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34화.
* * *
“언니?”
“흥, 언니 없어.”
“에이 언니 그러지 말고.”
“자신의 담당 아이돌을 방치하는 나쁜 프로듀서는 배드 엔딩이야.”
집에 돌아오고 난 이후, 이틀째 언니의 삐짐이 풀리지 않는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아?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겸직하게 되더라도 나는 아직 그녀의 매니저니 말이다.
하지만 내 업무시간은 엄밀히 말하자면 정규 시간인 9시부터 6시까지인데?
이 말을 내뱉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나에 언니에게 싹싹 빌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국 드라마에서나 보던, 바람피운 남편에게 삐진 아내를 달래는 모습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말을 걸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게 보여서 너무 귀엽다.
온라인이면 모를까, 아직 오프라인에서 언니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게 조금 서툴러 보인다.
나는 벽을 보고 있는 언니에게 다가가서, 뒤에서부터 번쩍 들어 올렸다.
이제는 제법 불어난 몸무게가 느껴졌다.
그녀가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유, 유나 내려줘~!”
“그래도 제 눈을 봐주지 않는걸요? 그러면 저도 살짝 슬퍼요.”
“음, 음, 으음... 유나가 슬퍼하는 일 하지 않을게.”
너무나도 빠른 그녀의 항복 선언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실례라는 걸 알지만, 그녀를 그대로 껴안았다.
그녀의 작고 여린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차가운 에어컨 바람으로 식혀진 몸을 덥혀주었다.
“다음에는 꼭 직접 말하고 출장 갈게요.”
“...안 가면 안 돼?”
나는 그녀를 껴안고 있기에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른다.
차가운 진실을 말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그녀의 성장 방법을 말해야 할까
의존증은 좋지 않다.
사람은 결국 자존(??) 해야 한다.
그것을 지나치게 일찍 알게 되는 것은 슬픔이지만
그것을 늦게 알게 되는 건 슬픔 이상의 비극이다.
그녀의 슬픔이 나에게도 전해져서 내 가슴도 먹먹해진다.
그래도 그녀가 나에게 너무 의존하기 전에 나는 그녀의 마음을 길러야 한다.
매니저의 일인가?
솔직히 모르겠다.
그녀의 뛰어난 재능에 기대면서, 그녀의 세상을 좁게 만들고
그녀가 나에게 보이는 호감과 의존성으로 그녀와 살아가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겠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만큼, 그녀 또한 사랑하고 존중하기에.
“언니를 위해서예요.”
언젠가는 떨어져야 한다는 현실을 말하는 나는, 상냥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나는 들고 있던 그녀를 내려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젠 무게가 불어서 오래 들면 팔이 아프다.
“내가… 싫어서가 아니지?”
그녀가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이전에는 여리기만 했던 그 눈동자에 강인한 열기가 느껴진다.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를 피했던 그녀가 눈물 맺힌 눈으로 날 주시한다.
“말했잖아요.”
습관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 언니를 좋아하고 존경한다고요.”
“떠나는 건 날 위해서지?”
울음을 참으며 말하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생전 내본 적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그럼요.”
떨리는 그녀의 두 손이 내 뺨을 잡는다.
평소라면 쿡 찌르거나 내 입안에 장난스럽게 집어넣을 그 손가락.
“나도, 유나를 좋아해.”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나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짠맛 나는 그 조그만 입술에 느껴지는 짠맛과 쌉사름한 틴트 맛이 났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녀의 ‘좋아해’와 나의 ‘좋아해’가 다르다는 것을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을 마주하는 자들이 가지는 감정의 직시다.
늘 환경에 따라 움직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사람에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 어설프기 그지없는 뽀뽀 같은 입맞춤이 그녀의 커다란 결심이다.
“미안해요.”
나는 그녀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안했다.
