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한테 반말했어2021.05.29.
정오가 다가오는 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제 손목을 잡자 지헌은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깡그리 잊어버렸다. 몸이 이상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한낮처럼 더운 이름. 열이 들끓는 이름을 가진 여자. 이정오. 또다시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꿈 어딘가에 살다 온 것처럼 도발적이면서도 체념 섞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뿐인데.
“어떻게 그걸 버려.”
그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뿐인데. 그녀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헌은 그녀의 허리를 확 끌어당겨버리고 싶어졌다. 장소가 어디든, 아랑곳없이. 블라우스 앞섶, 단정히 잠겨 있는 단추를 잡아당기고도 싶었다. 감추어진 곡선을 확인하고 싶었다. 옷소매 안쪽의 하얀 피부를 건드리고 싶었다. 전부 삼켜버리고 싶었다. 그 야트막하게 내뱉는 숨을. 미쳤나? 내가 정말 미친 건가? 한 번도 품어본 적 없는 괴이한 충동이었다. 이게 다 그 망할 꿈 때문이리라. 지헌은 묘한 기분에 저항하며 팔을 비틀어 그녀가 붙들고 있는 제 손을 빼냈다. 거칠게 뿌리쳐도 될 일인데 어째서 느릿하게 움직이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손을 유연하게 돌린 그는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을 잡았다. 그녀가 그랬듯이. 쉽게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녀의 당황한 눈빛이 흥미로웠다. 그다음은? 그녀를 탐색하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로 하죠?”
이제 어쩔래.
“어어어!”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남자가 외쳤다. 지헌의 친구, 인사팀 박승규 차장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승규는 곧장 말을 잇지는 못했다.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가리킨 채 입만 뻐끔거리게 되었다. 친구가 새로 입사한 여자 직원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회사의 이사라는 놈이. 본부장이라는 놈이.
“이사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 크게 호통을 치니 지헌도 정오의 손을 놓았다. 왜 두 사람이 그러고 있었을까? 어제도 지헌은 자신에게 이정오 대리에 대해 얘기했었다. 얼굴이 창백하다고. 승규는 웃어넘기며 놀리듯 예쁘냐고 묻기도 했지만, 크게 진심을 담지는 않았다. 그랬었는데, 이건 웃어넘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정지헌을 추궁해? 이정오 대리한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
“이정오 대리님!”
승규는 표정을 밝게 하고 정오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대리님 찾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까 말씀을 못 드린 게 있어서.”
승규는 지헌에게 가볍게 눈짓하고 정오를 급히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정오를 조용한 회의실로 안내한 승규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서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
“사실대로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말하기를 주저하던 정오가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오늘 회사에 온 아이들 있죠. 이사님이 그 아이들한테 선물을 받았는데 애들이 떠나자마자 바로 버리시더라고요.”
아아아 맙소사……. 승규는 제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이사님 손목을 잡게 됐는데…….”
“그런데 도리어 붙잡힌 거군요.”
“네.”
“지가 잘못해놓고.”
“네…… 네?”
“몹쓸 놈이네요.”
승규가 지헌을 욕하자 그녀는 맹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은 사람이구나, 승규는 조금 안도하게 되었다.
“이사님한테는 사과하라고 하겠습니다.”
“저한텐 안 하셔도 돼요. 아이들에게 미안해야 하는 일이고…… 그리고 생각해보니 제 오지랖이기도 했네요.”
정말 괜찮은 사람이구나. 자신이 괜한 간섭을 했다고 생각하는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녀의 심성에 영향을 받은 승규가 사족을 보탰다.
“대리님, 좀 사적인 얘긴데, 사실 정지헌 이사랑 제가 16년 지기거든요. 우리 잘난 이사님께서는 제대로 기억도 못 하시지만.”
“…….”
“그래서 어느 정도 쓴소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배짱은 있어요. 아직까지는.”
정오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16년 지기라면, 7년 전의 정지헌도 알고 있겠구나.
‘그럼 나를 알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박승규의 눈빛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낌새를 읽을 수는 없었다. 좀 전의 질문도 그랬고. 정지헌은 친한 친구에게도 정오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 것이다.
