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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대리님이 좋아요 (25/183)

25. 대리님이 좋아요2021.07.24.

토요일 아침. 예나는 달력에 X표를 하나씩 쳐가며 날짜를 세었다. 예나의 생일은 이제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예나가 달력에 모아놓은 X표를 보면 이미 지나간 것들은 얼마나 의미 없는가를 알게 된다.

16551141370703.jpg“예나야. 생일날 하고 싶은 게 엄마랑 할머니랑 케이크 먹는 것밖에 없는데, 그래도 그렇게 좋아? 기다려져?”

16551141370707.jpg“응. 당연하지.”

16551141370703.jpg“왜?”

16551141370707.jpg“엄마가 일찍 오니까.”

정오는 그간 자신이 얼마나 아이를 챙기지 못했는지를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너를 가장 사랑해서 일을 하는데, 정작 너를 사랑해줄 시간이 부족하구나. 엄마는 언제나 아이에게 미안하다.

16551141370707.jpg“그리고 엄마가 선물도 줄 거잖아. 그래서 좋아.”

이미 예나는 오래전에 선물을 골랐다. 코딩 로봇이 갖고 싶다고 했다. 혹시나 제품이 품절될까 하는 마음에 정오는 일찍 선물을 구입했다. 선물은 지난 목요일에 이미 도착했고 예나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집에 있는 선물을 생일날까지 기다리는 마음은 어떤 걸까? 아이는 갖고 싶은 것, 받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버텨가며 열심히 손꼽아 생일을 기다리고 있다. 정오는 예나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달력을 보았다. 한 장 넘기니 6월 7일 월요일에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16551141370703.jpg“예나야, 여긴 동그라미 왜 쳤어?”

16551141370707.jpg“도빈이네 집에 가는 날이잖아.”

6월 7일의 동그라미를 보며 곱게 웃은 예나는 거실로 떠났다. 그사이에 정오는 휴대폰을 들어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간밤에 지헌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웬 인터넷주소와 함께 짤막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16551141370747.jpg- 카피라이터가 보면 좋을 것 같아서 보냅니다.

  정오도 아는 해외 유명한 크리에이터의 강연 동영상이었다. 보면 무척 유익하기야 하겠지만 정오는 탐탁지 않았다.

16551141370703.jpg‘금요일 밤에 왜 강연을 보내?’

시큰둥하게 휴대폰을 엎어놓고는 가만히 앉아 있는데 예나가 바둑판과 바둑알을 가지고서 돌아왔다.

16551141370707.jpg“엄마, 나랑 바둑 하자.”

16551141370703.jpg“엄마는 바둑 둘 줄 모르는데.”

16551141370707.jpg“그럼 내가 가르쳐줄게.”

바둑을 향한 예나의 열의는 언제나 진심이다. 예나는 바둑 선생님이 되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정오가 아는 것도 있었지만 모르는 것도 더러 있었다. 모르는 만큼 집중해야 하는데, 지헌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후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답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답신을 하면 왠지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어제 성미란 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1655114140147.jpg“……그냥 걱정돼서 말이야. 이제 이사님은 곧 결혼할 거잖아. 게다가 같은 회사고.”

  동료들이 걱정할 만한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가 접근해 오기 전에 정오가 먼저 뿌리쳐야 했다. 정오가 멍하니 딴생각에 빠져 있으니 예나가 소리를 높였다.

16551141370707.jpg“엄마 엄마! 바둑은 활로로 살리는 거잖아.”

16551141370703.jpg“응. 그렇지. 활로…….”

16551141370707.jpg“선이 활로고 저쪽은 활로가 아니라고. 활로로 가야 하는 거야. 알았어?”

16551141370703.jpg“응. 활로로 가야지.”

그래. 바둑도 사람도 활로로 가야지. 그래야 살지. 이예나 선생의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는 정오였다.

16551141370703.jpg‘그래. 나는 예나만 있으면 돼.’

내가 먼저 선을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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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군가에게는 발만 담갔다 뺐을 뿐인데 홀랑 지나가버린 주말. 하지만 지헌에게는 따분한 주말이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의 결혼식, 광고주 대표와의 식사, 어머니의 호출……. 그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잡히지 않았고 원치 않는 것들은 줄줄이 이어졌다. 금요일에 이정오 대리에게 유익한 내용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냈건만, 그녀는 ‘읽씹’이었고. 그나마 월요일이 되니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16551141370703.jpg- 네. 잘 보겠습니다.

  월요일 아침 9시 정각. 정오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지헌은 반듯하게 한 줄로 쓰인 일곱 글자를 읽고 또 읽었다. 금요일 밤에 보낸 문자메시지에 대한 답문인 것 같은데. 잘 봤습니다, 도 아니고 잘 보겠습니다? 이제 와서? 지헌은 픽 코웃음을 치고는 바로 답신을 보냈다.

16551141370747.jpg- 사흘 만에 답문을 보냅니까?

  드릉. 이번에는 답신이 꽤 빨리 왔다.

16551141370703.jpg- 일이잖아요. 주말 빼고 근무일 기준 하루만입니다.

