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억울하다 (33/183)

33. 억울하다2021.08.21.

16551143586108.jpg“저는…… 으허어엉…….”

조시내 대리는 대답 대신 울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조유리 대리가 뒤늦게 달려와 시내를 부축해 일으켰다. 지헌의 뒤쪽에 서 있었던 은비는 시내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16551143586121.jpg“조시내 대리. 울지 말고 말해보세요.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컴퓨터는 왜 저렇게 됐고.”

지헌이 표정을 굳히고서 추궁했다.

16551143586108.jpg“흐윽, 흐으윽…….”

시내는 울기만 했다. 학창 시절에 이정오 때문에 힘들었다는 채은비 과장의 성토로 정오를 달갑지 않게 여기게 됐다. 정지헌 이사의 애인인 채은비에게 밉보여 좋을 게 없었다. 시내는 일부러 은비가 보는 앞에서 정오를 괴롭혔다. 그러다 다원주류와의 회식 사건을 계기로 시내는 지헌에게 매일 업무보고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정오가 어떻게 지헌을 구워삶았는지 지헌은 서슴지 않고 자신을 망신 주었다. 은비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미움은 진짜가 되었다. 이정오가 너무 미웠고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었다. 시내는 바이러스를 기기에 심을 수 있는 USB를 갖고 돌아다니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정오가 맡은 일이 있어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정오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노트북에 바이러스를 퍼트렸고 인적이 드문 C출력실로 가서 정오가 클라우드에 올린 자료를 삭제해 버렸다. 그날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채은비 과장은 지헌과 정오가 붙어 있는 것에 몹시 짜증이 난 모양이었지만 시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가나 했는데, 오늘 이런 일이 벌어졌다.

16551143586121.jpg“조시내 대리,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내일 다시 얘기하죠. 오늘 업무는 이만 마치고 퇴근해요.”

16551143586108.jpg“이, 이사님, 조시내 대리님이…… 오늘까지 광고주한테 전송해야 하는 자료가 있는데요.”

조유리 대리가 지헌에게 말했다.

16551143586121.jpg“조유리 대리가 대신했으면 합니다.”

16551143586108.jpg“…….”

16551143586121.jpg“정체가 의심스러운 직원에게 회사 일을 맡길 수는 없어서요.”

지헌이 냉철하게 지시했다. 유리까지 겁먹은 눈빛이 되었다.

16551143586121.jpg“조시내 대리, 이 USB는 조사해보아야 하니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지헌은 정오가 들고 있던 USB를 가져갔다. 자초지종을 다 듣지도 못했는데 USB의 주인이 시내라는 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 사람들의 작당에 내가 걸려든 거야! 그 사실이 분하여 시내는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떠나고. 채은비가 제 앞으로 걸어왔다.

16551143586261.jpg“조시내 대리, 누명이라면 빨리 벗길 바랄게.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얘기하고. ……이번 일은 참 유감이야.”

16551143586108.jpg“…….”

16551143586261.jpg“그런데…… 조시내 대리 때문에 우리 지헌 오빠가 이정오 대리랑 야근을 했던 거야?”

은비의 서늘한 책망에 시내는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시내는 입을 멍청히 벌리고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은비를 바라보았다. 은비는 시내의 옆에 붙어 있는 조유리 대리에게 말했다.

16551143586261.jpg“조유리 대리. 얼른 가서 일해야지, 우리는.”

16551143586108.jpg“아, 네, 네. 과장님.”

유리가 시내를 붙잡았던 팔을 풀고 어수룩하게 일어나 은비를 따라나섰다. 시내는 혼자가 되었다. 조시내 대리를 시녀처럼 키우고 있었는데 허탕이 되었다. 은비는 어금니를 꽉 물어 분을 삼켰다. 또 이정오, 또 정지헌. 두 사람이 작당을 하고서 조시내 대리를 잡아낸 것이다. 사실 은비는 지난 목요일, 조시내 대리가 한 일을 알고 있었다. 조시내 대리가 어느 순간 없어진 후에 그 난리가 났기 때문에 눈치를 챘었다.

