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절대 안 놔줘2021.07.03.
문제 하나가 해결되니 지헌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화요일 오후. 일정 하나를 소화하고 집무실로 가는 길, 지헌은 제작팀 쪽을 흘깃 살펴보았다. 제작 2팀의 자리가 모두 비어 있었다. 지헌은 잠깐 짬이 난 김에 주류 광고 제작 회의가 열린다는 회의실을 찾았다. 회의실 밖에서부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리님은 보면, 손에서 노트를 놓지 않으시는데 혹시 일상의 모든 걸 기록하세요?”
“아니, 쓸만한 건 별로 없어. 그냥 계속 생각해보는 거지.”
“대리님은 제가 만난 카피라이터 중의 최고예요. 인정, 인정.”
“기훈 씨는 내가 뭐만 하면 자꾸 인정하더라.”
“인정할 게 너무 많아요.”
송기훈 사원과 이정오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회의실 끝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하던 대화를 멈춘 기훈이 씩씩하게 인사했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정오는 고개만 까딱 숙였다.
“회의는 언제 시작하죠?”
“10분 남았습니다.”
“송기훈 씨, 지난주 회의록 프린트 좀 부탁합니다.”
“네.”
기훈이 일어나서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지헌과 정오 두 사람만 남은 회의실. 싸한 정적이 찾아왔다. 기훈과는 그토록 활발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여자가 자신의 앞에서는 입술을 꾹 붙이고 있으니 지헌은 착잡했다. 예나라고 했던가. 아래로 시선을 내린 모습이 어제의 그 똑똑한 아이를 떠오르게 했다. 그 아이도 아빠가 없다고 했는데. 자신이 공감할 수 없는 처지에 대해 지헌은 처음으로 오래 생각해보았다. 그녀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긴 한데, 딱히 무얼 해주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일말의 트집이라도 있다면 활용해야지. 이정오의 아빠가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연결고리가 그것뿐이라면, 아무렴 상관없지 않나 생각했다. 지헌이 조용히 말했다.
“아빠가 보고 싶으면 와요.”
“네?”
“내가 아버지랑 닮았다면서. 나라도 괜찮으면 와서 보라고.”
“이사님을요?”
정오는 미간을 독하게 좁히고서 거듭 물었다.
“이사님 얼굴을요?”
미쳤나요? 지금 이 자리도 거북해 죽겠는데 내가 왜 너를 보러 가나요?
“싫습니까? 나는 이 대리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얘기한 건데.”
하지만 이 남자는 진지했다. 아무래도 ‘아빠’란 말에 꽂힌 모양인데. 어쨌든 그의 측근들을 파악해보아야 하니 그의 제안이 도움될 것 같기도 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뜨뜻미지근한 감사 인사에 미소가 보일락말락 그의 입술이 길어졌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회의실을 떠났다. 잠시 후 회의실로 돌아온 기훈이 정오 혼자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 물었다.
“이사님은요?”
“갔어.”
“회의록 프린트해달라고 하시고요?”
“그러게.”
기훈이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팀원들이 모두 회의실에 모였다. 어쩌다 보니 또 정오는 은비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정오와 눈이 마주친 은비가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AE의 개괄적인 설명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광고주가 타깃과 콘셉트를 설정해주었기 때문에 지난주에 바로 제작 의뢰를 드리게 됐습니다. 추가로 올린 제품 스펙이랑 경쟁사 분석 자료도 모두 확인하셨죠? 오늘은 아이디어를 공유했으면 좋겠고요, 의견이 모이면 기획 쪽에서도 기획서를 손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모든 것은 시작이 어려운 법이다. 첫 타자로 까이길 원하지 않는 팀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이때 문이 열리고 지헌이 다시 회의실로 들어왔다. 회의실은 넓은데, 빈자리도 참 많은데, 지헌은 앞자리에 앉지 않고 굳이 뒷자리로 향했다. 그의 선택은 정오의 옆자리였다. 은비의 앞자리이기도 했다. 정오는 꽉 긴장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지만 은비는 지헌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살포시 웃었다.
“제가 먼저 할까요?”
기운이 생긴 은비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20~30대가, 몸은 가장 팔팔한데 정신적으로는 많이 지쳐 있는 때잖아요.”
