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옆방엔 버튜버가 산다-48화 (48/307)

〈 48화 〉 47화.

* * *

회사의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선라이즈 글로벌 1기생 공식 데뷔 방송까지 8일

나에 언니의 매니저이자 글로벌 부서의 보조 매니저를 겸하면서도

대학생의 신분을 유지하는 나는 당연히 바쁘다.

아무리 비대면 수업이라고 해도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졸업 논문 테마를 잡으면서

지도 교수와 그 교수의 연구실을 골라야 하는 독특한 학업 시스템 때문에

작년 선배들의 수업 평가 사이트나 학생 커뮤니티에서 정보를 알아보아야 한다는 건

학업과 그에 따른 과제에 대한 부담감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유나 후배님

­혹시 괜찮다면 신주쿠 카부키쵸에서 한 잔…?

­선배인 제가 쏠게요. 부담없이 와요. ㅎ

­저희 쪽 랩에 오면 잘 대해드릴게요. ㅎ

“아 씨발.”

드물게 하는 한국 욕이 절로 나온다.

하여간 자기가 잘생긴 줄 알고 나대는 씨발같은 선배들이 꼭 있다.

게다가 신주쿠 카부키쵸에서 한 잔이라니

도대체 그저께 화상 수업으로 처음 본 사람에게 이런 술 데이트 신청이라니

코로나로 미쳐버린 건 세상이 아니라 저 선배의 대가리가 아닐까?

­죄송합니다만 아직 OO 교수님의 연구실에 들어가는 건 정하지 않았어요.

­연구실 신청 마감 기간은 어차피 12월달까지고, 아직까지는 제가 어떤 테마로 연구를 할지 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직은 여기저기 알아보려고 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하면 알아듣겠지?

­아 ㅎ 그렇다면 괜찮아요.

­선배가 발이 넓어서 다른 친구들에게도 소개해 줄 수 있으니까요.

­선배만 믿어봐요.

­그래서 목요일에 어때요?

­저 한국 소주 잘 마셔요 ㅎㅎ

“개새끼가 진짜 돌았나?”

안 그래도 학업과 일과 회사 프로젝트, 미래 설계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에둘러 말해도 못 알아 처먹는 놈이 다 있지

동아리 선배라고 이딴 놈을 소개시키다니 친구들이 나에게 엿을 먹이는 건가?

이렇게 눈치 없는 인간을 왜 나에게 소개해주냐고 시발.

“씨, 씨바루? 유나 괜찮아?”

험악해진 내 표정을 보고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나에 언니가 다가왔다.

나는 언니 앞에서 한국어로 거친 표현을 한 적이 더더욱 없기에 그녀는 걱정을 하는것 같다.

이런 천사 같은 언니 앞에서 언행을 함부로 하다니

내 불찰이다.

“아, 자꾸 관심 없는데 귀찮게 치근덕거리는 선배가 있어서요. 아, 학교 쪽 사람.”

“남자야?”

“네.”

나에 언니의 얼굴이 언젠가 가 본 적이 있는 아사쿠사 신사의 나찰 불상처럼 일그러진다.

와 무섭다.

언니도 화내는 얼굴 하면 무섭구나.

“어휴,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짜증 나요.”

“유나는 내 건데 왜 자꾸 사람들이 찝적거릴까…?”

“뭐, 인기 많은 여자의 비애라고 봐야겠죠?”

“쳇.”

내가 나에 언니 쪽에 소속한 매니저이긴 한데…

요즘 들어서 나에 언니의 ‘유나는 내 거’의 느낌이 조금 달라진 기분이다.

그나저나 학교 캠퍼스는 닫았으니 이제 교수님들의 자기 PR 영상 같은 걸로 보고 진로를 골라야 하나?

한 번 정하면 옮기는게 까다롭고, 졸업 연구 논문은 졸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처음에 잘 고르고 싶다.

학업과 수업 쪽을 편하게 연계할만한 연구실이 있으려나?

있다면 거기 속한 사람들과 또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

동아리쪽 사람의 소개로 만난 사람들은 다 꽝이니

친한 친구들 사이에 살짝 끼어서 나도 친구를 따라서 연구 테마를 정해야하나?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나의 입장을 이해해주실 교수님이 계실까?

외국인이 벌써부터 설치고 다닌다고 뭐라 하시지 않을까?

