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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일주일 남았어 (20/183)

20. 일주일 남았어2021.07.07.

13년 전. ○○고등학교의 중간고사일. 2교시는 한문이었다. 암기력 좋은 학생은 10분이면 문제를 다 풀 수도 있는 그 과목 한문. 시험대형으로 열을 맞춘 반에서 은비는 맨 끝 열의 세 번째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 눈에 띄지 않게 딴짓하기 좋은 자리였다. 커닝페이퍼를 활용하기도 좋은 자리. A4용지를 반 잘라 앞뒤를 빽빽하게 채우고 소매에 넣으면 감쪽같았다. 은비는 매번 암기과목을 그렇게 해결했다. 이젠 선생님이 뒤돌아선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곧장 꺼내어 볼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그렇게 시험을 무사히 끝내고.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누군가가 은비의 자리를 툭 쳤고 은비의 책상이 열을 벗어나 삐딱해졌다. 은비는 속으로 짜증을 내며 책상을 바로 했다. 그러는 사이에 소매의 커닝페이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그걸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바로 옆줄 대각선 자리의 이정오였다.

1655113985038.jpg“은비야 이거 떨어졌어.”

은비는 커닝페이퍼가 아니라 심장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언뜻 보아도 커닝페이퍼처럼 생긴 그 종이를, 정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은비에게 건넸다.

16551139850385.jpg“고마워.”

짧게 인사하고 낚아채듯 종이를 빼앗았다.

16551139850385.jpg‘이정오가 봤을까? 선생님한테 이르면 어쩌지? 0점 처리되면 어쩌지?’

이전의 시험에서도 은비는 커닝페이퍼를 만들었다. 어쩌다 그것까지 걸린다면? 증거는 없앴다 해도, 혹여나 재시험을 치르게 된다면 똑같은 점수를 받을 자신이 없었다. 피가 바짝 말라오는 느낌이었다. 결국 은비는 커닝페이퍼에 대해 걱정하느라 그다음 시험까지 망치고 말았다. 가족이 시험 결과를 알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은비는 법조인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엄마는 로스쿨 교수, 아빠는 판사, 그리고 오빠도 로스쿨을 준비하는 S대 법대생. 부모님은 인생에서 공부가 가장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성적이 잘 나오는 건 당연한 일로 여기고, 성적이 떨어지는 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 안에서 은비는 숨 막히게 살아왔다. 그런 처지에, 혹시나 다른 시험의 부정행위까지 발각된다면……. 중간고사가 끝난 후 며칠 동안 은비는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몸이 달았다. 정오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은비는 두려웠다. 언제라도 정오가 선생님께 달려가 확 불어버릴 것만 같았다. 초조해진 은비는 정오를 포섭해보기로 했다.

16551139850385.jpg“정오야, 이거 가질래? 나 한 번도 안 쓴 거야.”

은비는 자신이 좋아하는 명품 브랜드의 립글로스를 내밀었다. 친구들에게 곧잘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친구들은 언제나 좋다 하며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받은 친구들은 적당히 이용해먹기 좋은 도구가 되어주었다. 그런데 정오는 은비의 친구들과는 달랐다.

1655113985038.jpg“아냐. 괜찮아.”

16551139850385.jpg“하나 가지고 있으면 좋을 거야.”

1655113985038.jpg“아니. 난 화장 안 해서. 정말 괜찮아.”

속으로는 너무 초조했다. 얘가 혹시 뇌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받지 못하는 건가?

16551139850385.jpg“넌 얼굴도 예뻐서 화장하면 더 예쁠 텐데. 그리고 이거, 명품이야.”

1655113985038.jpg“난 정말 필요 없어, 은비야.”

정오는 끝까지 거절했다. 왠지 정오가 자신을 멸시하는 것만 같았다.

1655113985038.jpg“마음 써줘서 고마워. 미안.”