지헌은 웬일인지 산만했다. 은비의 발표를 들으며 다리를 움직이다가 정오의 무릎을 건드렸고, 정오가 제 의자를 조금 옆으로 빼니 이번엔 들고 있는 펜을 깔딱거렸다. 이 산만한 모습은 묘한 마법 같았다. 다른 팀원들은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정오만 계속 신경이 쓰였다.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남이 시키는 걸 먼저 해야 하고, 직장에서 깨지고, 퇴근길 지하철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공원에서 지나친 커플은 너무 뜨거워 보여서 부럽고…….”
툭. 기어이, 지헌은 들고 있던 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은비의 시선도 잠깐 지헌 쪽에 머물렀다. 펜은 테이블 아래, 정오의 자리 가까이로 떨어졌다. 그토록 산만하던 양반이 펜을 바닥에 떨어뜨린 후에는 고요해졌다. 정오는 기가 막혔다. 이 자식. 일부러 떨어뜨렸어. 나보고 주우라고.
“……그런 청춘이 지친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밥보다 빨리 찾는 게 냉장고 안의 맥주인 거죠.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 아, 이 맛에 일하지. 이런 기분이 들도록요.”
체념한 정오가 자리에서 몸을 내려 펜 가까이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큼지막한 그림자가 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을 덮었다.
‘헉!’
둘 다 같은 데에 손을 뻗다가 닿게 된 모양새였지만, 제 손을 덮친 체온이 뜨거워서 정오는 움찔하며 손을 뺐다. 지헌은 무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서 바닥에 떨어진 펜을 주워갔다. 정오도 자리로 돌아왔다.
‘이것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채은비가 지금 저기 버젓이 앉아 있는데.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말도 못 하게 울렁거렸다. 누군가에게 제 소리가 닿을까 초조할 정도였다. 설레서는 아닐 것이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나쁜 짓을 한 것만 같았다. 정작 일을 저지른 이 남자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앉아 있는데. 정오도 다시 회의에 집중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메인 카피는 두 가지 생각했는데요, ‘솔로는 맥주가 필요해’랑, ‘이 맛이 청춘이다’입니다. 키워드는 힐링이고요. 이상입니다.”
은비의 의견에 제작 1팀 몇몇이 박수 쳤다. 은비도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미란이 가장 먼저 평했다.
“좋네요. 그런데 좀 평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들어요. 청춘이 힘들다는 건 온갖 콘텐츠에서 너무 많이 나왔잖아요. 그리고 채 과장 방향은 키워드가 힐링인데, 힐링은 너무 고요한 느낌이긴 해요.”
미란의 의견에 은비의 미소가 조금 풀렸다. 영광도 의견을 덧붙였다.
”사실 시청각적인 문제도 있어요. 기존의 맥주 광고는 일단 젊은이들로 꽉 찬 시끌벅적한 주점이 나오고요, 거기서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면서 캬! 하는 모델이 나오죠. 이걸 깨는 게 과연 좋을까요? 모험 아닐까요?”
뒤이어 정오가 손을 들었다. 이제 정오의 차례였다.
“저는 그 광고의 포인트는 모델이 맥주를 꿀꺽 마시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젊은이들로 가득한 시끌벅적한 주점은 TV를 통해 보는 거죠. 시끄러운 주점인가? 생각했지만 점점 볼륨이 줄고, 광고에는 맥주를 꿀꺽, 꿀꺽 마시는 소리만 가득 차는 거예요. 거실에서 혼자 영화 보면서 편히 맥주를 마시는 거죠. 나는 혼자 있는 이 시간을 최고로 즐기고 있어, 그런 느낌으로요. 그리고 우리 제품의 특장점을 최대한 보여주는 장면으로 마무리하는 거죠.”
“괜찮은데요? 요즘 페이크 광고도 많죠. 이게 식품 광고인 줄 알았는데 휴대폰 광고고, 아파트 광고인 줄 알았는데 에어컨 광고고요.”
AE가 정오의 의견에 반응을 보였다. 정오의 의견에 힘이 실리니 은비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하지만 페이크 광고를 광고주가 좋아할까요? 광고 시간 15초도 짧은데 거기다 전반 5초는 딴 광고처럼 보이게 해서 시간을 낭비한다면 반발이 심할 것 같은데요.”
“더 파워풀한 10초를 준비한다면 가능하겠죠? 사람들은 반전에 열광하니까요. 그리고, 모델을 솔로로 한정 짓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타깃을 너무 줄이는 느낌이 들어서요.”
