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옆방엔 버튜버가 산다-31화 (31/307)

〈 31화 〉 30화.

* * *

인간관계의 긴장감은 첫 만남에 높고 만난 횟수가 늘어갈수록 줄어든다.

아는 사이일수록 장난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처럼, 속내를 터놓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때때로 한 번 보고 나면 잘 안 볼 사이인 사람에게

되려 평소 지인이나 친구에게 털어놓지 못할 속내를 털어놓을 때도 있다.

마치 드라마 속의 캐릭터들이 고뇌하다가 처음 가는 술집의 사장님에게 푸념을 늘어놓는 것처럼 말이다.

나와 츠유(그녀의 완고한 부탁에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의 관계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가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서로 낯을 가리는 사람이 아니고

기왕 속내를 털어놓는 김에 거리감을 좁혀 오는 그녀를 나는 쳐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와 나는 만난 지 한 시간 안에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얼마 만에 느끼는새로운만남의 기쁨이란 말인가?

강제 온라인 수업으로 사람을 만나는 게 줄어들어 삭막함을 느끼던나에게 그녀와의 만남은 행복 그 자체였다.

“츠유츠유, 이거 어때? 왜 아까 입던 체크 블라우스에 이 치마하고 어울리지 않을까?”

“언니 약간 이런 스타일 좋아해?”

그녀는 살짝 흘기는 시선으로 내가 고른 옷을 보았다.

허리부터 몸을 감싸면서도, 하체는 과감히 노출하는 하이웨스트 미니스커트다.

춤 연습을 꾸준히 한 그녀의 다리는 지나치게 근육이 발달 되어 있지 않고

아름다운 라인을 그리고 있었기에 더더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음, 츠유라면 다리 라인 예쁘니까 조금 더 과감하게 노출해 보는 게 어떨까 싶어서.”

“어… 내가 그런 패션을 입어도 될까? 나 얼굴은 그렇게…”

“원래 모델은 자신감으로 하는 거야.”

“언니 난 모델보다는 아이돌…꺅!”

커피 자국이 신경 쓰이던 그녀의 바지를 잡아당기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탈의실로 들어갔다.

진작에 내 말 좀 듣지.

이윽고 그녀는 살짝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탈의실에서 나왔다.

단련된 다리와 그걸 좀 더 길고 아름답게 보여주는 하의가 상체의 체크무늬 디자인과 비슷하게 같은 디자이너가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조화가 좋다.

내 안목이 만들어 낸 또 한 명의 패션소녀의 탄생에 나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 또한 자기 모습에 만족스러웠는지 거울을 보고 기뻐한다.

나도 그런 모습에 더더욱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 음 어울려요?”

“물론이지.”

하이웨스트 스커트가 주는 특유의착용감과 노출이 조금… 신경 쓰여 하는 것 같지만 어차피 이런 옷은 입어야 익숙해진다.

모름지기아이돌이라면 다양한패션 아이템들을 소화해야 한다는 내 주장에그녀는 결국 구매를 결정했다.

물론 내 카드로 말이다.

“앗, 이 정도는 제가.”

“언니 노릇은 하게 해 줘.”

“그, 그럼 언니 옷은 제가 사게 해 줘요.”

“우리 미래의 아이돌 씨의 안목을 한 번 볼까?

나는 그렇게 그녀를 한 번 골렸고

“그, 그럼 제가 결제를!”

“아 계산은 카드로 해주세요.”

그녀가 돈을 쓸 기회를 가로채며 두 번 골렸다.

이런 자리에서 나보다 어린 사람이 돈을 쓰려고 하다니, 어림도 없다.

“언니!”

“새 동생을 만난 나를 칭찬하기 위해 나에게 주는 포상이야.”

“풉, 뭐예요 그게!”

그래도 그녀가 밥을 사는 거까지는 말리지 않았다.

가끔 한심한 일본 남자들이 가지는 ‘어 여자들은 무조건적게 먹지 않아? 그래야 여성스러운게 아냐?’라는 의견과

그 이미지에 맞추듯 ‘여자는적게 먹어야몸을 유지할 수 있어요’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앞의 말은 몰라도, 뒤의 말은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물론 사람의 몸은 개인마다 요구하는 칼로리가 다르고

본인의 기초대사량을 넘는 식사를 하게 되면 살이 찌는게 맞다.

하지만 원체 활동량이 많고, 근육을 고르게 가지고 있는나나 츠유같은여자들은

다른 운동을 안 한 남성들에 비해서 많은 열량을 섭취해도 문제가 없다.

물론 집에 가서 단백질을 먹지 않으면 근육 유지에 문제가 오겠지만

적어도 이런 식사 자리에서는 나는 식사를 절제하지 않았다.

“언니…?”

“우리처럼 운동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안 먹으면 오히려 근육이 빠져서 살이 빠지게 돼.”

“그, 그래요?”

“언니가 나중에 식단 짜는 거 알려줄게. 일단 지금은 많이 먹자. 응 그래도 문제없어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먹자!”

우리는 적당히 저렴한 이탈리아 식당에 들어와서, 식전 수프와 샐러드

완두콩 버터구이, 파스타 두 접시와 작은 피자 한 판을 시켜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내가 물어봤다.

“츠유는 어째서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거야?”

“아름답고, 강하고, 자기의 색을 말하잖아요.”

“응?”

“제가 되고 싶은 아이돌은 일본인다운 아이돌이 아니에요.”

일본식 아이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유명 그룹의 단체 안무나 화려한 퍼포먼스이지만

내가 떠오른 것은 어색하게 예능 패널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노래를 부르고 연애를 금지하며 아름답기를 강요받는다

이것은 아이돌의 숙명이다.

