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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건 키스가 아니라 (16/183)

16. 그건 키스가 아니라2021.06.23.

최근 들어 이토록 짜증이 난 적이 없었다. 할 말이 있다고 했던 이정오는 전화를 한다고 나가서는 말도 없이 퇴근해버리고. 자칭 절친이라는 박승규는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돌아서버렸고. 두 사람이나 마음을 괴롭히니 지헌은 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그래도 일은 해야겠기에 출근했다. 집무실로 이동하는 길에 잠시 발을 멈추고 멀리서 정오의 자리를 살폈다. 아직 출근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탕비실에서는 채은비와 그 동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지헌은 집무실로 이동했다.

16551138652806.jpg“이사님, 나오셨습니까.”

16551138652812.jpg“네.”

비서의 인사에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집무실 안으로 발을 옮겼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머리가 하도 아파서 몸을 누였다. 잠시 후, 집무실 밖에서 사뿐사뿐 발소리가 들렸다. 채은비일 거라고 생각한 지헌은 곧장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채은비와 한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사람이 소파에 누워 있으면 피곤한가 보다, 하고 곧장 돌아가는 것이 예의일 텐데, 여자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것이 못마땅하여 지헌의 미간에 미약하게 힘이 들어갔다. 다가온 걸음은 더욱 수상했다. 머리맡에 앉아 제 이곳저곳을 관찰하는 것만 같은 뜨거움이 느껴졌다.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숨소리가 왠지 그의 평안을 바라는 것만 같았다. 숨결이 닿은 피부가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손끝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상대를 마주하고 싶은 욕구가 피어올랐지만 눈을 뜨면 후회할 것만 같아 지헌은 꾹 참았다. 그런데, 제 입술 위로 무언가 뜨겁고 축축한 것이 톡, 하고 내려앉았다. 낙인처럼 뜨거운 것이 가만히 입술 사이로 스며들자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여자 또한 놀란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킨 여자가 급히 돌아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16551138652812.jpg‘내가 지금 뭐 하는 건지.’

지헌은 참지 못하고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이정오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 채은비인 줄 알고 얘기하기 싫어서 자는 척을 했는데, 이정오였을 줄이야.

16551138652812.jpg“어디 가.”

16551138652825.jpg“…….”

16551138652812.jpg“어딜 가, 이래 놓고.”

지헌은 날렵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16551138652825.jpg“어어어어……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요.”

그녀가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매번 창백했던 얼굴이 오늘은 잔뜩 붉어져 있었다. 지헌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발칙하게도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 뒷걸음질로 언젠가 문을 열고 도망가려고. 지헌은 성큼 더 먼저 걸음을 옮겨 출입문을 등지고 섰다. 통로가 막히자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당황한 모습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취향이었다. 인정하려니 자존심이 조금 상하지만.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닌, 확실한 취향이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닿고 싶어 마음과 몸이 동하는, 아주 확실한 취향이었다. 머지않아 몸에서 정한 한계를 넘을 것이다. 머리에서 경고를 보냈다. 이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되도록 같이 있을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될 일이고, 회사에서 내보내버릴 수도 있을 텐데, 지헌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주는 자극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되도록 더 가까이, 곁에 두고 싶었다. 실수를 해주었으면 했다. 그 실수 안으로 파고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기회도 놓칠 수 없었다.

16551138652812.jpg“크게 일 벌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책임질 거죠?”

16551138652825.jpg“네? 뭘요?”

16551138652812.jpg“…….”

16551138652825.jpg“무슨 말씀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서 대꾸했다. 그 맹랑한 반응에 지헌의 입술이 삐딱해졌다. 나도 우겨볼까.

16551138652812.jpg“그러게. 나도 모르겠네요.”

16551138652825.jpg“…….”

16551138652812.jpg“별일을 다 당해봤지만, 자다가 키스를 당한 건 또 처음이라.”

지헌이 제 입술을 엄지로 쓱 쓸며 사악하게 말했다. 지헌의 억지에 정오는 기가 막혔다. 아니 바보야? 눈물 한 방울 떨어진 거 가지고 키스는 무슨!

16551138652825.jpg“그건 키스가 아니라……!”

16551138652812.jpg“그래. 키스가 아니라 뽀뽀죠.”

그가 계속 억지를 부리니 정오도 실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6551138652825.jpg“……눈물입니다. 이사님.”

