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59화.
* * *
일반인이 호화스럽게 하루 묵는다면 사 만 엔은 넘게 들어간다는 호화스러운 시설답게
비즈니스맨들을 위한 북 카페는 편안한 의자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상이 놓여져 있었다.
나와 함께 들어온 미우는 나의 맞은편에 앉고는 가방에서 책과 노트, 필기도구를 꺼냈다.
국어 영어 정치경제
일본이니깐 일본어 영어 정치경제겠지
“나는 한국인인데 괜찮아?”
“네. 그래도 언니는 명문대생이잖아요! 그리고 매니저 중에서 가장 대학 시절에 밀접한 분이기도 하시고요.”
하기사
휴학생이 가장 입시를 최근에 치루기는 했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본어 문제집을 들여보았다.
전국시대 문학
나에게 있어서는 쥐약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미우가 씨익 웃었다.
“언니가 봤던 시험하고 조금 다르죠?”
“응, 유학생이 치는 시험하고는 좀 다르니까 말이야. 차라리 수학 문제를 가져왔으면 좋았을 텐데…”
수학학원에서 두 달 동안 매일 100문제씩을 풀면서 푸는 공식을 머릿속에 때려 박은 적 있는 나에게는 차라리 수학이 더 쉬운 언어다.
에도시대 문학이 어쩌고, 숭불 문화가 어쩌고 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
“그래도 대충은 알겠네.’
“네?”
“이거 봐봐.”
내가 짚은 문제는 전형적인 ‘필자의 의도를 묻는 문제’였다.
그 문학 글은 일본의 사무라이의 상징인 가타나에 대한 아름다움을 다양한 묘사로 표현했다.
좋은 철을 뽑기 위해 철광석을 고르는 과정,
검이 단조가 명장의 손에서 달궈지고, 식혀지고, 부숴지는 과정 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면서
불교를 숭상하는 숭불 문화와 신분의 상징인 가타나에 대해서 찬미하는 글이었다.
나는 그 기다란 글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전문을 부정하는 부정 접속사다.
“이게 왜요?”
아아 모르는 건가
불쌍한 미우는 문학을 있는 그대로 문학적으로 이해하는 모양이다.
이래서는 좋은 학생이 아니지
한국식 수능을 공부하면서 다져진 문제 득점만을 위한 요령을 쬐금 맛보여주마
“미우야, 유학생들은 유학 시험과 대학에서 치루는 입학시험을 하는 걸 알지?”
“네, 고등학생의 센터시험이 유학 시험이고 대학 입시 시험은 똑같다고 들었어요.”
“뭐, 학과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 아무튼 중요한 건 요령이다. 이거야. 여기서 문제, 여기 에도시대 문학의 작가가 돌아와서 우리가 보는 이 문제를 풀면 점수를 다 맞출 수 있을까?”
“어… 원작자니까 그러지 않을까요?”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미국의 유명한 스타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 영화의 제목을 들은 손녀가 그대로 레포트에 제출을 했으나, 강의 평가에는 C를 받았다.
그 외에도
자신의 아버지의 시가 시험 문제에 그대로 실리자 아버지의 가르침 대로 문제를 풀었다가 다섯 문제 중 네 문제를 틀린 이야기
자신이 쓴 시를 대학 수능 시험에서 문제 풀기를 도전했다가 다섯 문제 중 두 문제를 맞춘 이야기
내 이야기를 듣던 미우의 눈에는 흥미로움이 깃들었다.
“여기서 얻어야 하는 교훈은?”
“어… 원작자라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지, 이런 국어 시험에는 기계적인 답변을 유도하는 게 답이지 작품의 이해도는 상관 없다는 거야. 감정이 없는 로봇이 감수성 풍부한 문예가보다 문학 문제를 더 잘 푼다는 것이지.”
“에?”
“감수성은 주관적이지만 논리 구조는 직관적인 거거든.”
시험지는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다른 해석의 여지가 끼어들지 않도록 반드시 객관화된 답을 유도하도록 공식이 짜여져 있다.
그것은 문학 또한 마찬가지다.
“지문부터 읽지 마, 문제부터 봐.”
한국의 수능 문제, 일본의 센터 시험, 미국의 토플 문제, 직장인의 토익 문제의 참고서에 등장하는 말이다.
“그리고 논리적 접속사를 잘 봐, 결국 하고 싶은 말에는 끝에 있으니까.”
