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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예나가 누구야? (12/183)

12. 예나가 누구야?2021.06.09.

은비는 노트북을 들고서 앞서 걸었다. 정오가 졸래졸래 자신을 쫓아 회의실로 들어왔다. 은비와 정오, 둘만 있는 회의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내려놓은 은비가 넌지시 물었다.

16551137532691.jpg“정오야, 표정 왜 그래?”

16551137532696.jpg“내가 뭘?”

16551137532691.jpg“뭐 씹은 표정 같아서.”

정오는 기가 막혔다. 아까부터 왜 은비가 자꾸 생사람을 잡는지 알 길이 없었다.

16551137532696.jpg“뭘 씹어? 나 아무것도 안 씹는데?”

16551137532691.jpg“그러니까.”

16551137532696.jpg“…….”

16551137532691.jpg“아무것도 안 씹는데 뭐 씹은 표정 같아서.”

16551137532696.jpg“…….”

16551137532691.jpg“정오야. 너를 위해서 한마디만 할게. 표정 관리를 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16551137532696.jpg“…….”

16551137532691.jpg“내가 뭐 잘못해서 너보다 직급이 높은 건 아니잖아. 그렇지?”

사려 깊은 음성으로 들려오는 비아냥에 정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랄까? 그래도 꽤 빨리 채은비의 진면모를 다시 파악하게 됐으니 말이다. 그래. 채은비야. 넌 내 기를 죽여놓았다고 생각하겠지만.

16551137532696.jpg‘아줌마는 절대로 절망하지 않지!’

이 땅의 애 엄마로 살아온 게 어언 7년이다. 새해에 한 번씩만 레벨업을 해도 레벨 7이라고. 네가 괴롭히지 않아도 충분히 복잡한 인생이야. 그러니 너의 괴롭힘은 허락하지 않을 거야.

16551137532696.jpg‘아주 분발해야겠네!’

정오는 마음껏 전의를 불태울 수 있게 되었다. 잠시 후 회의실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번 경쟁 PT는 TF팀이 만들어졌다. 2팀에서 일이 몰려 있는 고은주 대리가 빠지고 1팀에서 카피라이터 채은비 과장과 그래픽디자이너 조시내 대리, 조유리 대리가 참여하게 됐다. 구성원들이 모두 모이자 AE가 비딩 내용에 대해 브리핑했다.

16551137550079.jpg“그저께 저랑 제작 1팀 성미란 팀장님이 회사 방문해서 설명을 듣고 왔습니다. 알뜰폰 통신사 소리텔레콤에서 미앤톡이라는 신규 어플을 개발했는데요. 론칭 시기에 맞춰서 브랜드 광고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미앤톡은 간단하게 영상통화 어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존의 영상통화는 약간의 딜레이가 있잖아요. 미앤톡은 이 딜레이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킨 기술이 들어갔다고 하네요. 신호가 약한 장소에서도 비교적 훌륭하게 작동하고요.”

영상통화. 정오도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예나를 엄마께 맡기고 회사를 다니는 처지다 보니 영상통화를 꽤 하는 편이다. 대놓고 할 수는 없고 꼭 영상통화를 해야겠다 싶을 땐 비상계단이나 한갓진 장소를 이용하는데 그런 장소는 신호도 약할 때가 많다.

16551137532696.jpg‘좋은 어플이 나왔으면 좋겠네.’

설레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아이디어를 떠올려보았다. 한참 브리핑이 진행되는 와중에 달칵 출입문이 열렸다. 정오의 심장에서도 덜컥 소리가 났다. 정지헌이 들어오고, 회의실이 일순 조용해졌다. AE도 설명을 멈추었다. 지헌은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AE에게 한마디 일렀다.

16551137550085.jpg“진행하세요.”

16551137550079.jpg“아, 네.”

다시 AE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지헌은 은비의 옆에 가 앉았다. 공교롭게도 은비의 옆자리만 비어 있었다. 또한 아주 공교롭게도 정오의 바로 앞이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정오는 슬그머니 눈을 움직여 지헌과 은비를 바라보았다. 은비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애인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예뻐 보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 꽤 잘 어울렸다.