“혹시 정지헌이, 아니, 정 이사님이 또 이상한 짓 하면 저를 찾아오세요. 제가 대표로 클레임하겠습니다. 반드시.”
정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움으로 똘똘 뭉쳐진 돌 한 덩어리가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것 같았다.
“근데 오늘은 일찍 점심 드시러 가시나 봐요?”
아 맞다! 짜장면! 그제야 정오는 잊고 있던 자신의 임무를 떠올렸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정오는 급히 인사하고 밖을 나섰다. 정오가 떠난 후, 승규도 회의실을 나와 급히 지헌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지헌은 집무실에 와 있었다.
“야! 내가 심장이 철렁했다!”
승규는 지헌을 보자마자 버럭 소리쳤다.
“너 그러다 큰일나. 어떻게 여자 직원 손목을 잡아. 네가 잡히는 한이 있어도, 묶이는 한이 있어도 직원 손목은 잡으면 안 되지.”
“그 여자.”
“그 여자가 아니라 이정오 대리! 말 조심해서 해라.”
친구가 여전히 깨우치지 못한 것 같아 승규는 자꾸 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나한테 반말했어.”
“……반말했다고 손목을 잡아?”
어우, 이 골 때리는 녀석. 그나마 이정오 대리에게 악의는 없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골 때리는 녀석이, 그와 맞먹는 여자를 만났다. 조금 꼬수운 것 같기도 하고.
* 정오는 성미란 팀장이 얘기한 중국집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11시 50분까지 가야 한다고 했는데, 11시 53분이었다. 이미 식당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그때 누군가 정오를 불렀다.
“이정오 대리님. 여기요.”
같은 팀 송기훈 사원이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정오는 기훈이 손짓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식점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다섯 명 자리가 세팅돼 있는 방이 나왔다.
“어떻게 기훈 씨가 와 있어?”
“팀장님이 저도 가보라고 하셨어요. 몰래 움직이느라 계단으로 내려갔고요.”
우리 팀장님, 짜장면에 진심이구나!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것 같아 난감했는데, 짜장면에 대한 미란의 집착이 정오를 살렸다.
“아, 다행이다!”
정오는 자리에 앉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 대리님 흰색 입고 오셨구나.”
가만히 정오를 바라보고 있던 기훈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에서 앞치마를 가져와 건넸다.
“다른 분들은 오늘 다 블랙 입고 왔거든요. 여기 오려고.”
“아.”
“매월 둘째 주 수요일은 블랙이에요. 기억해주세요, 대리님.”
정오가 앞치마를 목에 걸었을 때 다른 팀원들이 도착했다. 기훈의 말대로 자신만 빼고 모두 검정색 옷을 입고 있었다.
“팀장님, 이 대리님한테는 드레스코드 말씀 안 하셨어요?”
기훈이 미란에게 물었다.
“이 대리가 짜장면 싫어한다고 하면 다른 데 갈 생각이었지.”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났다. 미란은 자리에 앉으며 정오에게 물었다.
“이 대리, 정지헌 이사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얘기하는 것 같던데.”
미란은 스치듯 본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거의 모든 장면을 지켜보게 되었다. 복도를 지나다가 유리문 틈으로 본 것이다. 정오가 지헌의 손목을 잡고, 그다음은 지헌이 정오의 손목을 잡고, 그다음엔 인사팀 박승규 차장이 정오를 데려갔다. 무언가 일이 꼬였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기훈을 중국집으로 먼저 보냈다.
“아니 그냥…… 쓰레기에 대한 약간의 마찰이었어요. 신경 쓰시지 않아도 돼요.”
“왜요? 쓰레기를 막 아무렇게나 버려요?”
손거울로 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고은주 대리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정오는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럴 것 같더라고요.”
은주가 픽 콧방귀를 뀌었다.
“딱 재수 없어 보였어.”
정지헌이 재수 없어 보였다고? 그 잘난 얼굴을 보고 재수 없단 말이 바로 나온단 말이야? 정오는 은주의 반응이 흥미로워 눈을 크게 떴다. 만 하루 동안 지켜본 고은주 대리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은 고은주 대리를 ‘공주 대리’라고 불렀다. 몇몇은 그녀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고은주 대리는 이 시선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남들이 자신을 공주처럼 대하는 것 또한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미란이 은주에게 말했다.
