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94화.
* * *
“그래서 오늘도 게임을 배우러 온다고요?”
다음날 아침
도쿄의 한국식 국밥집에서 싸온 돼지 국밥에 다데기와 김치 국물, 부추와 마늘을 넣고 한 그릇 든든하게 마는 모습이 일본 여고생 보다는 부산의 여고생에 가까운 미우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도시락을 준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게임을 배우러 오겠다는 동기생 미카엘, 현실에선 호시무라 마이유라는 이름의 중학교 소녀에 알게 모르게 신경을 쓰는 미우는 마이유의 행보에 관심을 보인다.
그도 그럴게 선라이즈 최고의 막내이기도 하면서, 자신을 언니 취급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 성녀와 천사 컨셉으로 서로를 아껴주는 두 사람의 달콤한 캐릭터 관계는 초기 방송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일명 선라이즈의 신성 듀오라고 본인들이 말하고, 팬들이 선라이즈의 망할 꼬맹이들(쿠소가키S) 듀오로 다른 방송에서 말썽을 치고 다니는걸로 악명높은 두 사람은 친자매 이상으로 친하다고 한다.
“으으 부럽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중학생 청춘이 너무나도 부러워요!”
“이녀석아, 언니 앞에서 그런 나이 이야기 꼭 해야겠니?”
“아아 청춘이여 지나간 청춘이여.”
역시 고등학생 3학년의 정신머리는 어딜 가나 해괴하다.
청춘 어쩌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미우를 무시하고 나는 휴대폰을 힐끔 쳐다봤다.
<나 :="" 언니="" 오늘="" 방송은…=""/>
<나에 언니="" :="" 괜찮아,="" 저번에="" 말했던="" 대로="" 다른="" 개스트와="" 함께="" 영어="" 공부="" 방송만="" 잠시="" 할거니까=""/>
<나 :="" 그렇다면="" 오늘="" 회사에서…=""/>
<나에 언니="" :="" 아니야="" 유나가="" 안="" 와도=""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어.="" 요즘="" 니아="" 매니저님이="" 잘="" 챙겨주셔서="" 유나는="" 당분간="" 방송="" 적응에만…=""/>
그 날 이후
정확하게는 선라이즈의 4기생 중, 수능 공부로 휴식을 가지게 된 클레, 나이가 어려서 밤에 스튜디오 촬영이 법적으로 힘든 미카엘을 제외한 유리아, 카린, 에이아 세 사람이 2주년 라이브 참여 발표가 된 이후 나에 언니는 나와 만나는 걸 피하고 있었다.
“에휴, 2주년 기념 버츄얼 라이브라…”
유튜브에 있는 그녀들의 영상을 본 사람들 중 믿는 사람들은 적지만, 선라이즈는 일단 버츄얼 아이돌 프로듀싱을 목표로 하는 기업이다.
그래서 아이돌이라면 응당 가져야할 개인 곡과 그 곡과 함께하는 스테이지, 공연 전용 복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개발에 돈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작년에 춤과 노래가 준비된 인원 30명 중 12명이 참여해서 1주년 방송을 성황리에 마쳤고, 올해에는 40명 중 무려 18명이 참여를 해서 주년 스테이지를 빛낸다.
“왜 언니가 한숨 쉬고 그래요? 전 정말 괜찮다니까요? 내년에 화려하게 날뛰어주죠 뭐.”
“어? 응? 아니 그게 아니라…”
“아하, 나에 언니가 유나 언니를 피해서 그런거지요?”
“응…”
그래도 나에 언니와 나는 버튜버와 매니저 사이인데… 업무적인 접촉마저 줄여가면서 나를 피하려는 나에 언니 모습을 보니 참 가슴아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은 되지 않았다.
뭐가 문제였지?
역시 동생놈이 문제였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닥친다.
그도 그럴게 천하의 나에 언니가 나를 밀어낸다니?
나에 언니가 나를 피하는 일이 생길거라고는 상상도 못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매일 아침 30 통의 문자를 주던 언니가 단 한 통의 문자 메세지를 보내지 않는 날, 놀란 나는 마미 선배에게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뭐어, 나에 언니가 왜 이유를 숨기는 지 알거 같긴한데요.”
그리고 그녀들끼리만의 커뮤니케이션이 있는지, 자세한 일을 알고 있는 미우가 얄미운 표정으로 내 볼을 쿡쿡 찔렀다.
“맨날 사람 애태우게 하던 언니의 이런 모습도 귀엽긴 하네요.”
“너 요새 까분다?”
