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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빠 없는데요 (18/183)

18. 아빠 없는데요2021.06.30.

이마를 덮은 앞머리, 뽀얀 얼굴, 동그란 눈, 말할 때마다 야무지게 움직이는 도톰한 입술. 인형인가 착각할 만큼 어여쁜 아이였다. 여자아이가 도빈의 동생 도윤이 갖고 놀던 인형을 들어 보이며 도빈에게 말했다.

16551139208966.jpg“이쁘다.”

16551139208972.jpg“네가 더 이뻐.”

16551139208966.jpg“나도 알아.”

요즘 애들은 이렇구나. 지헌은 방해하지 않으려 숨소리를 죽였다. 승규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도빈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쩐지 여자아이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뭐라 시원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요 며칠 계속 떠오르는 얼굴과 묘하게 겹쳐졌다. 첫눈에 반하려면 저렇게 생겨야 하는 건가? 그저 이정오는 첫눈에 반하기 쉬운 얼굴인 건가? 아니면, 그저, 예쁘면 다 이정오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된 건가? 빤히 쳐다보니 여자아이도 지헌을 바라보았다. 지헌은 아이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진서는 우왕좌왕하며 연거푸 통화버튼을 눌렀다.

16551139209029.jpg“여보세요. 여보 어디야아?”

몇 번의 시도 끝에 통화가 연결된 모양이었다.

16551139209029.jpg“일찍 퇴근했다며 왜 거기 있는데, 지금 집에 지헌 씨 와 있어.”

진서는 휴대폰을 들고는 재빨리 안방으로 향했다.

16551139209029.jpg“정지헌 씨 말이야, 정지헌 이사님!”

안방에서도 진서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쉼표마다 한 톤씩 높아지는 진서의 음성에 지헌은 눈치를 보게 됐다. 주차장에 가 있어야겠네. 거실까지 들어왔던 지헌은 발을 돌렸다. 현관에 이르렀을 때, 도빈이 지헌을 붙잡았다.

16551139208972.jpg“삼촌 바둑 할 줄 알아요?”

16551139209047.jpg“어…… 그냥 뭐…….”

16551139208972.jpg“삼촌 저랑 바둑 해요.”

지헌이 제대로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도빈은 지헌의 손을 붙잡아 이끌었다. 지헌은 얼결에 끌려갔다. 지헌의 손을 꼭 붙들고 바둑판까지 간 도빈이 예나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지헌에게 슬그머니 말했다.

16551139208972.jpg“삼촌이 져줬으면 좋겠어요.”

여자친구 앞에서 멋지게 보이고 싶은 남자의 욕망. 집 밖으로 나가려던 지헌은 난처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친구의 아들에게 점수를 따야 하는 입장이었다.

16551139209047.jpg“바둑 둘 줄은 알고?”

16551139208972.jpg“네. 학원에서 배웠어요.”

도빈이 든든하게 바둑판과 바둑알통을 들어 옮기며 대답했다. 거실 테이블 위에 바둑판이 놓였다.

16551139208972.jpg“예나야, 봐봐. 내가 바둑 하는 거 보여줄게.”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예나가 다가왔다. 두 남자는 테이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예나도 도빈의 옆에 앉았다.

16551139208972.jpg“삼촌이 먼저 해요.”

도빈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며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지헌은 바둑판을 바라보고 있던 눈을 들어 도빈을 쳐다보았다.

16551139208966.jpg“아니지. 흑이 먼저 하는 거지.”

지켜보고 있던 예나가 참견했다.

16551139208972.jpg“아아, 나도 알지.”

예나의 말에 도빈이 흑돌을 판 위에 올렸다. 지헌도 그 옆에 백돌을 올렸다. 그다음, 도빈의 두 번째 수는 조금 엉뚱했다. 그제야 지헌은 살짝 웃었다. 바둑 둘 줄 안다고 하더니. 정말 딱, 바둑판 위에 돌을 두는 법만 아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두든 아이들은 알아보지 못할 테니, 그냥 대충 오목 비슷하게 놀아주고 네가 이겼다, 말해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헌은 의외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6551139208966.jpg“아니지, 아니지. 여기다 둬야지. 여기 두면 활로를 못 막잖아.”

답답해진 여자아이가 도빈의 옆에서 부지런히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도빈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을 텐데…….

16551139208966.jpg“에이, 봐봐. 여기에 딱 두는 거야. 그럼 아저씨는 여기다 둔다고. 그럼 너는 여기 두는 거고.”

여자아이는 제법 정확하게 수를 읽을 줄도 알았다. ……일곱 살이 이럴 수도 있나? 아니, 일곱 살이 아닌가? 지헌도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아이들을 얕잡아 보아 아무렇게나 두었던 제 수들이 악수가 된 것이다.