“그래도 이사님 잘생기긴 했잖아.”
“생긴 거랑 인격이 따로 놀잖아요. 저는 나한테 잘해주지 않는 남자는 남자라고도 생각 안 해요. 그냥 상사죠. 상사 아니었으면 상대할 가치도 없고요.”
은주가 미란의 의견에 가차 없이 반박했다.
“세상 그 누구도 나의 존엄성을 해칠 수는 없으니까요.”
은주의 주장이 왠지 설득력 있어서 정오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사람은 모두 존엄한데, 정지헌은 아이들이 손수 만든 쿠키를, 카드까지 넣었다는 그 선물을 뜯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넣었다.
“맞아요. 인간은 모두 존엄한데.”
“아뇨. 저만 존엄한데요.”
그런데 은주는 정오의 수긍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은주는 도도하게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나 말고 남이 뭐가 중요해요. 나만 존엄하면 되는 거예요.”
아. 고은주 대리는 이런 사람이구나. 멋있다. 왜 이렇게 멋있지? 정오는 은주의 배짱에 감탄하게 되었다. 다른 팀원들도 은주의 말을 듣고서 유쾌하게 웃었다. 정작 은주는 고고한 표정 그대로였다. 팀원들의 성향을 차츰 파악해가고 있다. 성미란 팀장은 생각이 깊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 박영광 차장은 말이 별로 없고 성실한 사람, 고은주 대리는 도도하고 깐깐하면서 당당한 사람, 송기훈 사원은 밝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 어제는 회사 생활이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졌다. 팀원들을 잘 만난 것 같았다. 앞으로의 협업이 기대될 만큼. 걸리는 건 정지헌 이사와 채은비 과장뿐이었다.
‘아 몰라몰라. 나도 그냥 막살아보련다.’
고은주 대리의 주장에 감화된 정오가 속으로 생각했다. 성미란 팀장과 그 팀원들이 드레스코드까지 맞추고 사활을 걸 만큼 짜장면은 맛있었다. 맛집을 알게 되니 더욱 회사를 그만두기 싫어지는 정오였다. 그런 정오에게, 미란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이 대리.”
“네. 팀장님.”
“이사님이랑 심각했어?”
정오가 눈을 삼박거렸다. 무엇의 심각함을 묻는 것인지, 정확히 어떤 질문인지 모호해서 함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아까 지나가다가 봤어. 이 대리가 이사님 붙잡은 거.”
아아. 정오는 몰래 안도했다.
“아니 그게요.”
정오는 미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지헌이 견학 온 아이들을 배웅한 것, 아이들의 인솔자 선생님이 지헌에게 쿠키 선물을 건넨 것, 그리고 아이들이 떠나자마자 지헌이 망설임 없이 선물을 버린 것까지. 미란이 함께 고민해주듯이 턱을 쓸었다.
“그 일에 대해선 사과하고 싶진 않아요. 물론 저도 무례했지만, 이사님은 그러면 안 되죠.”
“그래도 그룹에서는 그렇게 평이 나쁘진 않더라. 겪어보면 괜찮은 보스일 수도 있어.”
“보스는 되겠지만 리더는 되지 못할 것 같아요.”
“우리 이 대리, 성격 있구나.”
그것이 딱히 언짢지는 않다는 투로 미란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더 긴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스러운 주제라는 듯.
“굳이 이사님 편을 들고 싶지는 않은데, 사실 그 사람은 우리랑 사정이 다르긴 해.”
“무슨 사정이요?”
“뺑소니를 당한 적이 있었대.”
복도를 걷던 정오의 걸음이 툭 멈추었다. 미란도 자리에 그대로 서서 말을 이었다.
“그룹에서는 쉬쉬하는 것 같더라고. 한 7년 된 얘긴데 그때는 좀 심각했나 봐.”
뺑소니 사고? 7년 전? 자신이 사고를 당한 것처럼, 정오는 갑작스레 숨이 턱 막혀왔다.
”나도 어찌어찌해서 듣게 된 건데 7년 전에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더라.”
“……기억상실증이요?”
정오가 떨려오는 음성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