16551138652812.jpg“…….”

16551138652825.jpg“키스도 아니고 뽀뽀도 아니고 눈물 한 방울이 톡 하고 떨어진 겁니다.”

그의 미간이 커튼 주름처럼 우그러졌다.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가식이겠지만.

16551138652825.jpg“어떻게 그걸 오해하십니까. 뽀뽀도 안 해본 사람처럼.”

응큼한 놈. 누가 보면 진짜 뽀뽀도 못 해본 줄 알겠네.

16551138652812.jpg“그럼 왜요.”

16551138652825.jpg“네?”

16551138652812.jpg“왜. 내 앞에서 눈물 한 방울을 톡 하고 떨어뜨렸습니까.”

16551138652825.jpg“그건…….”

정오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16551138652825.jpg“이사님이…… 돌아가신 제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그의 표정이 좀 전보다 더욱 험악해졌다.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 후 가느스름해진 눈매로 두 발짝 다가왔다.

16551138652812.jpg“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16551138652825.jpg“사실인걸요.”

16551138652812.jpg“얼마나, 어떻게 닮았습니까.”

아, 젠장.

16551138652812.jpg“아버지 사진은?”

본 적도 없는 아버지를 팔아먹었다가 궁지에 몰렸다. 정오는 또다시 묘안을 짜내야 했다.

16551138652825.jpg‘잘생겼다는 말을 싫어한다고 했지?’

입사 첫날 미란이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16551138652825.jpg“그냥 잘생긴 게 닮았습니다. 아빠가 진짜 잘생겼거든요.”

자. 널 기분 나쁘게 했으니 노려봐. 어서 벌레 보듯이 쏘아보란 말이다. 비난해! 내쫓아버려! 어서 내치라고! 그러나 정오의 기대와 달리 그는 아무 말 없이 한 걸음 물러났다. 스스로 화를 식히려는지, 일자로 다문 입술 사이로 길게 한번 거친 숨이 빠져나갔다. 어쨌든 임기응변이 잘 통한 것 같았다. 정오는 천천히 둥그렇게 반원을 그리며 발을 옮겼다. 겨우겨우 출입문 손잡이를 잡도록 그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당신도 나에게 본모습을 숨겼던 거잖아. 나는 장장 7년을 몰랐다고. 당신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정오는 등 뒤로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16551138652825.jpg“이만 가보겠습니다.”

16551138652812.jpg“어제 할 말 있다고 했었잖아요.”

잠자코 있던 그가 그녀를 막으려는 것처럼 다시 말을 걸어왔다.

16551138652825.jpg“아, 그건…….”

16551138652812.jpg“…….”

16551138652825.jpg“이사님이 돌아가신 제 아버지를 닮았다는 거였습니다. 그럼 정말 가보겠습니다.”

됐지? 끼익. 이제 문도 빼꼼 열었는데. 그가 미련스럽게 또 한마디를 보탰다.

16551138652812.jpg“30분 기다렸습니다. 어제.”

16551138652825.jpg“겨우 30분 기다리셨어요?”

준비하지 않았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내뱉고 나서 아찔해졌다. 하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주워담을 수도 없기에, 정오는 급히 제 행동을 합리화했다. 나는 무서울 게 없어. 막 나갈 거야. 나는 당신의 7년 전 스캔들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16551138652825.jpg‘물론 내가 그 스캔들의 당사자이긴 하지만.’

정오는 그 말을 끝으로 냉큼 줄행랑쳤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겠지. 당신이 30분 기다렸다고 하면, 죄송하다고, 앞으로는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빌 줄 알았겠지. 그렇게 말대꾸를 해버렸으니 뭐 이런 정신 나간 애가 있나 싶을 거야. 하지만 그것이 정오의 속마음, 진심이긴 했다.

16551138652825.jpg‘나는 당신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었는데, 겨우 30분 갖고 뭘.’

그렇게 합리화했지만 가슴은 계속 콩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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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 오후, 은비는 지헌의 비서가 제작 2팀 앞에 기웃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제작 2팀은 모두 회의 중이라 아무도 없을 때였다.

16551138770683.jpg“애라 씨, 무슨 일이에요?”

16551138652806.jpg“아, 네, 과장님. 메모 남길 게 있어서요.”