하지만 내가 일본에 와서 좀 더 충격을 느낀 것은

거기에 일본이 생각하는 ‘소녀’다움을 집착적으로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다.

본인이 가진 목소리보다, 더욱 귀엽고 높은 목소리를 내서 어리게 보여야 한다.

항상 프릴이 가득한 옷을 입으며, 색다른 패션을 시도하면 패션 센스보다는

아이 돌답지 못하다

팬들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다

헤어스타일을 짧게 유지하면 ‘소녀답지 못하다’라는 이유로 비난하고

남자 지인과 연락한 것이 발각된 한 아이돌이 삭발하는 영상이 화젯거리로 오른다.

그야말로 뒤틀린 사회적 편견과 관습이 만들어 낸 끔찍한 문화

단적인 예시로

한국에서는 아이돌을 좋아하고 아이돌 팬이라고 하면 남자건 여자건, 십 대부터 삼촌 팬, 아저씨까지 충분히 빠질 수 있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아이돌들에게 빠지고 응원하게 되는 걸 평범한 취미로 취급을 한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특히 남성일 경우 한국의 사생팬들도 질겁할 기이한 소유욕과 연애 감정을 아이돌에게 보이며

마치 자신이 돈을 썼으니 이 정도는 그들이 해줘야 한다는 강렬한 보상심리를 아이돌들에게 그대로 내비친다.

여성일 경우 우상 숭배에 가깝게 그들의 아이돌들을 숭상하고

그들의 아이돌에 엮이는 수 많은 여자 연예인들, 특히 팬층이 두텁지 못한 약자들에게 잔인할 정도로 물어뜯는다.

오죽하면 온갖 다양한 욕망의 표출에 익숙한 오타쿠들 사이에서도 진득한 아이돌 팬들은 무섭다며 질색을 표할까

그래도 이런 일본 내의 아이돌 이미지는 크게 바뀌고 있다.

다시 돌아온 한류 열풍과 일본에서 소녀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한국의 걸그룹들과

일본의 폐쇄적인 아이돌 시장을 두들기고 있는 BTS 덕분에 아이돌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게 맞긴 하다.

‘미완성인 아이돌이 팬들과 함께 성장한다’의 어설픈 아이돌이 아닌

엄격한 내부 심사를 통과한 아이돌들이

노래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철저하게 단련한 몸으로 펼치는 화려한 안무가 커다란 스테이지를 지배한다.

인간의 육체가 전성기에 도달했을 때, 가장 화려하게 빛날 수 있는 아이돌들은

성별과 국적을 초월해서 사람을 매료하는 이들이니 말이다.

아무래도 츠유가 동경하는 건 그런 종류의 아이돌인 것 같다.

나의 견해와 그녀의 견해는 상당히 일치한 듯 우리들은 즐거운 분위기 속에 이야기를 한 차례 끝냈다.

식사를 다 하고 후식과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어, 그러니까 이웃이어서 채용되었다는 게 정말인가 보네요?”

“아무래도 첫 만남에서 그랬으니 말이지…?”

나의 조금 보기 드문 버튜얼 유튜버 세계의 경험담이다.

그 시작은 이웃의 방송 소음으로 인한 컴플레인 방문이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나에 언니에 관해서, 나에 대해서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다 물어보았다.

오타쿠 산업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던 내가 이 업계에 입문한 이야기

처참하기 그지없던 나에 언니의 운동 능력을 같이 운동하면서 끌어올린 이야기

무심코 매운 김치를 먹어서 눈물을 흘린 이야기

미우와 만나서 오프라인 콜라보를 진행한 일 등등을 말이다.

“부럽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죠?”

“잘난 척하는 말하긴 싫지만, 제가 이슈 메이커가 되고, 그게 커뮤니티 여론을 지배한 건 맞으니까요.”

“메이드 씨 컨셉도 그렇고요.”

“그리고 ‘앱풀’영상도 그렇죠.”

“…저도 언젠가 그렇게 뜰 수 있을까요?”

무심하게 지나가는 듯이

마치 호감이 있던 이성에게 장난스럽게 고백하고

거절당하면 ‘장난이었어’하는 듯한 가벼운 어조로, 청춘 만화의 한순간처럼 그렇게 물어온다.

나 또한 가볍게 대답할 수 있고 저 질문도, 나의 대답도 ‘그 대답, 나도 장난이었어’라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물론이지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책임감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운 좋은 시기에 입사하고 여러 행운을 거처 얻은 내가 가볍게 뻗을 수 있는 동정의 손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실패에 책임을 지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도

“츠유는 할 수 있어요. 코모레비는, 코모는 버튜얼 아이돌이 될 수 있어요.”

“입담도 부족하고, 노래도 먹혀주지 않고, 캐릭터성도 약한 제가요?”

지나치게 냉정한 자기평가에 그녀의 아픔과 고뇌가 느껴졌다.

어느새 깊게 가라앉은 그녀의 두 눈이 나를 바라봤다.ㅁ

나는 알고 있다.

아이돌이라는 것은 하나의 완벽한 보석 장신구다.

장인의 손에 하나하나 박혀서 완성되는 보석 장신구

그렇기에 장인의 눈에 들기 위해서 아이돌 지망생들은 부서져라 몸을 갈고닦는다.

그야말로 혼신의 연마

나는 오랜 노력으로 지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있다.

“그 누구도 아닌 선라이즈의 천재 인기 매니저인 제가 당신을 응원하고 있고.”

그건 누군가가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다는 사실과

“제가 이제부터 당신을 도울 거니까요.”

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약속이다.

코이즈미 언니에게 보고 메일과

나에 언니의 라인 방에 연락을 남겼다

그리고

그날 나는 일본에 온 이후 처음으로 사이타마의 쉐어 하우스에 돌아가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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