16551143586261.jpg‘저렇게 싫어하는 티를 내니 금방 탄로 나지.’

은비는 조시내 대리의 어리석음에 한탄했다. 이 일 저 일 핑계를 대며 지헌과의 간격을 좁혀가고 있는 정오는 더욱 싫었다.

16551143616936.png

  * 다음 날. 시내가 갖고 있던 USB에 담긴 자료의 정밀분석이 이루어졌고, 정오의 컴퓨터에서 발견된 바이러스와 일치하는 것까지 확인되었다. 결과를 받은 지헌은 곧장 시내를 집무실로 불렀다.

16551143586121.jpg“조시내 대리.”

16551143586108.jpg“……네. ……이사님.”

시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51143586121.jpg“아무리 조시내 대리가 부정해도 결과가 이렇게 나온 이상 회사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16551143586108.jpg“…….”

16551143586121.jpg“조시내 대리가 산업스파이인지, 아니면 이정오 대리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건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그 어떤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중대한 업무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지헌은 따끔하게 말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 같았다. 시내는 분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항변할 수 없었다. 시내는 배정받은 모든 담당에서 즉시 제외되고, 기획제작1본부에서 쫓겨나 관리본부로 가게 되었다. 이제 도서열람실을 지키는 일을 하게 될 터였다. 디자인전공이 서고를 지킨다니.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가장 큰 굴욕이었다. 하지만 이직 준비를 하지 않아 지시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잠잠히 이직 준비를 하는 수순이 될 것이다. 시내의 일은 시원하게 해결되었지만 정오에게는 찜찜함이 남았다.

16551143651773.jpg‘나라면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말로 타일렀을 텐데.’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잔인한 처우였다. 지헌의 결단은 무시무시했다. 하긴, 시내가 어떤 수상한 인물인지 확인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겠지만.

16551143651773.jpg“기훈 씨, 이번 일 정말 고마워.”

회의실로 향하는 복도. 정오는 기훈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어제, 기훈과 벌인 한 편의 연극에 시내가 걸려들었다. 지문인식 마우스는 그날 재빨리 구입한 것이고, 회사엔 애초에 지문 정보를 저장하는 시스템 같은 게 없었다. 모두 정오의 기지와 기훈의 능청스러운 연기 덕분이었다. 정오의 일에 기훈이 협조해주지 않았더라면 범인은 잡지 못했을 것이다. 기훈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16551143651782.jpg“대리님, 고마우시다면요. 저도 소원이 있는데.”

16551143651773.jpg“응. 말해. 뭐?”

16551143651782.jpg“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16551143651773.jpg“풉.”

16551143651782.jpg“말도 놓으면 안 되겠죠?”

이 녀석, 끼 부리네. 정오는 기훈의 어깨를 툭 밀었다. 밀어내는 대로 옆으로 밀려간 기훈이 다시 돌아오며 씨익 웃었다.

16551143651773.jpg“그래. 말도 놓고 욕도 하고 그래라.”

16551143651782.jpg“에이, 욕을 왜 해요. 대리님한테.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에요. 늘 높이고, 모시고 살겠습니다.”

놀고 있네. 자기들 세계에 빠져 그 뒤편에서 지헌이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지헌이 계속 두 사람을 주시하며 광선 눈빛을 발사하고 있다는 것도. 지헌은 빈정이 상했다. 이건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이정오. 전적으로 도움을 준 건 난데, 왜 송기훈한테만 고맙다고 하지? 사과를 해달래서 사과를 하고, 범인을 찾아달래서 범인을 찾아주고, 자기한테 맡겨달래서 맡겨주고,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로 조시내 대리 징계 처리까지 내가 했는데.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한 건 난데, 왜 저 녀석한테 공이 넘어가나.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회의 내내 지헌은 기분이 착잡했다. 정오와 기훈은 더욱 사이가 돈독해진 것 같았다. 정오에게도 실망스러웠다. 아니, 미안하다는 말은 맡겨놓은 거 찾아가듯이 받아냈으면서, 고맙다는 말은 안 해? 나한테 고마운 건 없어? 내내 뚱한 표정으로 제작회의를 지켜보던 지헌은 회의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떠났다. 집무실로 가는 복도에서 승규와 만났다.