정오는 그렇게 냉정하게 떠났다. 그 후로 은비는 더욱 정오가 두려워졌다. 하루빨리, 아무도 정오의 말을 믿을 수 없게 해놓아야 했다. 폭탄이 되어버리기 전에,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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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말을 기다리는 마음에 직장인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목요일 아침. 예나가 티셔츠 목둘레에서 머리를 쑥 빼며 기운차게 말했다.

1655113987969.jpg“엄마, 일주일 남았어!”

1655113985038.jpg“뭐가?”

1655113987969.jpg“다음 주 목요일이 무슨 날인지 몰라?”

딸이 백번도 더 얘기했는데 모를 리가 있나. 아이들은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산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어린이날을 기다리며, 생일을 기다리며. 그 기다림이 아이를 키운다. 정오는 딸이 작년 이맘때보다 훌쩍 자랐다는 것을 실감했다. 벌써 일곱 살. 예나는 만 40주를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나왔다. 37주 만에 태어난 2.7kg의 아이는 엄마를 내내 불안하게 했다. 정오가 퇴원한 후에도 아이는 청색증으로 퇴원하지 못했고, 정오는 산후조리도 하지 못하고 매일 딸을 만나러 다녔다. 예나가 일주일 만에 퇴원해서도 정오는 계속 노심초사했다. 아이에게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고구마처럼 뻘건 아이의 이마 한가운데에는 어둑한 반점이 있었다. 아기에 대해 잘 모르긴 했지만 그런 아이는 본 적도 없어서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연어반’이라고 했다. 많은 신생아에게서 나타나는 것이고 생후 1년이면 없어진다고. 하지만 예나의 연어반은 예나가 일곱 살이 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이의 얼굴이 뽀얗게 변하니 연어반은 붉은색이 되었다. 치료를 해줄까 싶기도 했지만 치료 과정이 까다롭기도 하고 사춘기쯤에는 사라진다는 말도 많이 들어 동그랗고 예쁜 이마를 앞머리로 가려주고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어딘가에선 연어반을 ‘천사의 키스’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기가 하도 예뻐서 천사가 키스를 해준 자국이라고. 정오는 그 말을 믿고 있다. 예나는 전생에 천사였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든 거겠지. 언젠가 예나의 연어반이 사라지면, 조금은 아쉬울 것 같았다. 정오는 예나가 조금만 천천히 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655113985038.jpg“예나는 생일에 뭐하고 싶어?”

1655113987969.jpg“엄마랑 할머니랑 케이크 먹고 싶어.”

예나가 소박한 제 꿈을 말했다. 정지헌 씨. 우리 아이의 일곱 살 생일이 다가오고 있어. * 맥스기획 제작 2팀. 며칠 전부터 정오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미란이 왠지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에 띌 만큼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입사 초에 느꼈던 그 친절함이 조금 옅어졌다 뿐이지 성미란 팀장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사람이었다. 그보다 정오는 제작 1팀이 더 신경 쓰였다. 제작 1팀의 조시내 대리가 자신을 싸늘하게 대한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조시내 대리만 그랬는데 오늘은 조유리 대리까지 합세한 듯했다. 참 씁쓸한 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조심한다는 것. 팀원들과 떨어져 있을 때나 회의실에 정오 혼자 남겨졌을 때가 가장 위험했다. 정오의 아이디어를 뒤늦게 비판하거나 이상한 요청을 하는 정도였지만 피로하긴 했다. 오늘도 조시내 대리는 제작 2팀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말을 걸어왔다.

16551139879712.jpg“이정오 대리님. 오늘 다원주류랑 회식 있단 얘기는 들었죠?”

1655113985038.jpg“네? 아뇨. 못 들었는데요.”

16551139879712.jpg“좀 들어보려고 노력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 아는 걸 본인만 모르면 안 되잖아요.”

1655113985038.jpg“이제 알았으니 됐죠, 뭐.”

왠지 은비를 닮은 말투가 씁쓸하여 정오도 냉하게 받아쳤다. 정오의 반응에 코를 벌름거리던 시내가 말했다.