16551139209047.jpg“그럼 내가 이걸 여기다 두면?”

지헌이 의외의 자리에 백돌을 두며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수를 두었다. 몇 수 뒤에, 지헌이 공략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아이는 똘똘한 것을 넘어 신통했다. 아무래도 영재인 것 같았다. 대국은 어느새 예나와 지헌의 것이 되었다. 지헌도 어느새 친구를 기다리는 일을 잊고 바둑에 집중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바둑을 둘 때는 제약이 많았다. 아버지는 감정을 누르기 위한 도구로 바둑을 이용했다. 표정의 변화로 수를 읽히지 말라고도 하셨다. 그래서 바둑을 둘 때는 항상 긴장했었는데…….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아이의 표정을 감상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골똘히 수를 생각하는 동안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아이. 어른의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오로지 바둑에만 집중하는 아이. 자신이 어렸을 때 누리지 못한 것들, 그 상쾌한 재미를 온전히 누리고 있는 꼬마 아이. 그런 순수한 아이와 마주하니 그 또한 오랜만에 바둑이 즐거웠다. 지헌은 처음으로 바둑의 결과를 고민했다. 간발의 차이로 져줄까, 간발의 차이로 이겨줄까? 도빈의 부탁대로라면 져 주는 것이 좋은 일이겠으나 어쩐지, 이겨주는 것도 이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진서가 다가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51139209029.jpg“우리 예나 정말 잘하죠! 아주 기특하고 이뻐 죽겠어.”

진서가 팬심으로 눈을 빛냈다. 지헌의 입술 끝도 슬며시 올라갔다.

16551139266689.jpg“엄마, 응가.”

그 와중에 네 살 도윤이 진서의 다리를 붙잡고서 말했다. 진서와 도윤이 떠난 후, 조용한 가운데 지헌이 예나에게 말을 건넸다.

16551139209047.jpg“네 이름이 예나야?”

16551139208966.jpg“네.”

16551139209047.jpg“바둑은 누구한테 배웠어?”

16551139208966.jpg“선생님이요.”

16551139209047.jpg“아빠 말고 선생님?”

16551139208966.jpg“……아빠 없는데요.”

예나가 잠시 주춤하다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지헌은 움찔했다.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도빈이 해맑게 예나에게 물었다.

16551139208972.jpg“그럼 우리 아빠 줄까?”

16551139208966.jpg“아니. 괜찮아.”

으흠, 으흠, 아이들의 쿨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지헌은 몇 번 헛기침했다. 때마침 구세주 승규가 도착했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승규는 뚱한 표정이었다.

16551139266724.jpg“……웬일이야?”

16551139209047.jpg“너 만나려고 왔지.”

지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헀다. 아이들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16551139209047.jpg“아저씨는 그만해야겠다. 이제 둘이 놀아.”

무안해서 얼른 떠나고 싶은데, 예나가 고개를 반짝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16551139208966.jpg“아저씨 언제 또 와요?”

16551139209047.jpg“왜?”

16551139208966.jpg“재미있어서요.”

아빠 얘기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인 것 같았다.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지헌은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16551139208966.jpg“다음 주 월요일에 또 오면 만날 수 있어요?”

16551139209047.jpg“그때는 일이 있어.”

16551139208966.jpg“그다음 주 월요일은요?”

16551139209047.jpg“그때도 일이 있는데.”

16551139208966.jpg“그럼 그다음 주 월요일은요?”

계속 거절하면 언젠가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지고 말 것만 같았다.

16551139208966.jpg“또 해요. 바둑.”

아이는 조르고, 도빈과 승규는 지헌의 답변을 기다리고.

16551139209047.jpg“그래.”

그리하여 지헌은 무모한 기약을 하고야 말았다. 3주 후의 월요일. 아마 아이는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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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헌과 승규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16551139266724.jpg“오래는 못 있어. 와이프가 에어컨 청소하라고 해서.”

먼저 찾아와 놓고서, 자신을 만나러 왔다고 말하고서 입술을 꾹 붙이고 있는 지헌을 보고는 승규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지헌이 여전히 미워서 그리 말한 건 아니었다. 재촉하지 않으면 영 말문을 열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승규는 여전히 지헌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둘 사이가 더 심하게 망가졌더라도 지헌을 미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승규는 지헌이 늘 안타까웠다.

16551139266724.jpg‘7년 전엔 괜찮았는데.’

7년 전 제대 이후, 녀석의 눈이 반짝이던 때가 있었다. 이제 녀석이 좀 정신을 차렸나 보다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7년 전의 사고로 소중한 친구는 다시 퇴보했다. 누군가는 그가 다 나았다고, 이제 멀쩡하다고 하지만 승규는 생각이 달랐다. 7년 전. 친구에게 그토록 끔찍했던 그 겨울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만 같았다. 겉으로는 멋지고 멀쩡해 보이지만 그 내면의 무언가는 심하게 뒤틀려 있는 친구. 바로잡아주고 싶지만 승규는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

16551139209047.jpg“미안하다.”

