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내가 될 사람2021.06.05.
친구 승규에게 한차례 핀잔을 듣고 난 후. 지헌은 다시 엘리베이터 쓰레기통 앞에 섰다. 종이봉투째로 쓰레기통에 떨군 그 물건은 그 상태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팔을 뻗어 종이봉투 안에서 상자만 집어들었다. 상자에는 카드가 붙어 있었다. 카드를 펼쳐 보았다. -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훌륭한 사람이 될게요. 과자 맛있게 드세요! 삐뚤빼뚤 쓴 글씨를 한 자 한 자 확인하느라 인상이 구겨졌다. 카드를 다시 버릴까 하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상자를 들고서 집무실로 돌아온 지헌은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갈색의 쿠키들에 여러 견과류가 박혀 있었다. 모양은 예상했던 대로 형편없었다. 하지만 지헌은 큰 고민 없이 쿠키 하나를 집어들어 비닐 포장을 뜯었다. 쿠키를 한입에 넣고 천천히, 오물오물 씹었다.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원래 음식 선물은 거절하는데 예의상 받아준 것이었다. 더 이상 보육원의 아이들과 인솔자를 볼 일은 없을 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버린 것이었고. 선물을 버리는 건 늘 있는 일이라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떻게 그걸 버려.”
반말을 했던 것이 언짢아서가 아니었다. 왠지 단순한 원망을 넘어선 것만 같은 그 말투, 그 억양, 그 음색,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진심. ‘넌 왜 이렇게 사는 거니?’ 하고 따져 드는 것만 같았다. 일개 직원이 직장의 임원에게, 이토록 발칙하게 덤빌 수가 있을까? 뭔가 꿍꿍이가 있다면 정말 교활한 것이고 순수한 마음이었다면 배짱이 대단하다고 할 만했다. 그리고 한창의 오후 시간. 지헌은 휴게실에서 정오와 다시 만났다. 급하게 찾아온 그녀는 그가 말을 걸어오기 전에 먼저 질문을 던졌다.
“……제가 누군지 아세요?”
“알죠.”
“…….”
“카피라이터 이정오 대리.”
“……그것 말고는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너는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손목을 잡았느냐 하는 힐난 같기도 했고 자신이 무언가 놓친 것을 추궁하는 힌트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 됐든 유쾌하지 않았다. 지헌은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차츰 동요하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더 알아야 할 게 있습니까?”
“…….”
“그것보다는 오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싶은데.”
그녀가 더 엉뚱한 말을 내놓기 전에 기회를 채가기로 했다. 당신이 어떻게 그걸 버리냐고 따졌었지. 그래서 주워왔다고. 그런데 돌연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울어? 왜? 그녀가 어떻게 따지고 들든 냉랭하게 쏘아줄 요량이었던 지헌 또한 길을 잃었다. 도대체 이번엔 뭐가 문제야. 미간에 힘을 주고서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승규가 그녀를 데려갔던 것이 덜컥 마음에 걸렸다. 승규가 겁을 준 건가? 박승규라면 이런 일에 유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거칠게 대처한 모양이었다. 승규가 자신을 감싸느라 한 일이겠지만 썩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여자가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으로. 여자는 울고 있는데. 그 약해진 모습에 갈망이 생겨났다. 꽉 막힌 곳에서, 문을 굳게 닫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몇 시간이고 이렇게 우는 걸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과연 보고 싶은 게 눈물뿐일까?
“오빠. 여기 있었어?”
순간 휴게실 출입문에서 소리가 들렸다. 채은비였다. 지헌은 저도 모르게 정오를 향해 들어 올렸던 한쪽 손을 재빨리 내렸다. 정오 또한 당황한 듯 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가가 새빨갰다. 많이 서러웠나? 그걸 물어봤어야 했다.
“오빠. 내가 말 안 했지? 이정오 대리, 내 친구야. 고등학교 동창.”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그의 팔은 은비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정오야, 무슨 일이야?”
“아, 아니, 그냥 책 좀 보러 왔어요.”
정오가 고개를 뻣뻣하게 돌리며 대답했다. 변명이라는 걸 지헌은 알고 있었다.
“무슨 책?”
“주류 광고에 참고할 책들이요.”
“어머, 정오야, 우리만 있을 때는 말 놔. 혹시 나 무안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지?”
“아, 아니야. 아니야. 나 갈게.”