정오가 바로 응수했다. 미란이 끄덕였다.
“하긴, 커플이어도 외로운 사람이 있는 반면, 혼자 있어도 마음이 충만한 사람이 있으니까.”
“네. 고객이 혼자서 술을 마시는 그 시간이 슬프거나 처량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빛이 났으면 해요.”
정오의 의견에 힘껏 끄덕인 AE는 제 노트에 정오가 한 말을 메모했다. 잠시 후 기훈도 의견을 내놓았다.
“솔로 얘기가 나왔는데, 커플은 어떨까요? 콘셉트가 ‘쟁여두고 혼자 마시는 술’이니까, 혼자 있을 때 마시면서 계속 애인 생각을 하는 거예요. 좋은 건 사랑하는 사람한테 꼭 맛보여주고 싶잖아요.”
“기훈 씨 솔로 맞아? 완전 커플 마인드인데?”
1팀의 팀장이 기훈을 놀렸다. 다들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법 화기애애한 회의였다. 쓸만한 아이디어가 많이 나와서 회의도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오늘 나온 아이디어 모두 괜찮네요. 세일즈 포인트가 제품에 맞춰지도록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켜보면 좋겠습니다.”
지헌의 총평에 직원들도 모두 흡족해했다. 사실 직원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간 시베리아 벌판처럼 싸늘한 모습만 보여주었던 정지헌 이사가 이렇게나 미소 지어준 것만으로 제대로 대우를 받은 기분이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사람이 성큼 가까워진 느낌이기도 했다. 물론 정오는 휩쓸리지 않는다. 정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리를 정리했다. 어서 회의실을 떠나고 싶었다. 정지헌은 오늘따라 왜 그렇게 느릿하게 움직이는 걸까. 한편 오늘 회의로 지헌과 가까워졌단 생각에 용기를 얻은 조시내 대리가 지헌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이사님도 맛있는 술을 마시면 사랑하는 사람한테 맛보여주고 싶으세요? 혼자 있을 때도 계속 생각나고요?”
은비를 염두에 둔 것이 뻔히 보이는 질문. 정오는 몰래 콧방귀를 뀌었다. 과연 정지헌이 대답을 할까? 과연.
“혼자 있지 않겠죠.”
그런데 의외였다. 정지헌이 대답한 것이다.
“옆에 둬야죠. 절대 안 놔주지.”
꺄악. 제작 1팀 여직원들이 자그마하게 환성을 질렀다. 정오는 곧장 회의실을 나왔다. 지헌의 눈빛이 내내 누굴 향하고 있었는지, 그녀는 확인하지 못했다. * 회의가 끝난 후, 은비는 계속 심기가 불편했다. 정지헌이 이상하다. 정지헌은 자신에게 그렇게 웃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로봇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뻣뻣한 사람이었다. 최근 몇 년간 자신이 그의 가장 가까운 여자였단 걸 확신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은비는 한 번도 지헌의 우스갯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애정이 필요한 농담은 더욱 그랬다. 그런 정지헌이, 오늘, 난데없이 회의에 참석하여 웃고 농담했다. 기분 탓일까? 이정오가 나타난 후 정지헌은 이상해졌다. 휴게실에서 마주쳤을 때의 그 기류도 의심스러웠고, 그가 이정오를 찾아 메모를 남겼다는 것도 이상했다. 오늘 회의에서 제 옆자리를 두고 이정오의 옆에 앉은 것도. 무엇보다도, 자신이 발표를 할 때 두 사람이 갑자기 테이블 아래로 사라진 건 너무나도 이상했다. 지헌이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려서 그런 것 같긴 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지헌은 그래선 안 되는 사람인데. 성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여자를 멀리하던 사람인데. 은비는 갑작스럽게 초조해졌다. 지헌은 어떤지 몰라도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의 딱딱한 태도에 언젠가는 단념하게 될 줄 알았던 마음은 이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가 긴 생머리를 좋아하는 것 같아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고, 그와 한마디라도 더 나눠보기 위해 경영이론서를 읽었다. 그의 부모님에게는 또 얼마나 잘했는가. 제 부모님에게 하는 것의 곱절로 그의 부모님에게 정성을 쏟았다. 투자해온 시간과 정성이 그녀를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다른 길이 없는데.
“과장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화장실 세면대 옆에 기대 시름에 잠겨 있는 은비를 발견한 조시내 대리가 물었다.
“아니야…….”