16551137532696.jpg‘깊은 사이일까?’

그렇겠지. 말해 뭐해. 그러니까 결혼까지 한다는 거지. 7년 전의 정지헌은 그런 쪽으로 몹시도 왕성한 남자였다. 침대든 어디든 장소를 가리지도 않았고. 그렇게 날 괴롭히던 사람인데. 그 성향이 어디 갈 리 없지.

16551137532696.jpg‘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겠지.’

몇 개월 만난 여자가 몇 년 만난 여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16551137532696.jpg‘게다가 나는 이제 이 남자의 기억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인걸.’

정오는 체념하며 AE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한쪽 뺨이 왠지 따가웠다. 누군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16551137532696.jpg‘헉!’

고개를 슬며시 다시 돌리자마자 지헌과 눈이 마주쳤다. 정오는 부리나케 고개를 숙였다. 노트에 머리를 파묻을 듯이.

16551137532696.jpg‘아니, 왜 나를 보고 있냐고!’

회의에 들어왔으면 회의에 집중할 것이지 왜 나를 보고 있느냐고. 애인까지 옆에 두고서! 재빨리 움직이고 나서 생각해보니 제 반응이 너무 과했던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자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었는데, 자신을 바라본 게 아닐 수도 있는데. 정오는 반성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사람들은 정오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

16551137550079.jpg“여기에 문자메시지 서비스와 게임 서비스가 탑재될 예정이고요. 뉴스, 쇼핑 서비스까지 순차적으로 오픈할 거라고 하네요. 어플은 아직 베타테스트 단계라 직접 접할 수는 없었고요. 조만간 소리텔레콤에서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보안에 신경 써주시고요. 경쟁 업체는 광야커뮤니케이션, 루루미디어, 그리고 맥스기획 이렇게 세 곳입니다.”

AE의 브리핑이 끝난 후, 은비가 질문했다.

16551137532691.jpg“비딩 규모는요?”

16551137550079.jpg“ATL(방송광고), BTL(옥외광고) 합쳐서 3개월 50억입니다. 제작비랑 온라인은 별도라고 하고요.”

16551137550085.jpg“좋네요.”

가만히 듣고 있던 지헌이 미소를 띠고서 말했다. 회의실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지헌에게로 옮겨갔다. 그 와중에도 왠지 여전히 지헌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만 같아 정오는 괜스레 무안했다. 뭐가 좋아. 뭐가 그렇게 좋은데.

16551137550085.jpg“기대하겠습니다.”

기대해? 뭘 기대해. 왜 그런 부담스러운 얘길 날 보면서 해? 그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고 면밀히 관찰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 이 시선을 수상쩍게 여길까 하는 마음에 정오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16551137566093.jpg

  * 회사에 한 번 다녀올 때마다 1년씩 나이를 먹는 기분이다. 오후 9시가 훌쩍 넘어서야 정오는 집에 도착했다. 예나가 힘없이 현관문을 연 정오를 격하게 반겼다.

16551137566098.jpg“엄마아!”

16551137532696.jpg“예나 아직도 안 잤어?”

16551137566098.jpg“응! 엄마 기다렸지. 엄마 빨리 자자.”

예나가 정오를 잡아끌었다. 정오는 뒤이어 쫓아온 국순을 향해 활짝 웃어주고는 예나와 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16551137566098.jpg“엄마, 내가 이불 펴놨어.”

예나가 졸음이 서린 눈으로 말했다. 방에는 요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척척 할 줄 아는 딸이 기특했다.

16551137532696.jpg“잘했어, 공주님. 얼른 자자.”

정오는 예나를 얼른 재워야겠단 생각에 바로 누웠다. 정오를 꼭 끌어안은 예나가 냄새를 맡듯이 품 안에서 숨을 들이마셨다. 정오는 그런 예나의 머리를 곱게 쓸었다.

16551137532696.jpg“오늘도 도빈이 만났어?”

16551137566098.jpg“응. 근데 엄마 있잖아.”

16551137532696.jpg“응. 왜?”