16551141370747.jpg- 문자를 택배처럼 보내시네.

  주말 내내 잠겨 있던 표정이 드디어 풀렸다. 지헌은 이번에도 바로 문자를 전송했다.

16551141370703.jpg- 네. 그렇습니다. 업무는 근무일 기준으로 처리합니다. 당일 배송 원하시면 평일 15시 전에 보내주십시오.

16551141370703.jpg- 아니, 당일 답변.

  나란히 도착한 두 개의 문자메시지에 지헌은 저도 모르게 크게 웃어버렸다. 집무실 밖으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갔단 생각에 헛기침을 한 그는 바르게 고쳐 앉아 메시지 하나를 더 보냈다. 금요일 밤에 보냈던 크리에이터의 작품을 모아놓은 동영상 주소였다.

16551141370747.jpg- 이것도 함께 보는 게 좋겠네요.

16551141370703.jpg- 네. 문자 접수됐습니다. 처리하겠습니다.

  풉. 왠지 문자메시지를 전송할 때의 그녀의 표정까지 상상되었다. 상사의 메시지를 귀찮은 업무 정도로 받아들이는 그녀의 당돌함과 뻔뻔함이 밉지가 않았다. 너무 재미나서 슬금슬금 새로운 욕망이 움트고 있었다. 계속 옆에 앉혀놓고 싶다는. * 오후에는 다원주류 신제품 광고 회의가 열렸다. AE가 지난주의 상황에서 업데이트된 내용을 브리핑했다.

16551141435228.jpg“지난주 회식 겸 미팅 이후 다원주류에서 몇 가지 의견을 주었습니다. 우선 광고주는 우리 아이디어들 전부 관심을 보였고요, 아이디어가 모두 좋다고…… 이 모든 아이디어를…… 합쳐달라고 하네요.”

AE가 눈치를 보며 내놓은 전언에 제작팀은 역시나 경악했다.

16551141435228.jpg“합치라니. 합치라니!”

16551141435228.jpg“합쳐서 뭐 어쩌라고. 부대찌개를 만들까?”

AE는 꿋꿋하게 브리핑을 이어갔다.

16551141435228.jpg“합쳐서…… 시안을 세 개 준비해달라고 합니다.”

16551141435228.jpg“합쳐서 세 개라고요? 합치면 한 개지 왜 세 개?”

16551141435228.jpg“그건 전부 다시 준비하라는 말이랑 똑같잖아요.”

조시내 대리는 특히나 성난 목소리였다. 불똥은 황당하게도 정오에게 튀었다.

16551141435228.jpg“이정오 대리님. 할 말 없어요?”

16551141370703.jpg“무슨 할 말이요?”

16551141435228.jpg“이 대리님이 목요일 회식에서 광고주한테 이 말 저 말 다 꺼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요.”

16551141370703.jpg“저는 안찬섭 팀장님께서 말해도 된다고 하신 것만 얘기했습니다.”

정오는 시내의 핀잔에 기죽지 않고 대답했다.

16551141435228.jpg“뭐 그럴 수도 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광고주 의중을 빨리 파악했으니 다행이지. 흠흠.”

제작 1팀 팀장 찬섭이 헛기침을 하며 구차한 구실을 붙였다.

16551141370703.jpg“기한은요?”

정오가 기한을 물었다.

16551141435228.jpg“일단 이번 주 금요일에 1차 제안서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1차 제안서에는 콘티까지는 필요 없고요.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한 스크립트만 있으면 될 것 같다고 하네요.”

16551141435228.jpg“1차 제안서라니. 그럼 한 번 더 뒤집어엎어 버리겠다는 거잖아요. 너무하네.”

16551141435228.jpg“1차에서 통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16551141435228.jpg“그게 어디 쉬운가?”

제작팀원들이 계속 투덜대자 기획팀 팀장이 나섰다.

16551141435228.jpg“시간이 촉박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카피 후보도 질과 양을 다 생각하셔서 넉넉하게 준비해주셔야 합니다. 다원주류가 워낙 카피 고르는 게 까다로워서요. 아시죠?”

은비가 정오를 보며 말했다.

16551141491038.jpg“시안 최종 정리는 이정오 대리가 했으면 좋겠어요. 광고주랑 개별적으로 제일 얘기를 많이 나누기도 했고, 맡은 일도 얼마 안 되니까요.”

제작 1팀 팀원들이 끄덕였다. 제작 1팀은 다들 발을 빼려고 하는 느낌이었다. 정오는 은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끌려다니면서 시간을 빼앗기는 것보다 키를 잡고 알아서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목요일은 딸의 생일. 그전에 기필코 일을 끝내야 했다.

16551141370703.jpg“네. 그럼 협조 부탁드려요. 아이디어는 메일로 저한테 보내주시고요.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매일 저녁 한 시간만이라도 의견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취합, 정리는 제가 할게요.”

16551141435228.jpg“캬. 시원시원해서 좋네!”

정오가 추진력 있게 결정을 내리자 안찬섭 팀장이 박수 쳤다. 정오가 일을 대부분 떠맡게 되어 회의는 빨리 끝났다. 거의 마지막으로 남아 회의실을 정리하는 정오에게 은비가 다가왔다.

