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언젠가 꽃비가 내리길2021.08.25.
진실이 휩쓸고 간 자리엔 침묵이 감돌았다. 정오는 시선을 내리고서 말을 이었다. 지헌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거짓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제 딴에는 전남친을 닮았다고 하면 이사님께 더 치근덕대는 걸로 보일까 봐, 선을 그어보겠다고 한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래.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잖아. 이런 모욕. 이런 기분. 지금은 비참하지만, 한 번이면 끝나는 일이야.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정오는 꾸벅 인사하고서 집무실을 나왔다. 은비는 정오가 떠난 후 열렸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제 이정오는 물리쳤다. 거짓말쟁이 이정오가, 자신이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니 지헌도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뭣도 없는 여자에게 걸려든 최후가 어떤 건지.
“하마터면 오빠 큰일 날 뻔했어. 내가 말했잖아. 저 애가 내 거 훔쳐 간 적 있었다고.”
한시름 놓은 은비가 제법 편안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의심 없이 믿었다가 쟤가 오빠 귀중품에라도 손대면 어쩔 뻔했어?”
“나가.”
충격을 받았다면, 이정오에 대해서 더 물어보는 게 정상일 텐데. 돌아온 그의 대답은 은비의 기대와 달리 그녀를 충격에 빠뜨렸다. 은비는 고개를 들어 지헌을 바라보았다. 몸서리쳐질 만큼 건조하고 차디찬 느낌의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모든 존재에 대한 멸시의 감정이 담겨 있는 듯했다.
“다신 내 일에 끼어들지 마.”
그의 음성이 섬뜩했다. 벌어진 그녀의 입으로는 아무 말도 담지 못했다. 허리 아래로 꽉 쥔 커다란 손이 언제라도 위로 올라와 자신의 목을 조여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마음을 되찾아야겠단 마음보다는 지금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단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순간이었다. 은비는 도망치듯 재빨리 집무실을 나왔다.
*
“이 대리, 오늘 특별히 해야 할 거 있어?”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성미란 팀장이 정오에게 물었다.
“특별한 건 없고요. 야근 때는 PT 회의 해야죠.”
“아니야. 오늘은 일찍 가.”
“네? 회의하는 거 아니에요?”
“하루쯤 빠져도 돼. 그냥 가.”
미란이 칼퇴근을 지시했다. 미란은 정오가 은비에게 손목을 잡혀 지헌의 집무실에 다녀온 후,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진 걸 확인했다. 오늘 무언가 사달이 났다는 걸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빨리 가. 가서 쉬어.”
“……네. 그럼 일찍 갈게요.”
미란이 등을 떠밀어 정오는 일찍 퇴근하게 되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는 예나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샀다.
“엄마, 나왔어.”
“엄마아아!”
“어이구, 이게 누구야.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일찍 오셨나?”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나가 소리치며 달려왔고 국순은 해가 서쪽에서 뜬 것처럼 놀란 눈이 되었다.
“그냥 일이 일찍 끝나서 일찍 왔어.”
“엄마, 이게 뭐야?”
“밥은.”
“아직 안 먹었지. 나 배고파. 밥 줘.”
“엄마, 이게 뭐냐고.”
정오와 국순의 대화 도중에 예나는 정오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가방을 가리키며 계속 물었다. 아이스크림이라는 걸 알면서 묻는 음흉함은 역시 정지헌을 닮았다.
“우리 예나 주려고 사 왔지. 예나는 밥 먹었어?”
“응! 밥 먹었으니까 아이스크림 먹어도 되지?”
예나는 정오의 손에 들린 가방을 거의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국순이 금방 식사를 차렸다. 한 사람 먹는 양인데도 반찬들이 푸짐했다. 정오는 밥을 크게 떠 입으로 날랐다. 국순이 그 모양을 보며 물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어떻게 알았어?”
“엄마는 다 알지.”
엄마는 안다. 딸이 힘든 일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밥을 많이 먹는다는 걸. 반찬보다 밥을 훨씬 더 많이 먹는 건 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엄마, 나 고1 때, 내가 되게 싫어하던 애가 있었거든. 걔를 회사에서 만났다.”
“왜 싫어해. 사이좋게 좀 지내지 그랬어.”
“원래 인성이 덜된 애야. 근데 걔는 여전히 별로더라.”
“…….”
“오늘은 걔랑 마찰이 좀 있었는데, 너무 분하다.”
정오는 밥숟가락을 잡고 주먹을 쥔 채로 테이블을 쿵, 쳤다
“아주 혼구녕을 내줄 거야.”
“…….”
“잊지 않겠다! 반드시 복수할 것!”
정오가 의지를 불태우는데, 국순은 그 옆에서 혀를 끌끌 찼다.
“애까지 있는 게 어쩌면 저리 속이 좁을까. 다 털어버리고 친하게 지내지는 못할망정.”
“엄마, 몰라? 사람 안 변한다고. 걔랑 친하게 지내면 내 인성도 버려. 한번 원수는 영원한 원수야.”