16551139266724.jpg“뭐가 미안한데.”

16551139209047.jpg“너한테 심하게 말한 거.”

16551139266724.jpg“정말 내가 네 어머니 편이라고 생각해?”

16551139209047.jpg“아니. 안 그래.”

16551139266724.jpg“흥.”

16551139209047.jpg“정말이야.”

16551139266724.jpg“그래. 그건 너무 서운하다!”

승규는 코를 벌름거리며 속을 털어놓았다.

16551139266724.jpg“내가 네 어머니 편이었다면 진작에 너랑 채은비 과장 사이에 대해 일러바쳤겠지.”

승규가 가슴 깊이 서린 한을 꺼내놓자 지헌도 그제야 깨달은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16551139266724.jpg“감정이란 게 꼭 전부여야만 확실한 것 같지? 아니야. 그저 일부라도 충분히 망가질 수 있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어. 도윤이가 손톱 요만큼 깨졌다고 펑펑 우는 것처럼.”

16551139209047.jpg“…….”

16551139266724.jpg“넌 내 인생의 일부야. 전부는 아니지만 정확한 일부라고.”

이제 승규는 거의 울먹거렸다. 갈등이 터진 목요일 저녁부터 한 시간 전까지 승규는 내내 가슴 아프고 우울했다. 친구가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16551139266724.jpg“너는 그래. 그래서 네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

너의 겨울이 끝나길 바라. 잠잠히 듣고 있던 지헌의 입술 끝이 고요히 늘어났다.

16551139266724.jpg“찾아와줘서 고맙다. 나도 심하게 말해서 미안하고.”

실은 지헌이 먼저 찾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승규는 모든 섭섭한 마음을 지울 수 있었다.

16551139266724.jpg“그런데 어떻게 집까지 찾아올 생각을 했냐?”

16551139209047.jpg“…….”

16551139266724.jpg“내가 소중해서?”

16551139209047.jpg“그래.”

지헌은 웃고 말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누군가의 조언 때문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친구는 놀릴 것이 뻔했으므로. * 야근을 마친 후, 정오는 서둘러 집으로 갔다. 집 앞에 예나와 진서, 도빈이 서 있었다. 예나는 크게 정오를 부르며 뛰어와 정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16551139208966.jpg“엄마아!”

도빈도 살갑게 인사했다.

16551139208972.jpg“이모, 안녕하세요!”

다들 표정이 밝아 보여 다행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오는 미안한 마음을 거둘 수가 없었다.

16551139387537.jpg“제가 데리러 가도 되는데. 죄송해요.”

16551139209029.jpg“아니에요. 오늘 예나 잘 놀았어요. 밥도 다 먹었고요. 예나가 오니까 우리 애들도 다들 말도 잘 듣고.”

흡족한 얼굴로 말을 이어가던 진서가 멈칫 표정을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16551139209029.jpg“아, 그리고 말씀드릴 게 있는데. 남편 회사 친구가 집에 찾아와서 잠깐 같이 있었어요. 왔다가 금방 나가긴 했는데…….”

진서는 정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정오는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16551139209029.jpg“가뜩이나 걱정스러우실 텐데, 갑자기 손님이 와서, 죄송해요.”

그 정도 융통성은 있다. 정오는 다른 오해를 하지 않도록 먼저 말해준 진서에게 고마웠다.

16551139387537.jpg“아니에요. 괜찮아요. 손님이 두 팀이나 있어서 힘드셨겠어요.”

16551139209029.jpg“힘들진 않았어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16551139387537.jpg“예나 봐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오늘 먼저 연락 주시고 사진 보내주신 것도 감사해요.”

정오는 거듭 인사했다. 예나 덕분에 좋은 인연을 만난 것 같았다. 함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길. 예나는 연신 싱글벙글 행복한 표정이었다. 정오가 정답게 물었다.

16551139387537.jpg“그렇게 재미있었어?”

16551139208966.jpg“응.”

16551139387537.jpg“뭐가 재미있었어?”

16551139208966.jpg“비밀이야.”

16551139387537.jpg“엄마한테 비밀이라고?”

16551139208966.jpg“엄마, 나 다음 다음 다음 주에 또 가기로 했어. 월요일에.”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새침데기 딸은 당당하게 통보했다.

16551139208966.jpg“도빈이네 또 가도 되지?”

선 결정, 후 허락. 정오는 7년 전의 정지헌을 보는 것 같아 헛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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