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7년 후2021.05.12.
“최근 약 3년간의 기억을 상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담당 주치의의 소견에 장 여사가 물었다.
“3년간이라면, 아들 기억이 스물셋에 멈춰 있는 거라고요?”
“그런 셈입니다.”
“언젠가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환자분이 힘들어할 수 있으니 되도록 스트레스는 주지 마시고요. 환자의 안정이 우선입니다.”
“…….”
“다른 부분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길게 지켜보셔야 하고요.”
의사의 조언에 장 여사의 맥박이 요동쳤다. 아들이 3년간의 기억을 잃은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최근의 3년이라면. 그뿐이라면. 어쩌면 아들에게 더 나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최근 3년간 아들에게 일어난 일은, 군 입대와 제대, 그리고 이정오라는 아이와의 짧은 연애뿐이다. 그 정도라면, 기억을 잃어도 딱히 나쁠 건 없지 않나? 3년간 대학 생활도 두 학기에 불과했으니 남들에 비해 크게 뒤처지지는 않을 것이다. 장 여사는 바삐 머리를 굴렸다. 아들의 과거 흔적을, 특히 이정오란 아이에 대한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리자. 그리고 이정오란 아이를 몰랐던 그때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내 아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다.
“네. 저도 잘 지켜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장 여사는 주치의에게 인사하고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진료실 밖에는 은비가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어머니.”
대법원 판사 채서복의 딸.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최근에 귀국한 이 아이는 그간 참 성실하게 지헌의 병실을 지켰다. 뺑소니 사건 목격자로서의 의무감일 수도 있겠으나, 아들을 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좋은 집안에서 제대로 배운 아이. 내 아들의 짝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래. 은비야.”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최근 3년간의 기억이 사라졌다고 하네. 기억이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도 알 수 없고.”
장 여사는 은비에게 사실대로 말하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저에 대한 기억도 잃은 걸까요?”
은비 또한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매달렸다.
“지헌 오빠가 저를 많이 귀여워했었거든요.”
“아, 그랬니?”
“한국으로 돌아오면 사귀자고도 했었는데, 물론 우스갯소리였겠지만, 그것도 기억 못 하겠네요.”
은비의 고백을 듣는 순간, 장 여사는 저도 모르게 은비의 손을 꼭 붙잡았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지.”
“정말 그럴까요?”
“그럼. 그렇고말고.”
자신이 힘을 북돋워주니 수줍게 웃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장 여사는 진심으로, 행복한 미래를 그려보게 되었다. 언젠가 이런 아이가 며느리로 들어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은비와 헤어진 후, 장 여사는 병실로 돌아왔다. 잠들어 있던 지헌이 일어나 무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어났니? 기분은 어때?”
“그냥 그래요.”
높낮이 없는 어조로 건조하게 대답한 지헌에게 장 여사가 다시 말을 붙였다. 아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은비 봤지? 네가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동안 은비가 애 많이 썼어. 매일 빼놓지 않고 병문안을 왔었어.”
“은엽이 동생이요?”
“그래. 미국에서 유학하다가 돌아온 지 며칠 안 돼서 정신없을 텐데도 야무지게 널 챙겼어.”
“…….”
“참, 그건 기억나니? 네가 은비를 엄청 귀여워했나 보더라. 유학 가기 전에 네가 그랬다면서. 한국으로 돌아오면 사귀자고.”
“그래요? 이상하네요.”
“…….”
“은엽이 동생은 제 스타일이 아닌데.”
지헌은 아무 감정이 없다는 듯 싸늘하게 말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듯, 텅 빈 표정이었다. 아들은 이번 사고로 기억을 잃은 것뿐 아니라 감정의 끈마저 많이 잘라낸 듯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안타까워서 장 여사는 힘없이 웃어버렸다.
“뭐 인사치레로 한 말일 수도 있겠지.”
“…….”