“원수는 무슨. 나라라도 팔아먹었대? 애도 아니고. 네가 아직도 고1인 줄 알아?”
국순의 입장에선 정오가 걱정스러웠고, 정오의 입장에선 국순이 이해가지 않았다.
“엄마. 엄마처럼 다 이해하고 넘어가도 요즘 세상에선 성인군자 소리 듣기 힘들어. 엄마 같은 성격을 뭐라고 하는지 알아? 고구마. 고구마라고 부른다고.”
“고구마가 얼마나 맛있냐. 요즘 것들은 배가 불렀지. 나 때는 고구마 없어서 못 먹었어.”
“어후, 엄마 또 옛날 사람 티 낸다. 옛날 사람, 옛날 사람.”
“나 보고 옛날 사람이라는 앤 세상천지에 너밖에 없다.”
“엄마는 엄마 동갑들만 만나나 보지.”
“으휴. 한마디도 안 져요. 누굴 닮아서 저럴까 몰라.”
늘 있는 실랑이다. 국순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렸다. 나도 네 편이 되어주고 싶지만, 네 회사 생활이 힘들어질까 봐 그러지. 한마디 더 참견하려다가 딸이 어지간히 알아서 할까 하는 믿음에 말을 거두었다. 예나가 국순을 콕콕 찔렀다.
“할머니. 할머니지.”
“응?”
“엄마는 누굴 닮았냐면, 할머니를 닮았다고.”
아이스크림을 입가에 잔뜩 묻히고서, 예나가 빙긋 웃었다.
“엄마는 할머니를 닮았어. 나는 엄마를 닮았고. 그치.”
“우리 강아지 때문에 할머니가 아무 말도 못 하겠네.”
예나가 귀여워서 국순은 힘없이 웃고 말았다. * 식당을 정리하고 집으로 와 아이를 일찍 재우고, 정오는 약속 핑계를 대고는 밖으로 나왔다. 소주와 과자 한 봉지를 사가지고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았다. 엄마를 마주하기가 힘든 날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1 때 너네 엄마가 우리 선생님 붙잡고 했던 얘기라고. 내 딸 좀 봐달라고.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태어났지만, 한 번도 엄마 속 썩인 적 없는 딸이라고.”
오늘 낮에 은비가 했던 말이 가슴에 못처럼 박혔다. 아마도 엄마가 학교 급식소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혹여나 딸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던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왜 마음 아프게…….’
자신 때문에 고개를 숙였을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니 다 지난 일인데도 마음이 잘 가라앉지 않았다. 게다가, 그 비통한 이야기를, 정지헌의 앞에서 듣게 될 줄이야. 충격이 두 배였다.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것으로만 아파해도 충분한데. 내 마음이 왜 이럴까. 정지헌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하찮게 보든 안쓰럽게 보든 그건 이제 상관없어야 하는데. 지헌의 앞에서 그런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굴욕적이었다. 정오는 쓰린 속에 소주를 들이붓고는 눈물을 닦았다. 소주잔을 내려놓고 흐려진 눈으로 눈앞을 응시했을 때, 웬 남자가 자신을 알아보고는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정오도 남자를 알아보았다. 서로가 손끝으로 서로를 가리킨 채 잠시 굳었다. 길을 잃은 예나를 학원까지 바래다주었던 선한 인상의 경찰을 다시 만났다. 권배일 경사라고 했던가?
“아, 안녕하세요, 경사님. 순찰 나오셨어요?”
정오는 눈물을 더 잘 닦고서 인사했다.
“아닙니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입니다.”
“댁이 이 근처인가 보네요.”
“네.”
대화가 끊어지자 어색해졌는지 배일이 먼저 질문을 건넸다.
“근데, 여기 혼자 계십니까?”
혼자서 술을 마시느냐는 질문이었다. 정오는 코를 쓰윽 닦고는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웃어 보였지만 여전히 눈이 젖어 있었다. 배일이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경찰에…….”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순간 정오의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녀의 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얼굴만 보고서 관심의 손길을 내밀어주니 마음이 동해버렸다.
“이거 쓰십시오.”
당황한 배일이 주머니에서 신속하게 손수건을 꺼내 정오에게 건넸다.
“아, 아아아, 죄송해요. 뭐 큰 문제는 아니고 제가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요.”
“…….”
“일단 엄마를 보는 게 너무 힘들어서요. 그런 날 있잖아요. 경사님은 없으세요?”
“없긴 하지만…… 이해는 갈 것 같습니다…….”
역시 경찰이라, 민원 상담 스킬이 좋았다. 배일의 선하게 생긴 외모와 경찰이라는 든든함이, 혼탁한 감정과 섞여 정오의 눈물은 더 떨어지고 말았다. 배일은 결국 정오의 앞에 앉게 되었다.
“아, 정말 죄송해요. 경찰들한테도 장기미제사건이 있잖아요. 저한테도 일종의 장기미제사건이 있거든요…….”