나는 이탈리아 음식을 좋아한다
하지만 글루텐 함량이 높은 스파게티는 싫어한다
그래도 피자 만큼은 좋아한다.
그러나 파인애플이 올라간 피자 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이런 흐름대로라면 화자는 파인애플 피자를 혐오하는 사람이다.
이탈리아 음식을 좋아한다는 지문을 읽고 화자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파인애플 피자를 골랐다가는 큰일이 나는 셈이다.
스파게티 또한 오답이다.
나는 부정 접속사에는 역삼각형을, 강조 접속사에는 삼각형을 그려주었다.
“논리적인 접속사를 잘 봐, 결국 그 전후로 문맥이 바뀌니까.”
“영어도 마찬가지야, 어휘력은 어쩔 수 없지만 부정 의문문과 부정 접속사를 잘 보고 의도를 파악해.”
“정치 경제는 외우는 수밖에 없어! 전체의 흐름을 외운 다음에 디테일을 더해! 농지법의 개편과 시대의 흐름을 함께 보면서 변화의 이유를 찾아!”
그 후에는 이런 식으로 내 수능 공부와 일본 유학 시험, 일본 입시 시험을 겪으며 들어간 어드바이스를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요컨대, 학문을 학문 그대로 보지 말고 건조하고 출제자와 1:1 진검승부를 한다고 말해야 한다는 내 비유를 알아들은 미우는 전보다 과감하고 확실하게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런 야메 강의가 얼마나 통할 지 모르지만
고등학생 2학년 까지는 수능 공부를 하면서 상위권에 들었으며
일본에서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아는 명문 대학교에 들어갔으며
학교 내에서도 1학년 1학기 이후로는 수석을 놓치지 못한 내 공부법이 영 그릇된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야심한 열 한 시 반
영어에 대한 꿀팁을 전수하던 나에게 정중하게 퇴실을 요구하는 여관 아주머니의 말을 끝으로 온천에서의 속성 강의는 끝이 났다.
미우는 지치지도 않는지 복도에서 나를 껴안았다.
“언니 정말 최고예요! 학교 선생님들보다 더 좋아!”
얼마나 세게 껴안았는지 서로의 유카타가 흐트러져 속옷과 맨살이 접촉했다.
나는 당황해서 그녀를 밀치려고 했으나 그럴수록 더더욱 세게 나를 끌어안았다.
“미, 미우야 그래도 이건 좀!”
“하아, 언니 정말 최고예요. 어떻게 이렇게 쏙쏙 잘 알려주실 수 있어요?”
“내 설명이 잘 들어오는 이유는 전혀 생소한 지식을 너에게 알려 준 학교 선생님들이 계셨기 때문이야. 같은 내용을 두 번째 듣는 건데 당연히 내 설명이 더 이해하기 쉽겠지.”
“하, 겸손하기까지…! 정말 언니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미우가 결국 내 뺨에 짙은 입술 자국을 남겼다.
정말이지, 다른 사람들이 잘 수도 있는 복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란은 좋지 못했다.
그래도 미우같이 예쁘고 활발한 애가 뽀뽀를 하는 느낌은 결코 나쁘지…
“둘 다, 시끄러워.”
나는 문득 어릴 적 부모님 몰래 야밤에 컴퓨터 게임을 한 일을 떠올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그 으슥한 목소리에 나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껴서 뒤를 돌아보았다.
온천에서 제공하는 유카타 차림의 나에 언니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두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확실한 건, 나와 미우는 섬뜩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미우는 방으로 돌아가.”
“어… 네 언니.”
그 심상치 않는 기운을 느꼈는지
미우는 얌전히 가방을 챙기고 방으로 떠났다.
“유나는… 잠시 나랑 좀 걷자.”
“… 네 언니.”
나는 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언니와 나는 말 없이 고요한 정원을 걸었다.
“정원이 참 예쁘네.”
얼마나 걸었을까
추정하건대 대략 이십 분을 정원의 물 떨어지는 소리와
오늘따라 유난히 커 보이는 언니는 은은한 조명이 깃든 정원에 쪼그려 앉아 꽃을 가리켰다.
다양한 색들의 꽃이 아름답게 피워낸 정원에는 푸른 빛이 감도는 보라색 꽃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물망초의 꽃말을 아니?”