온갖 걱정을 하면서 나는 내 인맥을 보기 위해 연락처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연락처에 저장된 인명이 300명을 넘어간 시점부터 누구와 어떻게 말해야할지 너무 골치가 아프다.

이전이라면 친해지고 싶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오프라인에서 적극적으로 만나면서

그런 사람들을 알아보면서 즐겁게 놀러 다니는 기분으로 알아보러 다녔을텐데

사교활동이 오프라인 중심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가게 되니

그 사람의 채팅이나 사진 프로필 만으로 인상을 결정해야하다보니

인간 관계 만들기에 자꾸만 안 좋은 인연들이 늘어간다.

요즘은 그냥 짜증이 나는 관계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잦다.

특히, 나에게 치근덕거리는 남자들의 쓸데없는 연락들이 너무 늘었다.

그중 최악은 한국인 선배다.

성적도 구리고, 소문도 나쁜 주제에

내가 롤 좀 한다고 해서 다딱이 주제에 ‘캐리해줄게’ 이지랄 하고는

그랜드 마스터와 챌린저를 오가는 내 계정 보고 ‘혜지’니 뭐니 하다가

탑이 주라인인 걸 보고 입 꾹 닫은 원딜 유저가

그래도 내가 실제로 더 잘해~ 하면서 정신 승리하듯 입을 열면서

나의 게이머의 프라이드를 건드리는

허접 주제에 자꾸 아는 척 입을 여는 쓰레기 선배가 있다.

라인 계정을 차단 박아도 카톡으로 친구 추가를 하길래 그것도 차단했다.

역시 인간관계 관리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바뀌니까

이전에는 눈도 못 마주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만 친한 척 말을 건다.

“유나야 옳지 옳지, 표정 풀어.”

소파에 앉아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에게 나에 언니가 다가와서 나를 달래주며 껴안아 준다.

매니저를 위로해주는 버튜버라니

역시 나에 언니는 착하다.

“미안해요, 나에 언니…”

안 그래도 요즘은 예전처럼 나에 언니의 모든 것을 챙겨주지 못하고 있다.

생활 쪽은 겹치는 게 많긴 한데,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나에 언니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나 유행을 빠르게 못 따라가고 있다.

그래도 혼자서 워낙 잘하던 언니라서 별걱정은 안 되는데…

“언니 요즘 방송은 어때요?”

물론 유리아의 방송은 인기가 좋다.

평균 8천에서 2만 사이의 실시간 시청자를 유지하고 때로는 3만까지 가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으며

이전의 이미지는

­마냥 착하고 세상 물정 잘 모르고, 순진하고 얌전하지만

­게임을 못 하고, 화가 나면 미쳐 날뛰는 (팬들은 이것을 마기에 잠식당했다­라고 표현한다) 모습을 보이는

­일정 지점까지 놀리면 스위치가 켜지지만, 기본적으로 청초하고 착한 공주님

이렇게 정리가 가능했지만

­서툰 영어로 소통을 하려 하는 나름 영어 학습자에다가

­귀신들린 ‘집착 유리아’ 모드에 들어가면 굉장히 무서운 목소리를 내는

­실력 있는 메이드에게 매일 봉사 받으며 지내는 우아한 공주님

같은 캐릭터성이 추가된 이후 저번의 합동 요리방송 이후 4기생 중 가장 인기가 좋은 클레에 이어서 두 번째로 60만 구독자를 돌파했다.

특히 유리아의 집착하는 연기가 일품이라 여기에 맛 들인 사람들이 새로운 팬층이 되었다.

그에 보답하듯 가끔씩 튀어나오는 유리아의 집착 연기의 방송은

많은 소재로 활용이 되어서 커뮤니티에 널리 알려지고, 유리아의 검색 지분율을 높이게 한 일등 공신이다.

최근 들어서 시청자들의 장난에 다양한 반응을 보이면서 더더욱 인기가 빠르게 오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아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유나 덕분에 아주 잘 나가고 있어. 그러니까 언니 걱정은 안 해줘도 괜찮아!”

해맑고 자신감 넘치는 그 미소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언니의 그 말에 나는 살짝 두근거렸다.

“그러니까 조금 분하지만! 유나가 다른 일에 열중하는 거 허락해줄게. 나는 관대한 언니니까.”

최근에 관대한 공주님이니까~ 의 유행어를 말하는 언니였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내가 작업하던 태블릿 PC를 건네주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일에 치여 사는 이 불민한 매니저를 허락해주다니…

역시 언니는 천사야.