“근데 애가 정말로 착하고 예뻐. 싹싹하고 똑똑하고. 나한테도 너무 잘하더라. 너도 그 애 하는 행동이 예뻐서 귀여워했겠지.”
아니. 인사치레로도 그런 헛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귀여워하지도 않았을 거다. 지헌은 반박하고 싶었으나, 동시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 잠자코 있었다. 내가 잃은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군대…… 그토록 군대 생활이 힘들었나? 어떻게 아무 기억도 없을 수가 있지? 무언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떠올려보고 싶었으나 소용없었다. 지헌의 미간이 우그러지니 장 여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또 머리 아파?”
“괜찮아요.”
“…….”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아서요.”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면 애쓸수록 머리가 깨질 듯했다. 그러나 눈물은 눈에서 흐르지 않고 가슴에서 흐르는 것 같았다.
* 정오는 병원에 가지 못했다. 지헌과 함께일 때는 모두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헌과 연락이 끊어졌다는 것 하나만으로 완전히 의기를 잃고 말았다. 하지만 몸은 정직했다. 잠이 쏟아졌고 가슴의 압통이 생겼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내내 울렁거렸다. 계속 미룰 수는 없었다. 계속 절망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해보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에게 다시 연락해보자. 정오는 용기 있게 휴대폰을 들었다. 뚜르르르. 통화대기음이 흐르는 내내 심장이 요동쳤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되는 일은 없었다. 몇 번이나 무너졌던 가슴이 다시 무너져 그녀의 마음은 벽돌 하나를 세울 수도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어버렸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을 만큼 메말라 있을 때, 오랜만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뜻밖에도 지헌의 이름이 떴다. 정오는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정오?]
틀림없는 지헌의 목소리였다. 얼마 만에 그의 음성을 듣는 건지.
“오빠…….”
할 말이 많은데. 너무도 많은데. 그간의 설움이 폭발했다. 바닥이 드러났다고 생각한 눈물샘에 다시 물기가 올라왔다.
“왜 연락을 안 했어어…….”
투정 부리듯 말했다. 하지만 크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래. 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했어. 오빠가 그냥 연락을 끊을 리는 없는데.
“오빠.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 없는 거지?”
하지만 원망이 길지는 않았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잘 있어.]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온 대답에 정오는 안심했다. 그래. 아무 일 없었으면 됐어. 이제 다른 문제는 우리 둘이 같이 해결하면 돼. 그 말을 해주려고 했는데.
[우리 어머니가 나 대신 널 만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때 다 끝난 거 아니야?]
다시금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그걸로 내 의견이 다 전해지지 않았나?]
그의 마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매정한 말이 들려왔다.
[부담스러우니까 더는 연락하지 말아줄래?]
하지만 영락없는 그의 목소리. 정지헌의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정지헌의 목소리. 정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연락이 끊어졌을 때보다도 더 거대한 암흑이 그녀의 눈앞을 드리웠다.
[너도 남의 인생 걸림돌이 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야.]
숨이 턱 막혀왔다. 내가 오빠 인생의 걸림돌이 되었다고? 왜? 내가 아이를 가져서?
[다시 연락할 때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각오라니?”
각오라니. 대체 무슨 각오!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고 끊을게. 잘 지내.]
차분하고 매섭게 이어진 목소리가 끝을 알렸다. 뚝.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없이, 그녀가 그 어떤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말도 안 돼. 힘이 쭉 빠져 휴대폰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일 거야. 휴대폰을 주워 든 정오는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고서 재빨리 지헌의 전화번호를 다시 눌렀다. [전원이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수십 번은 들었던 안내음이 고막을 때리듯 아프게 울려댔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 오빠, 우리 아이가 첫돌을 맞았어.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어디서 배웠는지 가끔 아빠라고도 하더라. 지헌 씨, 이제 우리 아이는 뛰어다녀. 어린이집도 가게 되었어. 아주 호기심이 많고 밥도 잘 먹어. 엄마 얼굴 만지는 걸 좋아하고 이따금은 노래도 불러. 정지헌 씨. 이제 예나는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돼. 아주 예쁘고 성격도 좋고 친구도 많아. 아빠가 없지만 얼마나 밝은지 몰라. 이제 나는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아. 생각해보니 당신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더라. 뭐, 그래도 모두 거짓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럭저럭 좋아하긴 했지만, 사랑한다 말할 정도는 아니었겠지. 괜찮아. 이젠. 오랫동안 떠나보내지 못했던 그 계절은 쇠구슬 같은 딱딱한 앙금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그 쇠구슬의 겉면이 다시 녹슬어버릴 만큼의 시간. 7년이 흘렀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떠나간 사랑 때문에 울지 않는다. *
“엄마, 여기 왜 뽑기가 있지?”