은비의 물음에 얼렁뚱땅 대답한 그녀는 누구한테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냉큼 떠나버렸다. 정오가 떠난 후, 지헌과 은비 둘만 남겨지자 두 사람의 팔도 떨어졌다. 은비에게는 껄끄러운 의문이 남았다. 대체 뭐였을까?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이정오가 지헌을 앞에 두고서 얼굴을 붉히고 있고, 지헌은 굳어 있던 상황.
“오빠, 무슨 일이야? 이정오가 오빠한테 뭐라고 해?”
역시나 지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은비 역시 이런 일에 사사건건 상처받지는 않는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정오 걔 너무 신뢰하지는 마. 믿고 뭔가를 맡길 수 있는 애는 아니야.”
그의 눈썹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고등학교 때 말이야. 걔가 내 화장품에 몰래 손댄 적 있었거든. 그러고선 아닌 척 딱 잡아떼더라고. 친구들은 다들 알고 있는데 걔만 벅벅 우기니까 좀 무섭더라.”
“…….”
“지금은 버릇 많이 고쳤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오빠도 조심해.”
그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꺼풀을 내려 그녀의 왼손 약지 반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선물해준 반지인 양 사람들에게 자랑했던 것이었다. 지헌은 물론 이 사실을 모른다. 괜히 뜨끔하여 은비는 제 왼손을 뒤로 감추었다. 그럼에도 그의 서슬 퍼런 눈빛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간혹 상대를 압살해버릴 것만 같은 그의 눈빛에, 그러면서도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 태도에 소름이 끼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너야말로. 채은비.”
“…….”
“선 넘지 마.”
그 이상의 뭔가가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은비 또한 울컥했다. 지헌이 떠난 후, 은비는 오랫동안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귀찮은 애들이 생길까 봐 사귀는 척하는 거면서.’
4년 전, 지인들 사이에서 은비와 지헌에 대한 핑크빛 소문이 났다. 그 기회를 구실삼아 은비는 지헌에게 명목상의 연애를 제안했고 지헌은 이를 받아들였다. 주변 많은 이들의 과한 관심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졌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 잘 이어져 오고 있다. 회사에서도 은비는 지헌과의 관계를 알차게 이용했다. 지헌에게 온갖 사랑을 받고 있는 것처럼 자랑했고, 예쁜 반지를 끼고 와서 지헌이 사준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고, 얼마 후면 결혼하는 것처럼 예물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서 잘 즐기고 있었는데, 지헌이 덜컥 맥스기획으로 부임해왔다. 처음에는 허풍선이가 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헌은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언제나처럼 지헌은 제게 무심한 태도였다. 정말로 명목뿐인, 가짜 연인. 그럼에도 은비는 제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꼬박꼬박 장영미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살살 비위를 맞추면서 예쁨을 받고 있다. 영미는 은비를 이미 며느리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은비의 기대는 이제 확신이 되었다. 지금은 비록 지헌과 서먹서먹한 사이지만, 언젠가 자신은 그의 아내가 될 거라는 확신. 그가 제 것이 될 거라는 확신. 정지헌은 자신을 가장 돋보이게 해줄 남자였다. 소문은 더러 있었지만 정작 뒷조사를 해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여자관계가 깨끗한 사람이었다. 무슨 결벽증인지는 몰라도 정지헌은 계속 혼자일 것이다. 그러니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오늘처럼, 이정오처럼 불쾌한 날파리들만 쫓아내버리면 되는 것이다. 은비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지헌은 알지 못했다. * 저녁 시간. 정오는 자리에서 담당을 맡게 된 자료들을 훑었다. 경쟁 PT에 참여하게 되어 오늘부터 꼼짝없이 야근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자꾸 상념이 생겨났다. 정지헌과 채은비. 그 두 사람을 나란히 보게 될 줄이야. 그런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지헌에게 예나에 대해 털어놓을 뻔했다. 꼭 기억상실증이 아니더라도 7년이면 강산도 변할까 말까 한 시간인데. 후우우우. 드르르르. 한숨과 맞물려 진동이 울렸다. 엄마 이국순 여사의 연락이었다. 진동이 울리고서야 깨달았다. 야근을 하면서 집에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걸. 지헌과 은비를 한 공간에서 만난 충격에 넋이 나가버린 것이다. 정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근이야?]