“뭐 어때요? 저는 나에 언니를 알고나서 그 언니가 이렇게 무언가에 열심히 하는 걸 처음 보는걸요? 아마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안 좋은 일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애초에 나에 언니는 유나 언니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인걸요?”
“…”
“아무튼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안 좋은 경우는 아니니까 걱정하지는 마세요. 그나저나 언니가 그렇게 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까…”
“보니까?”
“흐흥, 미인은 풀 죽은 모습도 미인이구나 싶네요.”
그 말에 어이가 나간 나는 기가차서 입을 멍하니 벌리고 미우를 바라봤다.
미우는 자기가 한 말에 부끄러운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식후 디저트로 깐 귤을 내 입에 쏙 넣었다.
시큼달콤한 과즙이 입 안에 터지면서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를 바래다 줄 준비를 마치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잠시 마미 선배의 ‘바빠 죽겠다’로 점철된 불평 가득 담긴 문자를 읽고 있을 무렵, 미우가 옆에 앉았다.
“아무튼 주년 라이브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끼리 열심히 해보자구요. 언니는 방송을, 저는 공부를 말이죠.”
“…”
“아, 언니 좀! 나에 언니가 언니를 싫어할 리 없잖아요? 유나 언니가 뭐 나에 언니에게 무례한 짓이라도 했나요?”
멍하니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미우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들기면서 말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그렇게 풀 죽을 일이에요? 사람이 좀 미움좀 받을 수 있지!”
“나도 이런 게 처음이라서 그래.”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일, 특히 여성에게서 미움을 받는 일에는 익숙한 나다.
하지만 나에 언니에게서 미움을 받는건 100명이 나를 미워하는 것 보다도 더한 부담이 되었다.
계획이 세워지지 않고 미래를 그릴 수 없게 된 기분이다.
마치 고장난 달력 프로그램처럼 다음 날을 불러올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언니의 그런 멍 때린 표정이라니 진짜… 세상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요. 그렇게 야무지고 똑부러진 언니가 지금은 고장난거 같잖아요.”
“으으 고장이라, 그게 맞는 말인 거 같아. 이틀 째인데 벌써 가슴이 아려온다.”
“우와아아… 언니 이거 저 놀리는거죠? 유혹하는 것처럼 유혹을 하지 않는 듯한 그 인싸무빙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요?”
“넌 또 무슨 이상한 헛소리를 하니?”
“얼른 출발하기나 해요, 오늘 1교시 선생님은 지각하면 까다롭단말이에요.”
그 후 요물이니 인과응보니 업보청산이니 뭐니 하면서 투덜거린 미우는 학원 앞에 도착한 다음 조수석애 내려서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
“풀 죽은 언니도 귀엽긴 한데, 아무래도 기운없는 언니 모습 보니 저도 힘이 쭉 빠져버린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말한 미우는 상큼한 귤 향이 나는 그 입술로 내 뺨에 진하게 뽀뽀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나는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어, 그러니까 미우가 방금 나에게 뽀뽀…한거지?
입술이 맞닿은 볼이 뜨거운 캔을 얼굴에 댄 것처럼 달아올랐다.
전혀 이럴거라 생각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받은 기습 뽀뽀는 그만큼 강력했다.
“뭐 ‘가족’끼리 응원의 의미로 뽀뽀하는 거 드문 일이 아니에요.”
한 쪽 눈을 살짝 감으면서 귀엽게 윙크를 한 미우가 나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급작스러운 뽀뽀에 당황한 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고 말았다.
“내, 내 가정은 안 그랬는데?”
“그럼 일본의 전통이라고 하죠.”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능글맞게 대답하면서 다시 한 번 무방비한 내 반대쪽 볼에 뽀뽀를 한 미우는 미소를 지으면서 당당한 걸음걸이로 학원으로 들어갔다.
차디찬 겨울 바람이 다시 나를 일깨우기 전까지, 나는 멍하니 그녀의 사라진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시동을 걸고 집으로 돌아왔다.
***
“우와아아.”
나에 언니에게 밀춰지고 미우에게 당겨져서 혼란스러운 나는 간만에 아무 생각 없이 게임을 했다.
마이유가 쓰던 채팅이 금지된 계정으로 들어가서 2인큐를 돌리면서, 애꿎은 협곡의 유저들을 학살하면서 우리들은 연전연승을 이어나갔다.
“이런 씨X 일본 서버에서는 제발 일본어좀 쓰란 말이야 이…!”
“언니 진정해요!! 그냥 저런 애들은 무시해야 해!”