“제, 제가 꽃에 관해서는 무지한 편이라…”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당신의 신의와 우애를 이 꽃에 담으니, 물망초가 필 때는 저를 떠올려주세요.”
마치 노래를 부르듯
아름다운 운율을 타면서 말하는 나에 언니의 눈에는
전에는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나와 언니는 매니저와 회사 소속의 버츄얼 유튜버
같은 집을 쉐어하는 룸 메이트이자 이웃 관계
명백한 타인인 나는 그녀의 감정에 대해서 책임을 질 이유는 하등 없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은 그녀의 지속적인 방송 송출과 그 퀄러티 유지에 있기 때문에
나는, 언니는, 유나와 나에 언니는, 우리는…
“유나야, 나를 봐.”
물망초의 꽃을 꺾은 언니가 일어나더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천천히 빙그레 돌았다.
“네가 빚은 나, 쿠로가와 나에를 봐.”
언니의 말에 실린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이기지 못한 나는 언니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나는 너의 작품이야. 네가 시켜주는 운동을 따라 하며 네가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네가 빗겨주는 손질을 받으며, 네가 재워주고 깨워주는 관리를 받으면서 나는 비로소 이런 모습이 되었지.”
“…”
“너는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어. 올바르게 생활하는 법, 건강하게 살아가는 법,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법, 공부하는 법, 아름다운 옷을 고르는 법, 자신에게 어울리는 화장품을 찾는 법, 사람 관계에서 올바른 예의를 유지하는 법, 게임에서 냉철한 마음가짐을 가지는 법, 일본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법.”
그 말 그대로
나는 언니의 많은 부분에 관여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이가, 어찌도 그렇게 칠칠찮은 지
자신의 매력을 썩혀가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김유나식대로 나는 그녀에게 많은 방법을 알려주었다.
“유나는 참 대견해. 응,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야. 나와는 달리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나에게는 없는 성숙한 매력이 있고, 언제나 유나가 고르는 선택지는 내가 고른 선택지보다 많은 사람의 공감과 감탄을 끌어냈지. 유나는 정말이지, 나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야.”
“언니…”
“하지만.”
조용히
밤의 요정처럼
일본의 정원을 지킨다는 신비한 정령처럼 다가온 그녀는 나의 가슴팍에 물망초를 꽂았다.
“너는 나에게 … 를 가르쳐 주지 않는구나.”
너무나도 작은 목소리이기에
나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붉어진 언니의 얼굴과 마주 잡은 그 손에 느껴지는 열기가
그녀가 어떤 말을 하였는지 짐작하게 하였다.
“내가, 나라는 작고 하찮은 존재가 유나를 독점 하는 건 그릇된 걸까? 유나가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걸 보면… 너무나, 너무나도 화가 나고 속상해…”
“언니, 그건…”
“그래, 잘못된 거겠지. 너, 너와 나는… 타자니까… 남남이니까…”
“아, 아니에요. 언니. 언니는 저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래
언니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다.
나에게 취업의 길을 알려준 거? 언니를 통해서 선라이즈라는 유망한 차세대 산업의 스타트 업에 입사하게 된 거?
그런 게 아니다.
언니가 나를 의지하듯, 나 또한 언니를 통해서 코로나의 고독을 이겨냈으며
언니를 통해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으며
언니를 통해서 나의 좁은 세계를 넓힐 수 있었으며
언니를 통해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언니를 통해서 병을 이겨낼 수 있었고
언니를 통해서 과거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고
언니를 통해서 첫 키스를…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나의 삶의 지분에 쿠로가와 나에라는 사람이 차지하는 지분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알고 있어, 나는 유나에게 있어서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언…”
언니는 까치발로 서서 나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유나는 아직 나보다 어리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커가는 사람이니까 굳이 지금 대답을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
“그냥, 나를 잊지 말아줘. 일단은 그거면 충분해.”
“일단은.”
“그래, 일단은 말이야.”
너는 나에게 도망칠 수 없다는 듯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부드럽고 성숙한 미소를 지은 언니가 그렇게 말했다.
“밤이 차구나 유나야, 이만 들어가자.”
“네, 언니.”
“좋은 밤 돼 유나야.”
“언니도요.”
자신의 할 말을 모두 마친 듯
언니는 느릿한 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나는 가슴에 저릿한 기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편의점으로 가서 독한 술을 샀다.
아무래도 오늘은, 술 없이 잘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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