학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엄마의 손을 놓고 몇 걸음 먼저 달려간 예나가 뽑기 기계 앞에 멈춰서서 물었다.
“엄마, 왜 여기 뽑기가 있어?”
고개를 바짝 든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정오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맑은 계곡물 아래, 물길에 따라 흔들리는 까만 조약돌처럼 빛나는 눈동자. 호기심 어린 표정을 연기하는 그 영악한 마음조차도 얄밉게 보이지 않는 어여쁜 아이였다.
“엄마, 뽑기가 왜 여기 있어?”
“이예나. 너 정말로 뽑기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해서 묻는 거야, 아니면 뽑기가 하고 싶어서 묻는 거야?”
정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하고 싶어서.”
속마음을 간파당한 예나가 통통한 입술을 작게 오므리며 고백했다. 귀여워서 요걸 나무랄 수도 없고. 정오는 훗 웃었다.
“골라. 하나만 해줄 거야. 네가 뽑고 싶은 거 안 나와도 하는 수 없어. 딱 한 번만 해줄 거야.”
“요거.”
예나는 왼쪽 맨 아래의 뽑기 기계를 가리켰다.
“오백 원짜리 동전을 세 개나 잡아먹네. 예나야, 오백 원이 세 개면 얼마지?”
“천오백 원!”
셈을 가르쳐주려고 질문을 던졌는데 여느 때보다도 대답이 빨랐다. 마음속으로 이미 계산을 다 해놓았던 모양이다. 정오는 실눈으로 예나를 흘깃 바라보고는 귀여운 조막손에 오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들려주었다. 예나는 뽑기 기계에 야무지게 동전을 넣었다. 기계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한 걸 보니, 할머니한테 많이 써먹은 수법이었나 보다. 일곱 살 꼬마가 아주 음흉해. 정오는 7년 전의 음흉했던 남자를 떠올렸다. 아주 점잖게 음흉해서 속아 넘어가는 줄도 몰랐지. 이상한 데에서 아이의 아빠를 떠올리게 되는 자신이 우스웠다.
‘하지만 나도 이제 그 옛날의 이정오가 아니라고.’
정오는 이제 7년 전의 순진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픽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따금 그를 떠올린다고 해서 그리워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저, 농부가 어느 극심한 흉년을 되새겨보는 마음일 뿐. 지독한 과거일 뿐. 평생 마주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우와! 엄마! 내가 갖고 싶던 거 나왔어!”
뽑기 캡슐을 손에 쥔 예나는 방방 뛰었지만 정오는 허망해졌다. 얌체공. 그저 둥그렇게 뭉쳐놓은 고무 덩어리였다. 얌체공 주제에 천오백 원이나 하는 것이 못마땅해 예나에게 물었다.
“예나는 이게 갖고 싶었어?”
“응!”
“왜?”
“바둑알 색깔이잖아.”