16551143680654.jpg“표정이 왜 그러냐.”

16551143586121.jpg“내가 왜.”

16551143680654.jpg“평소보다 조금 더 떫은 표정인데?”

승규가 표정을 짚어내자 지헌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집무실로 들어간 지헌은 소파에 드러누울 듯이 털썩 앉았다.

16551143680654.jpg“조시내 대리 관리본부로 보냈더라.”

16551143586121.jpg“어.”

지헌이 일 얘기를 할 기분이 아닌 것 같아서 승규는 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실은 그 부탁을 하려고 지헌을 찾아온 것이었다.

16551143680654.jpg“다음 주 월요일 알지? 시간 비워놨지?”

16551143586121.jpg“뭐? 무슨 시간?”

16551143680654.jpg“야, 그걸 까먹으면 어쩌냐. 도빈이 앞에서 우리 집에 또 오겠다고 약속했잖아. 기억 안 나?”

아, 그거……. 그제야 지헌은 기억이 났다. 눈이 맑고 얼굴이 하얀 여자아이. 인형처럼 예뻤던 그 아이. 그 아이와 섣불리 약속이란 걸 해버렸다. 언젠가의 월요일에 또 만나기로. 엄청 대충 한 약속이었는데 승규가 그걸 다시 끄집어낼 줄은 몰랐다.

16551143586121.jpg“애들이 기억하긴 해?”

16551143680654.jpg“그럼. 당연하지!”

16551143586121.jpg“…….”

16551143680654.jpg“애들이랑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 거야. 애들은 그런 약속 기다리는 재미로 산다고. 네가 아빠가 돼야 내 심정을 알 텐데, 결혼할 낌새도 안 보이니…… 너 그날 약속 있는 건 아니지?”

약속은 없다. 별다른 스케줄도 없어서 회사에 있을 예정이었는데 승규가 조르니 난감해졌다. 애들이랑 노는 건 못 하겠는데. 어떻게 대해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16551143586121.jpg“자신 없는데.”

16551143680654.jpg“좀 와주라!”

지헌이 약한 모습을 보이니 승규가 목소리를 높였다.

16551143680654.jpg“아빠 체면 좀 세워주라, 좀! 우리 도빈이가 너 보고 싶다잖아.”

16551143586121.jpg“도빈이가 아니라 도빈이 여자친구겠지.”

16551143680654.jpg“그래! 아무튼! 우리 도빈이 체면 좀 세워주라!”

승규는 서운한 감정을 과장하여 드러냈다.

16551143680654.jpg“내가 뭐 승진을 시켜달래, 우리 도빈이 취직을 시켜달래. 그저 다음 주 월요일에 내 손 잡고 우리 집에 한 번만 가달라는 거, 그거 하나 못 들어줘? 친구가?”

16551143586121.jpg“네 손을 왜 잡아.”

16551143680654.jpg“아니, 말이 그렇다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해?”

친구는 정말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승규는 자신이 너무 제 말만 했다는 생각이 들어 반성하며 그의 안부를 물었다. 가장 재미있을 것 같은 화제로.

16551143680654.jpg“이정오 대리랑 진전은 있어?”

가볍게 물었는데, 지헌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승규가 지헌의 앞에 바로 앉자 지헌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16551143586121.jpg“내가 아빠를 닮았대.”

16551143680654.jpg“……응?”

16551143586121.jpg“내가 자기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았다더라.”

16551143680654.jpg“이정오 대리가 그래?”

16551143586121.jpg“…….”

16551143680654.jpg“하. 난감하다.”

어찌 이런 비극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닮았다고 하는 여자와는 그 무엇을 시작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친구가 힘든 사랑을 시작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16551143680654.jpg“그래도, 그 마음이 막막하긴 하지만, 여지는 있지 않을까? 비호감인 것보다는 애틋한 게 낫잖아.”

그때.

16551143586261.jpg“지금 무슨 소리예요?”