16551137566098.jpg“박도빈 걔는 자꾸 나 따라다닌다. 귀찮아 죽겠어.”

예나가 고개를 반짝 들어 얼굴을 보여주며 말했다. 귀찮아 죽겠다고 하면서, 어둠 속에서도 입가엔 미소가 역력했다. 아유 귀여워. 이렇게 이쁘니 인기도 많고. 엄마도 아주 피곤하다니까. 예나는 정오가 살아가는 힘이었다.

16551137532696.jpg“오늘은 도빈이 바둑 가르쳐줬어?”

16551137566098.jpg“엄마, 바둑은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거지. 도빈이도 예나도 선생님한테 배우는 거야.”

16551137532696.jpg“그러네. 선생님한테 배우는 거네.”

예나의 정답에 정오는 동의하며 한숨을 쉬었다. 나도 인생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네. 문제가 생기면 정답을 알려주는 선생님이. 예나를 재우고 주방으로 나온 정오는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냈다. 손빨래를 마친 국순이 화장실에서 나와 정오를 흘겨보다가 정오의 눈앞에 마른오징어를 내놓았다. 후우우우, 좋아하는 안주를 눈앞에 두고서도 한숨이 짙어지는 밤.

16551137597495.jpg“그렇게 한숨 쉬어서 땅이 꺼지겠어?”

국순이 뚱하게 말을 걸었다.

16551137532696.jpg“엄마, 나 회사 때려치울까?”

16551137597495.jpg“그래. 때려치워.”

정오의 푸념에 국순은 쉽게 대답했다.

16551137597495.jpg“다 때려치우지 뭐. 엄마도 식당 때려치우고 ”

16551137532696.jpg“아니, 엄마가 왜 식당을 때려치워. 나랑 같이하면 되지.”

16551137597495.jpg“널 얻다 써먹어. 밥 하나 제대로 못 안치는 걸.”

국순이 따갑게 지적했다.

16551137597495.jpg“요리 솜씨라도 물려받았음 좀 좋아?”

16551137532696.jpg“엄마가 요리 잘할 필요 없다며. 나중에 손이 고생한다고.”

16551137597495.jpg“네가 시집살이를 할까 해서 한 말이었지. 그놈의 시집은 어떤 집구석인지 보여주지도 않을 줄 알았나.”

아뇨. 엄마는 그놈의 시집에 대해 모르는 게 나을 거예요.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했다 싶은지 국순의 말투는 금세 누그러졌다.

16551137597495.jpg“물려줄 게 없어서 팔자를 물려줬네. 내가.”

엄마에 이어, 이 집안의 2대 미혼모가 된 정오. 정오 역시 괜한 말을 했다 싶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그것을 미안해하는 엄마가 안쓰러웠다. 자신을 홀로 키운 엄마는 정오에게 태양이고 길이었다. 엄마야말로 인생의 선생님이었다. 어쩌다 보니 엄마와 같은 운명을 살게 되었지만 그건 절대 슬픔이 될 수 없다는 걸 정오는 제 삶으로서 증명해야 했다. 이정오는 이국순의 보물, 이국순의 자랑이니까.

16551137597495.jpg“왜. 회사가 별로야?”

국순이 걱정스레 물었다.

16551137532696.jpg“아니, 그냥 한번 해본 소리야.”

정오는 쉽게 내뱉은 말을 반성하며 웃어넘겼다. 회사가 별로냐고 묻는다면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지헌을 뺀 나머지는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 비해 모든 것이 월등히 나은 조건이었다. 정지헌. 그 하나가 너무나도 강력할 뿐. * 날이 점점 더워진다. 벌써부터 에어컨을 틀자니 긴 여름 내내 에어컨을 끼고 살게 될 것 같아서 진서는 선풍기를 꺼내왔다. 그녀의 두 아이들, 도빈과 도윤은 선풍기 앞에 앉아 노래를 불러댔다. 선풍기 날개에 부딪혀 이리저리 흩어진 아이들의 음성에 진서는 피식 웃었다. 손을 스륵 뻗어 도윤을 데려간 진서는 이를 잘 닦이고 얼굴을 깨끗이 씻겼다. 세 살짜리 꼬맹이 도윤을 씻기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도빈이다. 엄마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눈치 빠르게 파악한 도빈은 진서가 도윤을 데리고 들어간 사이에 몸을 감췄다.

