없이 끌어안은 채 바르르 팔을 떠는 로아드네스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널찍하고 거대한 등이 말하는 감정이 그녀에게 그대로 흘러들어왔다.
“만약 여자아이라면…… 레티나가 어떨까?”
“……뭐?”
“아이 이름 말이야.”
로아드네스가 다시 굳었다.
아드리엔은 로아드네스의 품에서 빠져나와 슬그머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가가 벌게진 로아드네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충혈된 눈을 하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가슴 속에 절절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 누르는 얼굴이었다.
“꼭…….”
그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녀를 끌어안은 팔이 더 강하게 조여 들었다.
“꼭…… 나를 위해 원치 않는 이름을 짓지 않아도 돼, 아드리엔.”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린 듯 보이는 로아드네스가 뭉개진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벅차니까.”
떨리는 입술이 겨우겨우 목소리를 끊지 않고 뱉어냈다.
“네가 이름을 짓는다면 로아리엔 같은 이름이나 지을 것 같아서. 미리 생각해 본 거야.”
아드리엔이 코를 찡긋하며 답했다.
이미 머리가 하얗게 표백된 로아드네스는 그제야 자신의 작명 전적인 ‘코완’을 떠올렸는지 단정한 미간을 살짝 구겼다가 풀었다.
아드리엔이 발꿈치를 살짝 들어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부딪쳤다.
“아무래도 아이의 이름은 내가 지어야겠지?”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을 끝으로,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던 로아드네스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로아드네스는 그 눈물 한 방울을 뺨에 떨구고 나서야 비로소 웃기 시작했다.
아드리엔은 단단한 뺨에 맺히는 작은 보조개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제게 몸을 구부려 이마를 더 강하게 맞대는 로아드네스의 뺨을 한참 쓰다듬었다.
찬 기운을 머금고 젖어 들었던 뺨이 그녀의 온기에 따뜻하게 녹았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생물을 보는 듯한 붉은 시선이 제 품에 살포시 안긴 여자를 보고, 또 보았다.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은 정적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로아드네스의 눈에 담긴 빛은 아드리엔이.
아드리엔의 눈에 담긴 빛은 로아드네스가 고요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로의 눈 속에 그토록 찾아 헤맸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맞닿은 이마 아래로, 떨리는 로아드네스의 입술이 드디어 바쁘게 움직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푹 젖어서 축축해진 채 아드리엔의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드리엔. 빌어먹을, 빈센토가 죽는소리를 하든지 말든지 마물 사냥이나 하러 가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게 후회하는 목소리에 아드리엔이 답했다.
“아이가 듣잖아, 로안.”
로아드네스의 입이 군말 없이 다물렸다가 스르르 풀렸다. 부드럽게 풀린 입술 사이로 헛바람 같은 웃음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둘은 한참을 속삭이다, 아이의 이름을 짓고 취소하길 반복하며 키득댔다.
그러다 돌연 뚝, 뚝, 떨어지는 로아드네스의 눈물에 아드리엔은 자신마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뒤돌아 얼굴을 감추었다.
이렇게 기쁘고 벅찬 날에 눈물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로아드네스가 그런 아드리엔을 뒤에서 다시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용기를 내어 그녀의 배로 제 손을 뻗었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고 있던 아드리엔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아드리엔.”
“응.”
아드리엔이 조금 더 깊이 그의 품에 몸을 묻었다.
“……내가 말했었나?”
“뭘?”
“네가 내 세상이라고.”
로아드네스의 떨리는 손이 아드리엔의 손등을 강하게 붙들었다.
함께 배를 문지르는 손은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기어코 참았던 눈물을 한 방울 떨군 아드리엔이 부스스 웃으며 답했다.
“응, 항상.”
물기 어린 질문과 물기 어린 대답이었다.
아드리엔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로아드네스를 올려다보았다.
밤이든 낮이든 반짝이는 그녀의 남편이 늘 그렇듯 눈가를 붉히며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아드네스의 고개가 서서히 그녀에게로 기울어졌다. 오만하게 솟은 코가 제 코에 닿자 아드리엔이 속삭였다.
“사랑해, 로아드네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사랑 고백에, 로아드네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별이 부서지고 태양이 부서지고. 온갖 빛이 다 부서지는 미소였다.
사랑한다는 말을 보물처럼 아끼고 감춰놓다가 하나씩 꺼내놓는 아드리엔이었다.
정말이지 그녀에게서 듣기 참 힘든 말이라, 로아드네스는 그녀가 그 말 한마디를 꺼내 놓을 때마다 처음 사탕을 받은 아이처럼 행복해했다.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모습으로,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입술로.
“내가 더 사랑해.”
로아드네스가 아드리엔의 입술을 감미롭게 베어 물었다.
***
“있잖아, 아드리엔.”
맞물린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숨결이 흩어졌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난 여전히 꿈을 꾸는 것 같아. 그리고 지금 나…….”
열기를 억누른 로아드네스의 숨결이 내 입가에 스몄다.
“시간을 멈추고 싶을 만큼 행복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무서워질 만큼.”
나지막이 이어 속삭이는 말에 가슴에 순식간에 봄볕이 스며들었다.
“지금의 행복을 위해 천 번쯤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수 있을 만큼.”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도망가지 않고 곁에 있기만 한다면 본인은 행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던 과거의 로아드네스가 떠올랐다.
괜스레 눈물이 핑 돌고 코끝이 찡해졌다.
“네가 있어서, 난 행복해. 리엔.”
그가 행복하니, 나는 더 행복했다.
이런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게 커다란 태양을 품었다가 뱉어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워, 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물었다.
로아드네스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바라보다가 내게 입술을 겹쳤다.
뭉근하게 휘젓는 뜨거운 숨결이 쓸데없는 고민을 날렸다.
나는 기꺼이 몸을 돌려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가 내게 주지 못해 안달하는 거대한 사랑을 넙죽넙죽 받아 삼켰다.
따뜻한 입술이 온몸을 덥히고 입술에서 시작된 온기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긴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내 영혼이 환희에 차 춤을 췄다.
뜨겁게 안긴 채 그의 묵직한 무게를 다 감당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하늘을 훨훨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고양감을 눌러두고 겨우겨우 다듬어 꺼낸 진심에 로아드네스가 낮게 웃었다.
따뜻한 햇볕이 우리에게만 쏟아지는 것 같이 눈이 부셨다.
살짝 열어둔 창문을 통해 기나긴 겨울의 끝을 떠나보내고, 초봄의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살며시 불어왔다.
그 어떤 악취도 섞이지 않은 따뜻한 라벤더 향기. 향긋한 동백꽃 향기. 그리고 달콤한 쿠키 내음이 바람에 묻어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살랑이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히자 두 개의 미소가 소리 없이 동시에 번졌다.
계속해서 맞붙는 입술은 따끈했고, 서로를 끌어안은 품은 뜨거웠다.
우리는 지금, 분명히 행복하다.
- <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