문이 벌컥 열리고 은비가 들어왔다. 불청객의 방문에 두 사람의 표정이 구겨졌다. 은비 또한 마음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얼굴에 경련까지 일어날 지경이었다.

16551143586261.jpg“이정오가, 오빠한테 누굴 닮았다고 했다고?”

회의실에서 지헌의 불편한 표정을 알아본 은비는 자리를 정리하고 바로 집무실로 쫓아갔다. 집무실에는 승규와 지헌이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부속실 비서가 자리에 없는 기회를 틈타 은비는 집무실 문에 귀를 갖다대었다. 그리고 기가 막힌 말을 듣게 되었다. 이정오가 정지헌한테, 자기 아빠를 닮았다고 했다고?

16551143586261.jpg“하. 이정오가 그래? 오빠한테?”

은비는 지헌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지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헌에게 늘 예의를 차리는 성격이었지만 지금 은비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이정오, 이거 아주 불여우 아니야! 은비는 제 분을 못 참고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16551143680654.jpg“어우, 야. 채은비 과장님 화나셨나 보다. 나는 이만 갈게. 잘 수습하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연락해!”

승규는 제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집무실을 나갔다. 은비는 회의실을 정리하고 뒤늦게 자리로 돌아온 정오를 불렀다.

16551143586261.jpg“이정오 대리, 잠깐 와봐요.”

16551143651773.jpg“네?”

16551143586261.jpg“빨리.”

자리에 앉으려던 정오는 다시 복도로 나갔다.

16551143651773.jpg“무슨 일이시죠?”

확.

16551143586261.jpg“갈 데가 있어요. 같이 가죠.”

은비는 정오의 손목을 잡았다. 은비의 날렵하고 우악스러운 힘에 정오가 휘청거리다가 끌려갔다.

16551143651773.jpg“좀 놓고 가면 안 돼요?”

16551143586261.jpg“빨리 따라와.”

정오가 거부하자 은비가 정오를 잡은 손을 털어내듯 팽개치고서 앞서 걸었다. 이미 기분이 나쁜 상태였지만 은비가 하는 짓을 지켜보고 싶어서 정오는 은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은비가 정오를 데리고 간 곳은 지헌의 집무실이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정오를 알아본 지헌의 눈이 커졌다.

16551143586261.jpg“이정오, 네가 말해봐.”

은비는 지헌과 정오를 마주 세워놓고 정오에게 따졌다.

16551143586261.jpg“너, 네 아빠 본 적 없잖아. 친아빠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정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16551143586261.jpg“고1 때 너네 엄마가 우리 선생님 붙잡고 했던 얘기라고. 내 딸 좀 봐달라고.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태어났지만, 한 번도 엄마 속 썩인 적 없는 딸이라고.”

16551143651773.jpg“…….”

16551143586261.jpg“너, 미혼모 가정이잖아. 아니야?”

16551143651773.jpg“…….”

16551143586261.jpg“아니니? 아니면 내가 사과하고.”

정오는 엉덩이에 붙인 주먹을 꽉 쥐었다. 이상한 감정이 울컥거렸다. 내가 정지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 7년 전의 정지헌에게는 말해줄 수 있었고 말해주었지만, 지금의 정지헌에게는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까발려졌다. 비참했다. 은비는 헛웃음을 크게 터트리고는 말을 이었다.

16551143586261.jpg“뭐? 지헌 오빠가 너네 아빠를 닮아?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16551143586121.jpg“채은비, 그만해.”

보다 못한 지헌이 은비에게 말했다. 하지만 은비는 멈추지 않았다.

16551143586261.jpg“얘가 오빠한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접근했다고!”

16551143586121.jpg“채은비.”

16551143651773.jpg“거짓말 맞습니다. 이사님.”

그런 지헌의 말을 막은 건 정오였다.

16551143651773.jpg“사실은 아빠가 아니라 오빠예요. 이사님은 제 아빠가 아니라 전남친을 닮은 거였어요.”

눈물을 꾹 삼키고 진실을 말했다.

16551143824039.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