나는 아직 그녀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
나는 그녀의 돌발 행동을 분리 불안에서 오는 일종의 자기 보호 본능이라 판단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그녀의 감정이 가라앉고, 잊어 주겠지.
“그래도 당장 떠나는 건 아니에요. 언니에게 알려줄 게 많아요.
제가 없더라도 언니가 멋지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걸 알려줄게요.”
“차를 구매하게 된다면 바닷가로 여행을 가볼래요?
아니면 산에 들어가서 차가운 물에 발을 담가볼래요?”
“아니면 돌아다니면서 마을의 유명한 빵집의 과자들을 하나씩 다 모아볼래요?”
그녀를 의존하게 만든 건 내 잘못도 있다.
아직 이쪽 일에 들어오기 전, 내 세상의 측량대로 이렇게 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그녀를 내 기준으로 다룬 나에게도 잘못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좀 더 아름답고 멋진 세상을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들어 주는 세상이 아닌, 조금 더 넓은 세상을 말이다.
그녀와 나는 타인이다.
피가 섞인 가족도 아니고, 나이도, 국적도 다른 사람
다섯 달이라는 시간은 서로를 알아가기에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교감했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이 운동을 하고, 같이 일하기도 했고, 같이 자기도 했고, 같이 떠들며 웃고 새로운 미래를 그려갔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좋은 파트너로 성장을 했다.
그렇기에 무책임하게 떠나긴 싫었다.
“정말 유나는 바보야, 바람둥이고, 맨날 새로운 여자 만나러 다니고
여기 내가 있는데도 자꾸 딴 여자들 일에 참견하고, 모르는 사람 도우려고 하고 말이야.”
“솔직히 제가 일을 벌이는 게 좀 있어서 부정은 못 하겠어요, 언니.”
“하, 하지만 그런 유나가 난... 난 좋은 걸 어떻게 해.
나에게 상냥하게 손을 내밀어준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거잖아?”
꿈을 품고 무작정 항공기가 끊기는 시대에 낯선 땅에서 힘들어하는 호주 소녀 말리아 클라크
오랫동안 활동했음에도 성공하지 못해 연이은 자기 단련에 지쳐나가는 버츄얼 아이돌 카네나리 츠유
한국인이 정의 민족이다 뭐다 하면서 애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난 원래 참견하는 걸 좋아하지만...
그런 것보다 나는 노력하는 그녀들이 보상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내 나름대로 열심히 도왔다.
“그래도, 유나의 처음은 내, 내가 가져갔으니까...!”
“미안하지만 언니 그거 첫 키스 아니에요.”
“...뭐!? 뭐라고!? 이! 이! 이, 바람둥이! 내 첫 키스 돌려줘!”
그녀가 붉은 얼굴로 나의 가슴팍을 두들긴다.
예전에는 안마도 안 되는 약한 주먹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힘이 실린다.
“누, 누구야 유나의 첫 키스를 가져간 사람은?”
“잠깐만요, 보여드릴게요.”
나는 휴대폰에서 내 첫 키스를 가져간 사람의 얼굴을 보였다.
지지 않으려는 듯 두 손을 꼭 쥐는 언니의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하지만...
“어때요?”
나는 한 달 전에 두 살이 된 내 사촌 동생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자기애는 똑똑하다고 호들갑 떠는 삼촌이 심심하면 나에게 사진을 보낸다.
나도 사촌 동생을 귀여워하기에 기쁘게 받아들였고.
“이, 이, 이,... 유나 날 놀린 거야!?”
“네.”
미안하지만 언니
언니는 제 상대가 되질 못 해요.
내 첫 키스를 어이없게 가져간 그녀에 대한 복수다.
다시 삐진 그녀를 달래느라 조금 고생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언젠가 찾아올 이별을 인지한 모양이다.
그녀와 나는 친밀한 이웃임과 동시에 타인이고, 아직은진지한 책임을 질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언니와 나는 그렇게 티격태격 장난을 치다가 지쳐서 거실에서 잠시 낮잠을 잤다.