“으, 일단 글로벌 쪽 데뷔 끝나고 저랑 같이 둘이서 회식이라도 가요. 맛있는 레스토랑 알아 봐둘게요.”

“둘이서? 정말이야?”

“네, 둘이서요.”

왜냐면 셋 이상 가면 메뉴도 더 시켜야 하고

돈도 더 깨지거든…

나는 유튜브에서 최근에 언니에 뒤따라서 미친듯한 성장세를 보이는 코모레비의 음악 동영상들을 잠시 보다가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학교 쪽은… 일단은 당분간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이쪽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번 프로젝트에 걸린 금액과 인력을 듣고 나니 사라진 줄만 알았던 스트레스성 위염이 다시 도질 정도로 기가 질려버렸다.

[선라이즈 프로젝트 ­ 전승(Lore)]

­현재 기획된 캐릭터들의 데뷔 자료와 서양 커뮤니티의 주요 밈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예상되는 반응과 그에 따른 대처

그림 ASMR 토크쇼 노래 등등

그녀들은 데뷔에서 자신의 소개와 더불어 방송의 방향성 및 첫 이미지를 선명하게 전달해줄 비장의 기술들을 준비했다.

거기에 따른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을 예측하고

그녀들의 확고한 캐릭터성에 어울리는 대응 방향을 써본 글이다.

내가 이런 서브컬쳐에 관한 심도있는 글을 잘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오히려 이쪽 세계에 잘 모르는 유나의 글이야말로 무언가 도움이 될만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 운영진은 나에게 이런 글을 제출하게 했다.

‘영어 사용자의 숫자가 일본어 사용자의 숫자의 차이에서 보면…’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이전의 Nerd 문화에서 나름대로 양지에 올라오긴 했어도…’

‘높은 구독자 수를 유지하고 있는 다른 멤버들과 비교하면…’

나는 솔직하게 이 바닥에 들어오고 나서 느낀 점들을 기술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잘 모르는 내가 어디서 버튜버들의 방송에서 유대감을 느끼고

그녀들의 팬이 되었는지

특히 3D 아바타가 움직이고 특유의 ‘커다란 눈’에 부담을 느끼던 내가

어떻게 그 거부감을 줄였는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보고서를 쓴 나는 회사 이메일로 메일을 보낸 다음 휴대폰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오후 아홉 시

드물게 알람도 설정하지 않고, 일에 대한 책임감에 짓눌려서 여기에 몰입했다.

내가 운동과 저녁 식사를 통짜로 날린 건 아주 드문 일인데…

아니 그것보다도, 아홉 시면 오늘 나에 언니 방송이 시작될 시간인데…

잠깐, 언니 저녁은 어떻게 됐지?

인터폰은 안 울렸는데 배달 음식도 아니고,

어라?

책상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왜 자꾸 시야가 낮아지지?

개강 후 쌓여가는 과제

졸업 루트를 밟기 위해서 신경 써야 하는 대학 공부 외의 공부

사흘 동안 이어진 지구 반대편 글로벌 스태프와 일본 스태프 간의 회의

다가오는 프로젝트 출시 날짜와 점점 더 요구되는 보고서의 양

여름 축제 이후 이어진 다양한 콜라보 활동 참여

상반기 유리아 심층 보고서 작성

나의 최근 활동들은 불규칙한 생활 습관을 야기했고

그에 따라서 수면시간과 휴식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작년에 겪은 적 있는 일본의 기습적인 환절기에 찾아오는 일교차

온도가 떨어지면 온돌을 켜서 난방을 땠던 한국과 달리,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내진 설계된 나무 집의 단열을 뚫고 스며든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긴 옷을 입어야 했지만, 워낙 건강에 자신 만만했던 나라서 가볍게 옷을 걸치고 있던 나는

심각하게 감기에 노출된 사람이다.

나는 방금 나의 마지막(이라고 믿고 싶은) 보고서 활동을 제출한 이후

긴장끈이 확 풀리는 걸 느끼고 몸 또한 긴장이 풀어졌다.

나는 자그마치 이 년 만에 감기 몸살이 찾아온 것을 깨달았고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한 이후다.

어라

언니 밥

차려줘야 하는데…

아니 하다못해 간식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모서리를 피해서 쓰러지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