은비는 말끝을 흐리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무슨 일이신데요. 저한테만 말씀해보세요.”
“하아…….”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은비는 못 이기는 척 운을 떼었다.
“……그럼 자기만 알고 있어야 해. 이거 비밀이야. 알겠지?”
“네! 그럼요.”
조시내 대리는 기꺼이 휘말려주었다. 은비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2팀의 이정오 대리 말이야.”
“새로 온 카피라이터요? 왜요?”
“사실 내 고등학교 동창이거든.”
“오, 정말요? 두 분 서로 존댓말 쓰잖아요.”
“회사에서 아는 척하지 말라고 하더라. 내가 불편하긴 하겠지. 근데 나도 썩 마음이 좋지가 않네.”
“아아. 그 기류가 그거였구나. 이정오 대리가 의외로 사납더라고요. 특히 과장님한텐 더 그런 거, 저도 느꼈어요.”
“그렇지. 남들도 느낄 수밖에 없어.”
“…….”
“사실 이정오 대리 어머니를 알고 있거든.”
“오오! 가족끼리 친한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정오 대리 어머니가 나 때 고등학교에서 식당 일을 하셨어. 그때 좀 안 좋은 사건이 있어서 그만두셨고.”
“무슨 사건이요?”
“학교 음식을 빼돌리고 그랬었나 봐.”
“어머, 어머, 어머, 어머!”
시내가 호들갑스럽게 소리를 높였다. 은비는 속으로 웃었다.
“원래 집안이 좀 어려운 친구야. 그래서 나도 잘해주려고 했었지. 그런데 가까이 지내니까…….”
“왜요? 어땠는데요?”
“왜 그런 부류 알지? 남의 것이 무작정 좋아 보여서 따라 하는 애들 있잖아.”
“알죠, 알죠! 저도 입시학원 다닐 때 계속 저 따라서 그리는 애가 있어서 얼마나 짜증 났는지 몰라요. 얼마 전에 얘기 들었는데 글쎄 그 친구가 불륜으로 회사에서 쫓겨났다지 뭐예요.”
물론 은비도 알고 있는 얘기였다. 조시내 대리가 예전에 몇 번이나 말한 적이 있으므로. 정작 시내는 너무 많이 말을 하고 다녀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제 버릇 남 못 주고, 사람은 떡잎부터 알아보는 거라고, 그때부터 싹이 있었던 거죠, 걔는.”
“그 얘기 들으니까 왠지 더 싱숭생숭하네. 사실 정오가 우리 지헌 오빠 자주 찾아가거든.”
“왜 찾아가요?”
“그거야 모르지. 그냥, 상담할 게 많은가 봐. 근데 좀 껄끄럽긴 하네.”
은비가 다시 한숨을 푸욱 쉬니 시내는 그녀를 달래려는 듯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에이. 그래도 이사님은 다르죠. 이사님이 어떤 분인데.”
물론 시내도 이사님이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른다. 은비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그 전부였다.
“우리 과장님 빼고 여자는 다 돌같이 여기는 분이잖아요. 아니에요? 오늘도 봐. ‘옆에 둬야죠. 절대 안 놔주지’ 저 오늘 완전 소리칠 뻔했잖아요. 그런 모습 처음이었어요.”
시내가 회의실에서의 일을 꺼내자 은비는 뜨끔했다. 그때 정지헌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이정오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그렇긴 한데. 지헌 오빠야 다르겠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지켜볼게요, 과장님. 혹시라도, 그런 낌새라도 보이면 이 대리는 이 업계에서 매장당할 각오 해야 할 거예요.”
시내는 주먹을 꽉 쥐고는 전의를 불태웠다.
“정지헌 이사님은 채은비 과장님의 남자죠.”
시내 덕분에 은비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웃을 수 있었다. 이제 이정오를 감시하는 눈이 하나 더 생겼다.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조시내 대리가 은비에게 달려와 귓속말했다.
“과장님, 화장실에 성미란 팀장님 계셨었나 봐요. 어떡해요?”
미란이 화장실에서 나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이정오 대리 미움받겠어요. 성미란 팀장님 남편이 동료랑 바람나서 이혼했잖아요.”
“그러게. 어쩌지…….”
은비는 걱정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속마음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성미란의 과거. 은비 또한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돌 하나로 두 마리의 새를 잡은 기분이었다. 물론 그 돌은 개구리까지 죽일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