“그게... 그렇게 됐니?”
전화기 너머로 코이즈미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네, 어떻게든 잘 설득된 모양이네요.”
“하, 하, 하, 정말 유나는 대단하구나...”
“제가 좀.”
“일본에서는 겸손이 미덕이란다, 유나야.”
“요즘은 그렇게 하면 자신감 없어 보인다고요. 글로벌 시대 몰라요?
미국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면 얕잡아 보여요.
글로벌 매니저 겸직이니까 이 정돈 봐줘요.”
“그나저나 나에 씨가 그렇게 음, 키스할 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분리 불안의 증세 같아요. 솔직히 제가 좀 너무 많이 잘 대해주긴 했죠...”
그녀의 몸은정성을 다하면 회복되지 않는 지경이었다는걸 감안해도, 나는 그녀에게 간호 이상의 정성을 들였다는 사실은 알고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자와 간호인(나는 내 입장을 이렇게 표현했다)이 친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
“그녀의 사랑과 의존성 집착은... 음, 시청자들을 향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으음, 마녀와 파라오가 힘들어하겠네. 강적이 나타났어.”
시청자들을 부드러운 카리스마, 혹은 위압적인 카리스마와
때때로 보이는 반전 매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들었다 놓았다 하는 버튜버들이다.
“아, 그래도 그. 가슴 차이가 너무 확실하므로.”
그리고 선라이즈에서 알아주는 거유들이었다.
“당장 픽시브 태그 ‘로리‘를 검색하고 오도록.”
“윽.”
서브컬쳐 지식으로는 차이로 얻어맞았다.
나의 기세를 꺾은 언니가 물어왔다.
“그래서 이제 누구의 매니저가 될 거야? 코모는 음악 레이블을 겸해야 해서 미안하지만 안 되고, 이참에 글로벌 쪽의...”
“네? 전 나에 언니하고 당분간은 쭉 있을 건데요.”
청소부터 요리까지
아직 그녀에게 알려줄 요소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그녀와 같이 사는 건 서로 성향이 비슷한 룸메이트 비스무리한 거기 때문에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 아니 그 신파극은 뭐야 그럼?”
“내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겨두어야 제가 어느 날 귀국을 하건
다른 사람을 매니징하건, 2박 3일 출장을 가건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우와 너 방금 되게 바람둥이 같았어. 보험 깔아두는 남자라니 최악이야.”
나도 안다.
아니 그래도 나 여자인데?
억울해
“저 같은 인싸가 바람둥이 되는 건 필연이에요 언니.”
“우와 재수 없어 진짜.”
비록 나에 언니가 상처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메리트가 있다.
“그래도 ‘메이드 라’가 이제 오프라인 합동 방송도 가고,
언니처럼 MC역으로 다양한 방송에 나와도 나에 언니가 스트레스받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으니
이제 저도 좀 활발하게 움직이겠네요.”
“결국 예상대로 네가 외부 활동을 많이 하더라도
의존적인 나에 씨가 상처받지 않게 미리 아픈 말 한 거구나.”
역시 회사 쪽도 나와 나에 언니의 지나치게 긴밀한 관계를 걱정한 것일까?
그녀의 말을 듣자 하니 나에 언니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존증을 파악한 거 같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 회사 허술한 데가 많아도, 중요한 건 잘 챙기는 회사인 거 같다.
“한국에는 매도 먼저 맞는 매가 낫다는 말이 있어요.”
“그래 참 잘나셨어.”
나에 언니의 의존증을 줄이고 독립성을 기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좀 더 활발하게 회사 내에서 활동해서 실적을 쌓는다.
솔직히 말해서 퇴학을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로 학업이 멈추었기 때문에 난 올해는 이쪽 분야에 내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거대한 치즈로 향하는 쥐였다.
치명적인 덫 위에 올려진 치즈로 향하는 쥐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