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당신의 아이가 태어났어2021.06.02.
“……기억상실증이요?”
미란이 끄덕였다.
“응. 그때 가까운 시기의 기억을 잃었대. 한 3년 정도? 그전에 군대에 다녀왔는데 그것도 기억 못 한다고 하더라.”
“…….”
“그 일로 성격도 예민해지지 않았을까?”
정오는 7년 전,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서 지내던 시절에 지헌을 처음 만났다. 지헌은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밤송이처럼 삐죽 서 있을 때였다. 등골을 타고 쭉 올라온 소름이 뇌를 울렸다. 둔중한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쿠키 선물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아이들이 준 선물이라고 해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만든 음식은 신뢰하기 어렵지 않을까? 어떤 위험이 있을지 두려운 입장에서는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
“물론 카드까지 버린 건 너무했지만 말이야.”
정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미란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했다. 정오는 충격을 받아 말을 하지 못하는 거였다. 유연하게 사고하던 뇌가 순간적으로 멈춘 것 같았다. 정오는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팀장님, 혹시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
“성 팀장님. 한참 찾아다녔잖아요. 우리 회의 할 거 있는데.”
뺑소니 사고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보려 할 때 옆 팀의 팀원이 미란을 찾아왔다.
“아 맞다! 그랬지.”
미란이 팀원에게 팔이 붙들려 떠나며 정오에게 손짓했다. 중요한 시점에 대화가 중단되었다. 정오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지그시 눌렀다. 심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그 사람이 날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야?’
가슴에 얹었던 손이 위로 올라와 입을 막았다. 말도 안 돼.
‘나를 잊었다고? 정말?’
미란을 신뢰하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미란과 더 얘기하고 싶어 틈을 엿보았지만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대로 점심시간이 끝나버렸다. 정오도 무거운 상념을 내려놓고 오후 업무에 집중해야 했다. 인내하며 감정을 닫아거는 것은 정오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새 회사에서의 첫 번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기존 클라이언트의 신제품 기획 회의였다. 제작 2팀만 회의에 참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작 2팀 팀원들이 자리 잡았을 때 문이 다시 열렸다. 1팀 사람들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물론 채은비도 끼어 있었다. 정오와 눈이 마주친 은비가 그 눈길을 넘어 정오의 옆에 앉은 미란에게 살갑게 인사했다.
“팀장님, 오늘 올블랙 너무 잘 어울리세요. 시크하고 섹시해요.”
“그래? 짜장면 먹으러 가려고 이렇게 입었는데.”
“아, 향미각에 가셨구나. 그러고 보니 2팀 분들은 다들 블랙이네요.”
은비가 2팀 팀원들을 쭉 훑어보고는 말했다. 나는 같은 2팀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정오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미란이 정오를 챙겼다.
“우리 팀 새 얼굴은 다들 알죠? 이정오 대리예요, 카피라이터고.”
미란이 담당 AE(Account Executive : 광고기획자)와 제작 1팀 팀원들에게 정오를 다시 한번 소개하니 은비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반가워요. 나도 카피라이터인데.”
“네. 반갑습니다.”
굳이 아는 사이라는 걸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 정오도 잘 받아쳐 주었다. 이윽고 기획팀 AE가 광고주에게서 전달받은 내용을 브리핑했다.
“타깃은 2030 직장인, 콘셉트는 ‘집에 쟁여두고 퇴근 후 혼자 마시는 맥주’입니다. 주류 광고라 TV 광고는 밤 10시 이후에나 가능하고 옥외 광고도 안 돼서 다른 방향으로 타깃팅이 많이 들어갈 거고요, 아이디어가 괜찮다면 제품 패키지에도 적극 활용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광고주가 깐깐하고 규모도 커서 제작 1팀도 함께 참여하게 됐고요, 5월 마지막 주까지 시안을 제시하는 게 목표입니다.”
구미 당기는 기획서에 정오도 흡족했다. 주류 광고는 처음이라 새삼 설레기도 했다.
“우선 브레인스토밍을 했으면 하는데요, 자유롭게 의견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AE의 제안에 미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집에서 혼자 마시는 술이니까, 솔로 타깃 스토리텔링은 어떨까요? 행복한 커플들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솔로의 일상을 보여주는 거죠.”
미란의 의견에 끄덕인 정오가 제 노트에 카피 아이디어를 끄적였다.
“그럼 2팀이 유리하겠네요. 다들 솔로시니까.”
그사이에 2팀의 팀장이 농담을 던졌다. 기훈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제가 솔로일 거라고 속단하시네요.”
“송기훈 씨 애인 있었어?”
“없지만요.”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약간 긴장하고 있던 정오도 밝은 분위기에 흡수되어 함께 웃었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기훈이 고개를 돌려 정오에게 물었다.