1655113761231.jpg“박도빈. 빨리 나와. 씻어야지.”

16551137612317.jpg“어디 씻을 건데?”

장롱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진서는 장롱으로 다가갔다.

1655113761231.jpg“다 씻어야지. 이도 닦고 세수도 하고 손발도 씻고.”

16551137612317.jpg“세수만 하고 이는 안 닦으면 안 돼?”

1655113761231.jpg“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안 되지.”

활짝!

16551137612317.jpg“으아아아!”

진서가 장롱문을 여니 도빈이 진서를 뒤로 밀고서 도망쳤다. 씻기는 것도 힘든 일인데 거사를 치르기 전에 술래잡기까지 해야 한다. 다행히 오늘은 금방 잡혔다. 그러나 일곱 살이 되어 부쩍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아진 아들 녀석은 엄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겠다고 생떼를 썼다.

16551137612317.jpg“엄마, 오늘만. 한 번만. 한 번만.”

1655113761231.jpg“오늘만이 어딨어. 충치 벌레가 다 잡아먹어도 좋아?”

16551137612317.jpg“싫어! 싫어! 이는 안 닦을 거야아아.”

아들의 몸부림에 진서는 결국 한숨을 쉬며 손을 놓았다. 좋은 말로는 들어먹는 법이 없다. 진서는 결국 최후의 방법을 썼다. 전설의 고향도 저리 가라 할 만큼 목소리를 무섭게 깔고서.

1655113761231.jpg“너 이 닦을래, 엄마한테 맞을래.”

16551137612317.jpg“……맞을래.”

1655113761231.jpg“너 이리 와.”

16551137612317.jpg“으아아아아!”

1655113761231.jpg“왜! 맞겠다며 왜 도망을 가!”

두 번째 술래잡기가 시작되었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퇴근한 승규가 열받은 진서를 피해 안방으로 슬그머니 가서 옷을 정리했다. 도빈이 안방으로 쫓아와 승규의 뒤로 숨었다.

1655113761231.jpg“박도빈, 빨리 와. 안 와?”

16551137612317.jpg“아빠. 살려줘. 살려줘.”

1655113761231.jpg“좋은 말 할 때 빨리 와!”

16551137612317.jpg“그건 좋은 말이 아니잖아아.”

눈에 핏발이 선 부인을 보니 절로 겸손해지는 승규가 도빈을 타일렀다.

16551137642254.jpg“도빈아. 엄마 말씀 들어야지.”

16551137612317.jpg“싫어! 엄마가 때린댔단 말이야!”

도빈은 눈물까지 맺힌 눈으로 악을 써댔다. 그렇다고 물러나는 안진서가 아니다.

1655113761231.jpg“계속 그러다간 네 친구 예나한테 다 말해버리는 수가 있어. 박도빈 이도 안 닦고 엄청 더럽다고.”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16551137612317.jpg“엄마, 이 닦을게요.”

‘예나’라는 이름에 마법의 주문이라도 걸려 있는 듯이 돌연 도빈의 태도가 점잖아졌다. 다소곳이 진서의 손을 잡은 도빈은 제 발로 화장실에 걸어들어갔다. 승규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맙소사.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코딱지도 몰래 먹는 더러운 내 아들이 이럴 줄이야. 지친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온 진서에게, 승규가 긴하게 물었다.

16551137642254.jpg“예나가 누구야?”

뉘 댁의 어떤 분이신지, 찾아뵙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1655113761231.jpg“도빈이 바둑학원 친구야. 예쁘게 생겼더라. 엄청 똑똑하고 야무진가 봐. 원장 선생님도 엄청 칭찬하더라.”

16551137642254.jpg“오. 훌륭한 어린이네?”

1655113761231.jpg“응. 도빈이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16551137642254.jpg“그래. 친하게 지내야겠다.”

승규는 오랜만에 벅찬 설렘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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