제힘으로 캡슐에서 내용물을 꺼낸 예나가 대답했다. 얌체공 주제에 축구공 옷을 입은 이 고무 덩어리가, 바둑알과 비슷한 색이라 좋다고 한 것이었다. 못 말려 정말. 정오는 픽 웃고 말았다. 이 계절의 가로수 이파리처럼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딸은 또 부쩍 자랐다. 제 취향을 알고 표현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식당까지 걸어오는 내내 예나의 손은 주머니에서 빠지지 않았다. 얌체공을 주머니에 넣고 내내 꼼지락거리는 모양이 정오의 눈에 잘 보였다. 걸음도 평소보다 빨랐다. 얼른 할머니 식당으로 가 주머니에서 얌체공을 꺼내 본격적으로 놀겠단 의지가 엿보였다. 두 사람이 씩씩하게 걸어 ‘국순 백반’에 닿았다. ‘국순 백반’. 정오의 엄마 이국순 여사의 식당. 테이블이 단 다섯 개뿐인 작은 식당이지만 근방에서는 유명하다. 점심시간에는 근처 직장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많은 식당이다.
“할머니이!”
“우리 애기 왔어? 얼른 밥 먹어.”
예나가 식당 문을 열며 크게 외치니 국순이 함박웃음으로 반겼다. 이미 테이블 위엔 두 사람의 저녁 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예나는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주머니에서 얌체공을 꺼냈다.
“또 뽑기 했구나?”
국순이 예나가 손에 든 것을 알아보고는 물었다. 예나는 찔리는 듯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콩나물국에 제육볶음. 돈가스도 떡볶이도 없는 식탁에 예나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런 예나의 속도 모르고, 국순은 멸치 반찬을 집어 예나의 밥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강아지 뭐 하나. 얼른 숟가락 떠야지.”
예나가 움직이질 않으니 국순의 손은 버릇처럼 예나의 숟가락으로 향했다. 국순은 예나의 밥그릇에서 밥을 떠 예나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엄마, 지가 알아서 먹게 둬.”
그 앞에 앉은 정오가 머슴처럼 밥을 떠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애가 안 먹으니까 그렇지.”
국순이 대꾸했다. 딸과 손녀딸은 국순의 보물이다. 딸이 자신이 지은 밥을 배불리 먹는 것, 손녀딸 입안으로 야무지게 음식이 들어가는 것, 이것이 국순에게는 하루의 낙이었다. 그 속을 읽은 것처럼 예나가 제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머니, 나는 엄마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
풉. 정오는 밥을 삼키다 크게 웃고 말았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아이는 어른이 지나치듯 내뱉은 말의 조각들을 주워 제 주머니를 만든다. 그래서 정오 또한 예쁜 말, 고운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딸 예나에게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국순은 몇 번을 일어나 손님 응대를 했다. 정오가 챙기려 했지만 국순은 딸을 아꼈다.
“얼른 먹고 들어가. 집에 가서 내일 회사 갈 준비나 해.”
“회사 갈 준비할 게 뭐 있어.”
“이직하고 처음 가는 거 아녀.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마음의 준비가 대규모 이사라도 되는 양, 국순의 음성에는 힘이 실렸다. * 다음 날.
“잘하고 와. 점심 굶지 말고.”
새 회사 첫 출근. 정오는 국순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먼저 이직한 선배의 추천으로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작은 회사지만 여건이 좋아 고민이 길지 않았다. 그런데, 선배는 새 회사에 당도한 정오에게 대뜸 강남으로 오라고 했다. 은행 사거리에서 정오는 선배를 기다렸다. 조금 지나니 선배가 도착했다.
“이 대리.”
“선배.”
선배와 인사한 정오가 용건을 물었다.
“왜 저를 여기로 부르셨어요?”
“회사가 매각됐어. 맥스기획에.”
예측 불가 인생. 정오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 뒤에 물었다.
“언제요?”
“어젯밤에 공식 발표 났는데 기사 못 봤어?”
봤을 턱이 있나. 어젯밤엔 엄마의 말씀에 따라 일찍 눈을 붙였다.
“일이 엄청 순식간에 진행된 모양이야. 그래도 이 대리 자리는 있어. 회사 건물이랑 경영진만 바뀐 것뿐이야. 잠깐 혼란스러운 거지 금방 수습될 거야.”