“21분 1코어도 못 뽑은 빌어먹을 원딜이 레드 핑을 찍다니!!”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일본 리그 오브 레전드 서버를 겪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이 서버에는 일본이보다 중국인이 훨씬 많았다.
한국 기준으로는 마스터 이상의 구간에서 프로 지망생이나 현역 프로들이 한국의 높은 천상계에서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는다면
일본에서는 뭐라고 해야할까
100명중 60명 가까이가 중국인이었고 그들이 영어로 이상한 중국어를 씨부리면서 소통을 시도한다.
한국 서버에서 만난 100명의 중국인 중 80명 정도가 영어로 소통하고 20명의 무례한 똘아이들이 당당하게 중국어로 지껄이는 걸 봤는데
여기서는 영어로 소통하려는 최소한의 예의 없이 일본 서버에서 당당하게 중국어로 소통하는 인간들을 보니 기가 찼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구간에서 트롤들은 있다.
하지만 그 트롤이 중국인이면 두 배로 미워보이는 마법에 걸린 모양인지, 나는 ‘부계니까 대충해야지’ 생각 대신에 분노에 가득 차서 주류 픽들을 꺼내가면서 유저들을 학살해냈다.
물론 내 개인적인 욕구만 풀지는 않았다.
“마이유 똑바로 봐! 이 게임에서 가장 잘 큰 캐릭터가 누구지?”
“어, 어? 유, 유나 언니의 정글 키아나요.”
“교전을 걸때는 뭐라고 했지?”
“가장 잘 큰 캐릭터가 맵에 멀리 있으면 무조건 빽핑 찍으면서 빼라고요!”
“배운 대로 해!”
“넵!”
마이유의 목표가 게임 실력 함양과 높은 티어 도달인 이상
나는 잘큰 아군에게 기대서 효과적으로 버스를 타는 법을 주입시켜주었다.
그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광기에 빠진 나와 그런 나에게 휩쓸려서 연승을 이어 나가서 부계들만 모인 천상계 부계존에서 탈탈 털린 마이유가 투덜거렸다.
“게임이… 이렇게 많이 이기고 이렇게 빡셌나요?”
“뭐, 롤은 한 사람이 못하면 계속 물어뜯기는 게임이니까, 현지인인 마이유를 노리는 애들이 많긴 했지.”
“으으으.”
“그래도 잘 했어, 확실히 피지컬은 좋긴 좋구나. 게임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것 빼고는 좋았는데?”
본인 왈 하루에 매드무비 3편씩은 꼬박꼬박 보고, 피지컬에는 자신있다고 말하는 마이유의 플레이는 나쁘지 않았다. 부족한 그녀의 지능을 내가 채워주는 식으로, 그녀는 어제 6시간동안 주입당한 롤 이론 교육들을 실천해나가면서 꾸역꾸역 성장하고 있었다. 원래 게임은 잘하는 사람 사이에 껴서 머리 깨지면서 배워야한다.
“헤헤헤… 언니의 칭찬 달다…”
“지금이라면 브론즈 탈출은 물론이고 골드까지는 금방이야!”
“그, 그정도에요 제가!?”
사실은 동체 시력과 ‘해야할 역할’을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그걸 수행해내는 마이유의 실력은 마스터까지는 가능했지만 나는 그녀가 칭찬하면 금방 내키는대로 게임을 하는 꼬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겸손하게 말했다.
“헤헤헤 사실은요 제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내 곁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송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
게임에 빠져들게 된 계기
최근 들어서 늘어나는 외국인들 중 한국인들이 자신에게 한본어 트랩(한국어로 일본발음을 표기해서 일본어를 말하게 하는 장난)에 당한 이야기
노래 부르다가 음이 나갔는데도 뻔뻔하게 행동하니 오히려 시청자들이 좋아한 이야기 등등을 말이다.
“아 맞다 그래서요 제가 어제는…”
그렇게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이야기를 하던 마이유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고는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유, 유나언니… 저 오늘… 오프라인 콜라보 예약 되어 있어요.”
“…뭐!?”
“3,30분 남았어요. 회사에 갈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 롤에 빠진 중학생 소녀는
오늘 다른 사람들과 약속이 있다는 것을 깜빡할 정도로 내 집에 놀러와서 게임을 했다 이건가?
이게 무슨 아이돌이야!!
“헤헤헤…”
본인의 타고난 애교로 무마시키려는 듯, 귀엽게 한 쪽 눈을 감으면서 손으로 하트를 그리는 마이유의 모습을 보니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회사, 이 버튜버 이래도 괜찮은걸까?
진심으로 걱정이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