“응. 예나는?”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노래노래를 해서 밥 먹으면 사준다니까 할머니 밉댄다.]
“풉.”
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그나마 퍽퍽한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넌 좋아? 손녀딸이 할머니가 밉다는데?]
“엄마도 웃으면서 뭘.”
[너는 밥 먹었어?]
“응. 내 밥걱정은 안 해도 돼.”
하긴, 하며 국순은 잔잔한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참, 그거 머리핀 식당에 있더라. 엄마가 찾아놨어.]
“응? 무슨 머리핀?”
[보라색에 동그랗고 기다랗게 생긴 거 있잖아. 끝에 보석 달린 거. 네가 찾았었잖아.]
“언제?”
[한 1년 됐겠네.]
“1년 전 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1년이면 당연히 잊어버리지.”
[너나 잊어먹지, 네가 그렇게 얘길 했는데 엄마가 어떻게 잊어먹어.]
“……그랬나?”
[그때 그렇게 열심히 찾아놓고선 그걸 잊어먹어?]
“그만큼 중요한 건 아니었던 거지.”
[너 안 하고 다닐 거면 됐어. 엄마 해야겠네.]
엄마는 딸을 생각하는 그 시간에 딸은 딴 남자를 생각하고 있다. 잊고 있던 머리핀이 제 인생과 겹쳐졌다. 정지헌에게 이정오도, 그런 머리핀 같은 것이려나?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잃어버린, 그리고 다시 찾지 않는. 그런 쓸모없는 기억 같은 것이려나? 1년도 아니고, 무려 7년 전의 사람. 나도 당신을 잊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서러웠다. 지나간 사랑은 깨진 유리 같은 것이다. 이미 쓸모없는데도, 쓸데없이 반짝거리는 것. 그 유리 조각이 날 상처입힐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 손을 뻗게 된다. 미련하게도. 그래서 자꾸만 더 서러워지고. 말이 없는 딸이 바쁜 건가 싶어 엄마는 통화를 마무리했다.
[오늘 늦어?]
“아니. 많이 늦지는 않을 거야. 피티 첫날이라서.”
[그래. 너무 고생하지 말고 시원한 데서 일해. 날이 엄청 덥더라.]
“응. 걱정 마세요.”
정오는 씩씩하게 전화를 끊었다. 이제 곧 회의가 시작된다. 회의실로 자리를 옮기려는 정오에게 은비가 손짓했다.
“이정오 대리.”
같은 본부에 바로 옆 팀이니 채은비와는 앞으로도 자주 마주치겠지. 이렇게 협업하는 경우도 많고. 계속 이 회사를 다닐 생각이라면 불편한 마음은 극복해야 한다. 정오는 마음을 다잡고서 은비에게로 갔다.
“이정오 대리도 경쟁 PT 회의 들어가죠?”
“네. 과장님.”
“이것 좀 회의실에 갖다 놓을래요?”
은비가 가리킨 것은 노트북 세 대였다. 다 합쳐봐야 그다지 무겁지는 않을 테지만, 개인 노트북 같은데.
“회의에 필요한 거라서요.”
“네. 알겠습니다.”
정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노트북 세 개를 들어 올렸다. 역시 무겁지는 않았다. 발길을 돌려 회의실로 가려는데 은비가 다시 정오를 불러세웠다.
“이정오 대리.”
“네.”
“혹시 기분 안 좋은 일 있어요?”
“네? 아닌데요.”
“근데 표정이 좀 그러네요.”
내 표정? 정오는 눈을 삼박거렸다.
“내가 일 시켰다고 기분 언짢아진 건 아니죠?”
“전혀 아닌데요.”
정오는 시원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하나 은비의 표정은 많이 어두워졌다.
“이정오 대리, 별일 아닌 것에 얼굴 빨개지면서 흥분하고 그러면 서로 기분 상할 수도 있어요.”
은비의 타이르는 듯한 말투에 정오는 멍해졌다. 노트북 들어주는 게 뭐 별일이라고. 난 정말 괜찮은데? 도리어 은비의 지적으로 없던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당황스럽고 억울했다. 기어이 은비는 땅이 꺼져라 푸욱 한숨을 쉬고는 정오가 든 노트북을 도로 가져갔다.
“이건 그냥 내가 들고 갈게요. 기분 풀어요.”
모난 구석 없이 고운 목소리였다. 은비의 천사 같은 대처에 정오를 바라보는 주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