16551139879712.jpg“광고주가 제작팀이랑 회식 자리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해서 급하게 추진됐어요. 그런데 담당 AE가 출장을 가서 없네요. 안타깝게도.”

1655113985038.jpg“…….”

16551139879712.jpg“우리는 다 맡은 게 있어서 바쁘니까, 이 대리가 장소 좀 물색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부탁해요.”

오늘의 요상한 요청은 그것이었군. 회식 자리 섭외가 그다지 어려울 건 없어 정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3985038.jpg“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16551139879712.jpg“직접 가야지.”

1655113985038.jpg“네?”

16551139879712.jpg“전화로 하면 대충 얘기해줄 수도 있잖아요. 직접 가서 자리랑 메뉴 다 확인하고, 그러고 우리 불러줘요. 광고주도 모시러 가고.”

조시내 대리는 광고주 응대 패키지를 원하는 거였다. 이 정도면 리틀 채은비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는데?

16551139879712.jpg“중간에라도 AE가 연락이 됐으면 좋겠네요. AE가 잘할 텐데, 이 대리님한테 부탁하는 게 영 마음이 불편하긴 해요.”

1655113985038.jpg“불편하면 같이 가시든가요.”

16551139879712.jpg“그건 안 되고요. 너무 바빠서. 아무튼 믿어요. 이 대리님.”

시내가 빙긋 미소 지었다. * 다원주류 실무진이 제작팀을 만나고 싶다고 급하게 연락했다. 담당 AE와 기획팀 팀장이 출장을 간 날이라 지헌은 조금 난처한 상황이었다. 회사 앞으로 찾아오겠다는 광고주는 과장급. 지헌이 직접 술 접대를 할 필요는 없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갔다. 제작팀을 만나자고 했으니 이정오도 나타날 것이다. 회식에 참석한 이정오는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지헌은 제작팀 쪽으로 이동했다. 제작 1팀은 거의 자리에 있었지만 제작 2팀은 아무도 없었다.

16551139944334.jpg“제작 2팀에 사람이 없네요.”

지헌은 가장 끝자리에 앉은 조유리 대리에게 말을 걸었다. 유리가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16551139879712.jpg“네? 저저저…… 고 대리랑 송 사원은 인쇄 촬영 갔고 이 대리는 다원주류에서 온다고 해서 회식 장소 알아보러 갔습니다.”

지헌의 눈썹이 휘었다.

16551139944334.jpg“벌써 나갔다고요?”

16551139879712.jpg“네? 저저…… 광고주가 일찍 온다고 해서요.”

유리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헌은 돌아서서 떠나버렸다. 지헌은 바로 미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16551139944334.jpg“팀장님, 정지헌입니다. 그쪽팀 이정오 대리 연락처 좀 보내주세요.”

핑계가 좋았다. 광고주가 회사 앞으로 찾아오는 중대한 일을 맞아, 지헌은 어쩔 수 없이 정오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미란은 곧장 정오의 연락처를 보내왔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하. 비 오는 날 회식이라니. 1층으로 내려온 정오는 처량한 한숨을 내쉬었다. 건물 밖, 유리문 너머로 거센 빗줄기가 보였다. 갑자기 후두둑 내리는 걸 보니 지나가는 비 같긴 한데. 그래도 우산은 사야겠지. 광고주를 만나야 하니까. 정오는 발길을 돌려 건물 안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다. 그러나 맑은 날에는 그토록 가득했던 우산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1655113985038.jpg“우산 다 팔렸나요?”

16551139879712.jpg“네. 갑자기 비가 와서 다 나갔네요.”

이 일을 어째야 하나. 그냥 팀원끼리 회식하는 거라면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도 상관없을 테지만 광고주 회식이니 용모가 단정해야 할 텐데. 하하. 회사에 입사하여 첫 회식이 광고주와의 회식이라니. 차암 가슴이 웅장해지네. 우두커니 출입문 앞에 서서 비가 잦아들길 기다리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1655113985038.jpg“이정오입니다.”