“대리님은 남자친구 있으세요?”
“없지.”
기분 탓일까. 정오의 대답에 은비의 자리쯤에서 픽 실소가 들려온 것 같았다.
“오, 이 대리님이 노트에 뭔가를 쓰셨는데요. 읽어도 돼요?”
기훈이 재빠르게 노트에 얼굴을 들이댔다. 정오에게 집중하며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눈이 오는 날 눈을 봐야지, 눈이 오는 날 걔를 왜 보냐.”
미란의 의견을 듣고 끄적인 카피가 기훈의 낮은 음성을 통해 흘러나왔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감탄사가 터졌다.
“크으. 역시 카피라이터.”
과묵한 박영광 차장이 찬탄하며 엄지를 높이 들었다.
“솔로 독백으로 좋네요.”
옆 팀의 남자 팀원도 짝짝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 감탄사들의 사이에, 은비가 미소 지으며 정오에게 말했다.
“절절하고 실감 나네. 솔로 생활을 오래 하셨나 봐요?”
정오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얘가 나 놀리는 거지? 분하다. 분하지만 사실이라 화를 낼 수가 없다.
“그렇죠, 뭐.”
정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는 잘 못 할 수도 있겠네요. 솔로였던 게 오래전이라 너무 까마득한 감정이라서. 이 대리님이 메인 카피 쓰시겠어요.”
네 개인 사정은 별로 알고 싶지 않거든? 은비의 사족에 정오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겉으로는 접대용 스마일을 선보이며. AE가 회의를 정리했다.
“지금 말씀해주신 건 한 가지의 아이디어팁으로 두고 여러 방향으로 발전시켜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다음 회의는 다음 주 화요일로 잡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회의가 마무리되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비가 느릿느릿 자리를 정리하며 정오에게 인사했다.
“이 대리, 잘 부탁해요.”
“네. 저도요.”
은비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굼뜨게 손을 움직였다. 왼손 약지에서 반지가 반짝거렸다. 그런 은비를 바라보던 미란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채 과장은 언제 결혼해?”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은비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어머님은 올해 넘기지 않았으면 하시는데 아시다시피 그분이 많이 바빠서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은비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왼손의 반지가 화려한 디자인을 자랑했다. 정오는 어쩔 수 없이 대화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정오가 궁금한 건 그저 정지헌의 기억상실증이었다. 회의실이 정리된 후, 정오가 자신을 눈으로 열심히 좇는 것을 확인한 미란이 물었다.
“이 대리, 왜. 할 말 있어?”
둘만 남은 회의실. 좋은 타이밍이었다.
“아까 말씀하신 정 이사님 사고 있잖아요.”
“응. 그게 왜?”
“혹시 그 사고가 언제쯤인지 아세요?”
눈동자를 굴리며 곰곰이 생각해보던 미란이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잠깐만.”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여 한참 동안 무언가를 검색한 미란이 휴대폰 화면을 정오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정 이사님 기사야.”
“…….”
“그쪽 집안에서 기사들을 다 막았거든. 이거 하나 남았지.”
「11월 3일 오후 1시경 서울 용산구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오피스텔에 거주하고 있는 20대 남성이 뺑소니 차량에 치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를 낸 후 도주한 용의자는 오후 7시경 경찰에 붙잡혔으며 피해자는 중태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7년 전 11월 3일.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정지헌과 만나기로 한 그날. 세 시에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해놓고 끝내 나타나지 않았던 그날. 수십 번 통화를 시도했지만 결국 휴대폰 전원이 꺼졌다는 안내를 받았던 그날.
“이 대리, 왜 그래. 괜찮아?”
“……네. 괜찮아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오는 힘겹게 인사를 하고서 미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비틀비틀, 자리를 향해 가는 길이 어지러웠다. 바닥과 천장이 뒤바뀐 것만 같았다. 혼돈 속에서 불현듯 몇 시간 전에 박승규 차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실 정지헌 이사랑 제가 16년 지기거든요. 우리 잘난 이사님께서는 제대로 기억도 못 하시지만.”
분명히, 그가 제대로 기억도 못 한다고 말했었다. 그게 기억상실증 얘기였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직접 확인해보아야 했다. 정오는 방향을 틀어 지헌의 집무실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발걸음은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빨라져 집무실 앞에 이르렀을 때는 뛰다시피 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세요?”
정오가 집무실 문에 손을 뻗었을 때,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비서가 물었다.
“이사님 자리에 계신가요?”