“…….”
“이 대리는 어딜 가든 처음이니까 근로계약서 두 번 쓸 필요 없이 이쪽으로 바로 입사하도록 조치했어. 나도 조만간 이쪽으로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러고 보니 선배가 만나자고 한 곳은 맥스기획이 있는 건물 앞이었다. 이직 회사보다 맥스기획이 좋은 회사고 위치도 괜찮긴 하지만, 갑작스러웠다.
“인사팀에서 연락 왔네. 얼른 들어가.”
“저 혼자서요?”
“이 대리는 잘할 수 있어.”
선배가 정오를 격려해주듯 어깨를 두드렸다. 이직 첫날의 설렘과 긴장감 위에 극심한 두려움이 얹혔다. 망망대해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원래 혼자야. 30년. 짧지 않은 인생의 경험들은 어느덧 정오의 자산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의 절망감에 비하면 이 정도의 긴장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정오, 너는 할 수 있다! 정오는 몸에 기합을 단단히 넣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회사 출입구 앞에 여자 한 명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이정오 씨?”
정오가 ‘네!’ 하고 대답하니 남자가 여자에게 정오를 소개했다.
“팀장님, 새로 온 카피라이터 이정오 씨입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인 여자가 정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정오 대리, 반가워요. 제작 2팀 팀장 성미란이에요. 잘해봅시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의 인상이 좋아 보여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윽고 정오는 인사팀 직원과 헤어져 미란과 함께 이동했다.
“얘기 들었어요. 상아기획으로 이직했는데 이쪽으로 오게 된 거라면서.”
“네.”
“혼란스럽겠네. 여기도 요즘 많이 정신없어서 챙겨줄 새가 없어요. 잘 적응할 수 있죠?”
“네. 그럼요.”
정오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정신 없다는 소개와는 달리 회사 내부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미란도 자리로 이동하는 와중에 옆 팀 직원과 마주치자마자 물었다.
“왜 이렇게 조용해?”
“저쪽에 정 이사님 계세요.”
옆 팀 직원이 복도 끝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정오도 고개를 돌려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보다 키가 훌쩍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였다. 뒷모습은 이사님이라는 호칭보다는 모델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따로 인사 갈 필요 없겠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미란이 정오 가까이로 고개를 기울여 긴하게 말했다.
“사실 대표님보다 무서운 분이 이사님이에요.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
“그룹 회장님 아들이거든.”
회장님 아들. 다른 세계의 사람이구나. 긴장감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잘해야지. 잘해야지.’
정오가 몸에 다시 기합을 넣은 순간, 복도 저편에서 정 이사가 몸을 돌렸다. 인생은 언제나 예측 불가. 복도 저편을 향하고 있던 정오의 얼굴이 굳었다. ……저 몸, 저 얼굴. 7년의 세월. 그 시간의 간극이 거짓말인 것처럼, 멀리서도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내 아이의 아빠. 정지헌. 그 사람이었다. 그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가 이런 사람인 줄도 몰랐다. 정오는 몸이 움직이지 않을 만큼 당황했건만, 그는 한 발 머뭇거리는 일도 없이, 눈동자의 떨림도 없이, 잘도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구두굽이 내려앉는 소리가 몸에 철컹하고 족쇄를 채우는 것처럼 무겁게 울렸다. 숨구멍이 모두 막혀버린 듯 호흡조차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심장만이 안에서 발악을 하다못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날뛰어댔다. 그가 다가오고 있다. 언젠가는 꿈처럼 기다렸던 일. 하지만 지금은 고개를 저어 거부하고 싶었다. 정오가 마음속으로 힘껏 고개를 내젓는 사이에 그는 바짝 가까워졌다. 기어이 같은 보폭에 일정한 빠르기로 다가온 걸음이 멈췄다. 그녀의 앞에서. 사고가 정지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반 발짝 뒷걸음질 친 그녀를 지헌이 억세게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