16551139944334.jpg[이정오 대리.]

수화기 너머로 자신의 이름이 들려오자 정오는 울컥했다. 7년 전의 그날이 생각났다. 정지헌이 자신에게 전화를 해서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던 날. 정오는 정지헌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한 그 목소리를 의심해본 적도 없었다. 지금 이 목소리. 이게 정지헌인데.

1655113985038.jpg“네. 이사님.”

16551139944334.jpg[내 목소리 알아듣네요. 지금 어디 있습니까.]

1655113985038.jpg“건물 1층이요.”

뚝. 전화는 금방 끊겼다. 추억할 것 없는 추억에 젖었던 마음이 멍해졌다. 지헌은 우산을 가지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왠지 그녀는 우산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려가며 승규를 만났다. 승규는 지헌을 보자마자 반색했다.

16551139977659.jpg“오. 너 우산 있구나! 같이 좀 쓰자.”

승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반갑게 들러붙었다. 며칠 사이에 승규의 먹구름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지헌의 소중한 친구로서 그 옆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 내 옆자리는…… 네가 아니야.

16551139977659.jpg“회식 간다며? 광고주가 온다며?”

어떻게 들었는지, 지헌의 본부 소식을 밝게 알고 있는 친구를 향해 지헌은 피식 웃어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정면 출입문 밖에 서 있는 이정오가 보였다. 지헌은 승규에게 우산을 건넸다.

16551139944334.jpg“너 이거 써.”

16551139977659.jpg“응? 그럼 너는.”

16551139944334.jpg“나는 뛰어가지 뭐.”

16551139977659.jpg“무슨 소리야. 같이 쓰면 되지.”

16551139944334.jpg“그냥 너 쓰고.”

16551139977659.jpg“…….”

16551139944334.jpg“대신 3분 뒤에 나와.”

16551139977659.jpg“…….”

16551139944334.jpg“나 먼저 간다.”

지헌은 보폭을 넓혀 성큼 걸어갔다. 승규는 우산과 지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오는 우두커니 서서 비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뒤에서 어깨너머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16551139944334.jpg“우산 있어요?”

지헌이었다. 아니 좀 떨어져서 얘기해도 되는데. 왜 어깨 위로 얼굴을 들이미냐고. 고개 꺾다가 박치기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7년 전에 머리를 다쳤단 양반이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이 와중에도 속으로는 그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는 정오였다.

1655113985038.jpg“없습니다. 이사님.”

정오의 대답에 지헌은 가뿐하게 슈트 재킷을 벗어 그녀의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16551139944334.jpg“같이 가죠.”

이…… 이걸 받치고 같이 가자고? 설레는 걸 넘어 두려운 제안이었다.

1655113985038.jpg“아뇨. 괜찮습니다. 저기서 우산 사려고요.”

정오는 고개를 흔들며 건너편의 편의점을 가리켰다.

16551139944334.jpg“그럼 저기까지.”

지헌은 거침이 없었다. 그가 그녀의 등을 슬쩍 밀었다. 정오는 준비 없이, 그칠 줄 모르는 빗속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모든 준비는 지헌의 몫이었다. 등 뒤에서 그녀를 감싸듯 뻗은 팔이 든든하게 재킷을 받쳐 들었다. 우산보다 몇십 배는 비싼 슈트 재킷이 빗물을 탄탄히 막아냈다.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동그란 어깨가 그의 너른 가슴에 닿았다. 갑작스런 비로 한기가 느껴졌던 몸에 그의 체온이 덧입혀진 느낌이었다. 토독토독, 빗소리에 심장 소리가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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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승규가 이 장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16551139977659.jpg“저 새ㄲ…….”

며칠 전 친구에게 막말을 할 때에도 안 나왔던 욕이 불쑥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내일부터 힘차게 놀려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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