“아마 휴게실에 계실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정오는 다시 발길을 돌려 휴게실을 향해 뛰었다. 9층의 휴게실은 제법 널찍하다.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를 비롯하여 많은 책들과 안마 의자, 오락시설, 간단한 다과까지 마련된 공간이었다. 회사를 찾아온 클라이언트와 방금 막 헤어진 상태였던 지헌은 왠지 거슬리는 발소리에 몸을 돌렸다. 휴게실 안으로 들어온 여자를 확인한 그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몸이 꽉 긴장하게 되었다. 또다시 이정오……. 지헌은 불편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몇 발치 앞에서 지헌을 발견하고 자리에 멈추어 섰다. 입을 꾹 닫고 있었지만 흉곽이 도드라졌다.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작은 어깨가 들썩거렸다.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울상이 되어 바라보는 모습에 지헌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대상이 자신일 거라는 생각에 닿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어깨너머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헌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휴게소엔 아무도 없었다. 자신과 이정오, 두 사람뿐이었다. 목소리보다 울음이 더 먼저 터질 것만 같아, 정오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그렇게나 그를 찾아 뛰어다녀놓고는, 정작 그의 앞에 서자 머릿속이 뿌예진 것만 같았다.
‘정말 기억하지 못해? 정말? 아무것도?’
정말 나를 잊었어? 잊은 척하는 게 아니고, 정말 잊었다고?
‘그럼, 우리 아이가 있다는 것도 몰라?’
당신이 아빠가 되었다는 것도 몰라? 가슴이 너무 뛰어 뻐근했다. 감정을 꾹꾹 누르고서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누군지 아세요?”
“알죠.”
지헌이 쉽게 답했다.
“카피라이터 이정오 대리.”
묵직한 목소리였지만 형편없이 무성의한 대답이었다. 그 차가움이 오래전부터 폐허였던 그녀의 가슴을 다시 무너뜨렸다.
“……그것 말고는요?”
“내가 더 알아야 할 게 있습니까?”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오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싶은데.”
그에게는 몇 년 전의 과거보다 몇 시간 전의 갈등이 먼저였다. 비참한 현실에 닿았다. 어떻게? 어떻게 나를 잊었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정오는 다시 손으로 가슴을 감싸야 했다. 어떻게 날 잊을 수가 있어! 당신이 나한테 어떤 사람이었는데. 나는 당신한테 어떤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잊어. 어떻게!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서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멱살을 잡고 따지고도 싶었고 주먹으로 가슴을 때려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한없이, 하염없이 안타까운 남자.
‘……얼마나 아팠어. 얼마나 다쳤기에 기억까지 잃은 거야…….’
자신을 낯선 사람인 양, 손등에 묻은 이물질처럼 바라보는 싸늘한 남자를 부여안고서 울부짖고 싶었다. 잘 지냈어? 응? 날 까맣게 잊고서 잘 지냈어? 당신은? 난 무서웠어. 내 인생에서 당신 하나 사라진 것뿐인데, 내게는 온 세상이 암흑이었어. 내 눈을 파내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어. 그 암흑을 헤매다가 아이를 낳았어.
‘당신의 아이가 태어났어. 당신은 모르는 당신의 아이가…….’
그 아이가 이제 일곱 살이 되었어. 아주 예쁘고, 아주 야무지고, 당신을 닮아서 어른스럽기도 해. 당신이 놓친 시간이 계속 자라고 있어. 우리의 아이가 자라고 있어. 가슴이 저미도록 예쁘게…….
가슴속에 갇혀 있던 수만 가지 언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려 했다. 그래서 정작 정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렸다. 기어이, 언어보다 빠른 눈물이 뚝, 직선을 그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독하게 냉랭함을 유지하고 있던 지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순간.
“오빠. 여기 있었어?”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정오도 아는 목소리였다.
“아침에 아버님 어머님 뵈러 갔었다며. 다음에는 같이 오라셔.”
채은비였다. 은비는 지헌이 혼자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멀찍이서 걸어오며 계속 말을 이었다. 휴게실이었지만, 지헌 외에 누가 더 있든 개의치 않는다는 투였다.
“같은 회사에 있는데도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드네.”
그 애교 가득한 목소리가 정오의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파는 것만 같았다. 정오는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오빠?”
다가온 은비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그제야 지헌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잠깐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이윽고 표정을 펴고는 옆에 나란히 서서 지헌의 팔에 제 손을 끼웠다.
“오빠. 내가 말 안 했지?”
지헌에게 정오를 소개하는 것 같은 태도였지만, 정오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지헌을 자랑하려 한다는 것을.
“이정오 대리, 내 친구야. 고등학교 동창.”
친절한 소개를 끝낸 은비가 정오에게 물었다.
“정오야, 무슨 일이야?”
내 남자한테 무슨 일이니? 은비의 질문은 그런 의미였다. 지헌의 팔을 꽉 붙들고 있는 손에서 반지가 눈이 아프도록 반짝거렸다. ……내 아이의 아빠에겐 피앙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