16551141491038.jpg“이정오 대리, 일단 내 카피는 이거예요. 회의 소집할 필요 없이 반영해도 돼요.”

은비는 대뜸 종이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몇 줄의 문장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16551141370703.jpg“……따로 정리는 안 하셨고요?”

16551141491038.jpg“손으로 작업했어요.”

16551141370703.jpg“이건 그냥 메모 수준인데요. 성의 있게 파일로 정리해서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16551141491038.jpg“내가 성의 있게 파일로 주면 이 대리는 성의 없게 복사 붙여넣기 할 거잖아요. 어차피 이 대리가 정리해야 하는데, 공부도 할 겸 내 의견, 내 카피들 직접 전사해보면 좋죠.”

16551141370703.jpg“…….”

16551141491038.jpg“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기획팀 팀장이 쳐다보고 있었다. 채은비는 정오를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정오는 재빨리 가장 뒤탈이 없을 만한 판단을 내렸다.

16551141370703.jpg“그럼 과장님 메모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제가 정리하는 거니까 최종 보고도 제가 하는 거 알죠? 마지막에 과장님 카피가 오르지 못하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고요.”

은비가 얼굴을 미약하게 일그러뜨리고는 떠났다.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기훈이 몰래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은비가 떠난 후, 이번에는 기획팀 팀장이 기훈에게 말을 걸었다.

16551141435228.jpg“기훈 씨, 이건 딴 얘긴데, 다음 주 수요일에 우리 또 다른 PT가 있어서. 기획서 디자인 좀 부탁하면 안 될까? 기훈 씨가 기획서를 만지면 그렇게 예술이라던데. 오늘 저녁때 시간 좀 있나?”

1655114152105.jpg“아…… 오늘 말씀입니까?”

기훈이 확답을 머뭇거리며 일정을 되물었다. 신입사원답지 않게 많은 일을 맡고 있는데 그 와중에 또 하나가 얹힌 것이다. 기훈이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빠르게 눈치챈 정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16551141370703.jpg“그럼 다음 주 월요일쯤 시작하면 어떨까요? 기훈 씨도 팀에서 할 일이 많아서요. 월요일에 시작해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16551141435228.jpg“아…… 일이 많구나? 그럼 그렇게 해야겠네요. 그럼 기훈 씨, 다음 주 월요일에 부탁해.”

기획팀 팀장까지 떠난 후, 회의실에 정오와 단둘만 남게 되자 기훈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4152105.jpg“어후우우, 대리님 덕분에 살았네요. 감사합니다.”

정오는 기훈이 안쓰러웠다.

16551141370703.jpg“기훈 씨, 이런 요청에 계속 불려 다녔지?”

1655114152105.jpg“어떻게 아셨어요?”

16551141370703.jpg“기획서 잘 만지는 사람들은 그렇게 불려 다니더라고. 어차피 기획서는 경쟁 PT 마지막 날까지 고치고 또 고치게 돼 있으니까 지금부터 힘 뺄 필요 없어. 월요일에 가서 해주면 돼. 그때 돼서 안 부르면 그냥 지나가는 거고.”

큰 깨달음을 얻은 기훈은 입술을 벌리고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41370703.jpg“알았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내 편. 멋있는 이 대리님. 그러고 보니 이정오 대리가 팀에 들어온 뒤로 일이 수월해졌다. 회의실 정리, 회의록 작성은 물론이고, 식사 메뉴를 의논하고 일정을 챙기는 일까지 정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팀원들과도 조금은 서먹서먹한 편이었는데 어느새 모두에게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기훈은 정오가 팀 분위기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수 고은주 대리보다도 더 사수 같았고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어떤 때는 따뜻한 누나 같았고, 또 어떤 때는 마음 맞는 친구 같기도 했다. 거기다 예쁘고 재미있고 똑똑하고. 생각해보니 정오는 자신의 이상형이었다. 기훈은 회의실을 떠나려는 정오를 불렀다.

1655114152105.jpg“대리님, 저 할 말 있는데.”

16551141370703.jpg“어, 해.”

다른 이가 손을 뻗어오기 전에 빨리,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1655114152105.jpg“저는 대리님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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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동시에. 쿵쿵. 무척 급하고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대화도 고백도 중단되었다. 누군가 열려 있는 회의실 문을 세게 두드린 것이다. ‘똑똑’이 아니라 ‘쿵쿵’. 회의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정지헌이었다. 문을 세게 두드리느라 꽉 쥔 주먹이 조금 야만스러워 보였다.

16551141370747.jpg“이정오 대리.”

지헌이 서슴없이 정오를 불렀다. 빚 받으러 온 건가 싶을 만큼 무서운 무표정으로.

16551141370703.jpg“네. 이사님.”

16551141370747.jpg“나한테 줄 거 있지 않아요?”

기훈을 향해 동그랗게 드러났던 정오의 눈동자가 이번엔 지헌을 향해 부르르 흔들렸다.

16551141370747.jpg“내 옷.”

정오와 기훈을 노려보고 있는 그의 눈빛은 숨이 막힐 만큼 살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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