윤애라 비서가 남기는 메모라면 지헌의 전언일 터였다. 처음에 은비는 비서가 미란에게 메모를 남기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비서는 들고 있던 메모지를 정오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16551138770683.jpg‘오빠가 왜 이정오한테?’

비서가 떠난 후, 은비는 냉큼 일어나 정오의 자리로 갔다. 책상 한가운데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 5/13 18:00 정지헌 이사님 호출.

16551138770683.jpg‘왜?’

메모지를 움켜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손에 쥔 메모지처럼 그녀의 표정도 험악하게 구겨졌다. 은비는 메모지를 더 꽉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아침, 제작 2팀을 주시하고 있던 은비는 정오가 지헌의 집무실에서 나와 자리에 앉자마자 제자리로 불러들였다.

16551138770683.jpg“이정오 대리.”

16551138652825.jpg“네. 과장님.”

16551138770683.jpg“잠깐만 와볼래요?”

정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비에게로 갔다. 마음 같아선 할 말 있으면 네가 와라, 하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16551138652825.jpg“네. 과장님. 무슨 일이세요?”

16551138770683.jpg“어제는 어디 갔었어요?”

16551138652825.jpg“급한 일이 생겨서 조퇴했습니다.”

16551138770683.jpg“본인만 급한 일 있는 건 아닌데. 다들 바쁜 사람들이에요. 알죠?”

16551138652825.jpg“네. 과장님께 따로 연락을 못 해서 죄송해요.”

또 뭐 씹은 표정이라고 할까 봐 정오는 입술 끝을 한껏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정오의 웃는 얼굴이 뭐가 그리 맘에 안 드는지 이번엔 은비가 뭐 씹은 표정으로 보였다.

16551138770683.jpg“그저께 회의 끝나고 역대 광고 스터디 역할 분담했잖아요. 이 대리 분량, 어제 저 포함해서 다른 팀원들이 대신하느라 애먹었거든요.”

은비가 제 책상 위의 문서 자료를 손끝으로 톡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어절의 앞머리마다 은근하게 강조점을 두어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이 중요한 것처럼 포장했다.

16551138652825.jpg“했는데요, 과장님.”

이렇게 나온다면야 정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6551138652825.jpg“제 분량은 그제 회의 후에 바로 정리해서 클라우드에 올렸습니다.”

정오는 은비가 톡톡 짚은 자료를 넘겨 보았다. 아주 우습게도, 표지만 제외하고 그 안의 내용은 정오가 작성한 그대로였다. 사기를 치려면 좀 정성껏 치셔야지.

16551138652825.jpg“과장님께서 보시는 자료도 제가 한 건데요. 팀원들이 새로 한 게 아니라. 과장님 내용 제대로 확인하셨어요?”

은비는 얼어붙었다. 어젯밤, 정오가 회의실에 나타나지 않아 일 처리도 똑바로 하지 못하고 조퇴를 했다고 속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팀원이 프린트해 온 자료가 정오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거기다가 정지헌마저 정오를 찾아 메모까지 남겨 심기가 불편했다. 이쯤에서 이정오가 깨갱해줘야 하는 건데. 은비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기며 응수했다.

16551138770683.jpg“그런 건 메일로 보냈어야죠. 그래야 제대로 확인을 하죠.”

16551138652825.jpg“그저께 회의에서는 PT 준비용 클라우드에 업로드하기로 했잖아요, 과장님. 회의록 확인해보시면 되는데요.”

정오는 그런 은비가 우스웠다.

16551138652825.jpg“다른 분들은 다 제대로 확인하신 것 같은데. 어쨌든 앞으로는 더 신경 쓰겠습니다. 과장님께서 제대로 확인 못 하시고 놓치는 부분 없도록요.”

채은비야. 이제는 네가 나의 학교생활을 망가뜨린 그때처럼 당하지 않을 거야. 나는 여기서 할 일이 아주 많거든. 돈도 벌어야 하고 우리 예나도 제 아빠와 만나게 해주어야 하니까. 그렇다고 너의 남자를 빼앗을 생각은 없어. 하지만 네가 나를 위협한다면 그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날 괴롭히지 마. 내 일터를 망가뜨리려 하지 마. 나를 지키는 것은 딸을 지키는 것. 적을 무찔러 나를 지키리라. 채은비, 너도 마찬가지다. 나를 모함한다면 너도 나의 적이다. 나를 가로막는 것들은 모두 나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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