정오는 눈물을 그쳐보려 고개를 반짝 들어 하늘을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 별이 보이지 않는 서울 하늘. 자신이 너무 머저리 같았다. 나는 엄마가 있고, 예나가 있고. 내 가족이 있는 여기가 천국이니 행복해야 하는데. 왜 찌질이처럼 술에 기대어 징징거리고 있을까. 존재 자체로 든든한 민중의 지팡이를 만나서?
“살아가는 건 괴로움인 것 같아요.”
꽉 잠가놓았던 수도꼭지를 풀어버린 것처럼 눈물과 함께 말도 술술 나왔다.
“괴로움 위에 괴로움만 쌓이면 다 무너질 텐데 간혹 누군가의 위에는 별이 반짝이고 꽃비가 내리기도 한단 말이죠.”
그래도 더는 민폐가 될 수 없어 간신히 눈물을 닦고 지그시 웃어 보였다.
“그래서 포기할 수가 없어요.”
그런 날을 기다리며, 흐릿한 인생을 억세게 움켜쥐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야. 이 괴로운 세상엔 대단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꽃비가 내리는 순간을 보기 위해서 지금의 눈물을 닦는 사람들을 존경해. 그러니 나도 이겨낸다. 이겨낼 수 있다. 나도 내 별이 반짝이는 걸 언젠가 꼭 보고 말 거야. * 이정오에게 망신살을 주어 지헌과 분리시켜 놓았는데도 은비의 불안함은 가시질 않았다. 지헌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 그 경악스러운 순간이 잊히질 않았다. 이게 다 이정오 때문이었다. 이정오가 정지헌을 망가뜨렸단 생각에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퇴근한 은비는 바로 지헌의 본가, 장영미 여사의 집을 찾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지헌과 더 멀어질 것만 같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밤늦은 시각의 방문이었는데, 영미는 은비를 가족처럼 맞아 주었다.
“은비야! 어서 와!”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영미는 은비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반갑게 흔들었다.
“그새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오호호, 얘는, 내가 어떻게 젊어져. 은비야말로 자꾸 더 예뻐진다. 아주 꽃이 피네.”
자신을 예뻐해주는 영미의 칭찬에 은비는 정말로 꽃처럼 웃었다.
“너도 잘 지냈지?”
“네. 일은 많지만요.”
“또 요령 안 피우고 힘든 일 도맡아 하느라고 힘든 거야? 지헌이랑 같은 본부인데, 좀 봐달라고 해.”
“괜찮아요, 어머니.”
언젠가 팀 내의 중요한 일들을 자신이 많이 맡게 되었다고 얘길 했더니 이런 좋은 반응으로 돌아왔다. 영미에게는 무언가 정보를 얘기하는 보람이 있었다. 정지헌이 그녀의 반만이라도 상냥한 사람이라면 좋았을 텐데.
“매일 지헌이 얼굴 보니 어때?”
“좋죠. 보기만 해도 좋죠. 그런데 어머니, 사실, 서로 바빠서 마주칠 새도 없어요. 저는 오빠랑 같은 회사 다니면 좀 더 자주 보고 밥도 같이 많이 먹고 그럴 줄 알았는데요.”
은비가 어리광을 부리듯 가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오빠 성격 아시잖아요. 특별한 사이라고 더 거리를 두는 것 같아요. 업무에 방해될까 싶은가 봐요. 되게 냉정해요.”
“지헌이는 나한테도 똑같아. 도통 안 웃어요, 도통. 그렇게 목석같을 수가 없어.”
“제가 이해해야죠, 뭐.”
“그래. 그래도 네가 마음이 넓으니까. 그래도 네가 거기 있으니까 광고 회사를 갔지. 물론 승규도 거기 있긴 하지만. 네가 있는 본부로 간 건 다 너 생각해서 간 거지. 그러니 네가 이해해줘.”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그거 말고 뭐가 더 있겠어.”
영미의 자상한 위로에 은비의 어둑한 마음이 씻겨내려갔다. 그렇지. 정지헌은 나를 생각해서 우리 본부로 온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기운이 났다.
“은비야, 그럼 내가 대신 데이트해줄까? 우리 은비 맛있는 것도 사주고 옷도 사주고 그래야겠네. 우리 쇼핑이나 할까?”
“그럼 어머니, 이번 주말에 시간 어떠세요? 일요일이요.”
“그래. 그러자! 스케줄이 있긴 했던 것 같은데 우리 은비를 위해 빼놔야지.”
감격에 겨운 은비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젖었다.
“어머님이 더 제 엄마 같아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눈으로 마음을 전하니 영미도 탄복한 얼굴이었다.
“나도 우리 은비 같은 딸이 있으면 바랄 게 없겠다! 얼른 결혼해. 우리 은비 닮은 손녀딸 태어나면 내가 원이 없겠어.”
“오빠 닮은 손자가 더 좋지 않으시겠어요?”
“아유, 말도 이쁘게 한다. 난 둘 다 좋아, 둘 다!”
헤헤헤. 언젠가. 그래. 언젠가. 정지헌과 나의 아이가 태어날 거야. 그때를 생각하며 힘을 내야지. 정지헌을 거머쥐는 건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