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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사랑이란 (32/183)

32. 사랑이란2021.08.18.

오후의 바둑학원. 예나는 바둑판에 바둑돌을 하나씩 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바둑을 잘한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랑 엄마는 바둑을 못한다. 그럼 나는 왜 바둑을 잘할까?

16551143305764.jpg‘혹시 우리 아빠가 바둑을 잘했을까?’

정오는 예나에게 아빠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아빠’라는 말을 꺼내면 정오는 유연하게 말을 돌렸다. 예나의 생각도 엄마의 화제를 따라 자연스럽게 쓸려갔다. 아빠가 별로 궁금하지 않았고, 아빠와 싸울 필요 없이 자신이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자신이 엄마의 영원한 짝꿍이란 사실에 만족했다. 그동안은 그랬는데, 도빈과 친구가 된 이후에 아빠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예나였다. 도빈은 착하고 좋은 친구지만 가족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다. 아빠 얘기도 항상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도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 얘기를 하지만 아빠가 없는 예나의 입장에서 도빈의 이야기는 이따금 공감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바둑 공부 시간에 바둑은 안 하고 알까기만 하고 있는 친구 도빈을 빤히 쳐다보던 예나가 물었다.

16551143305764.jpg“너는 아빠가 있어서 뭐가 좋아?”

예나가 먼저 아빠 얘길 꺼내다니. 도빈이 반가운 마음으로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16551143305777.jpg“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돈을 벌어와서 우리가 먹고산대.”

그럼 아빠란 돈을 벌어와서 필요한 건가? 우리 엄마랑 할머니도 돈을 버니까, 나는 아빠가 필요 없어도 되는 건가? 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16551143305764.jpg“그리고 또 뭐가 좋아?”

16551143305777.jpg“음…… 수영장에 갈 때 좋아.”

16551143305764.jpg“왜?”

16551143305777.jpg“나는 남자라서 목욕할 때는 엄마를 따라가면 안 되고 아빠랑 가야 한대. 화장실 가는 것처럼.”

16551143305764.jpg“그럼 나는 여자니까 아빠가 필요 없네? 그치?”

16551143305777.jpg“응. 그렇겠다.”

끄덕인 도빈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예나를 바라보았다.

16551143305777.jpg“아, 근데 또 있어. 병원에 갈 때 안아줘서 좋아.”

16551143305764.jpg“아빠가 안아줘?”

16551143305777.jpg“응. 엄마랑 갈 때는 그냥 손잡고 가는데, 아빠랑 갈 때는 아빠가 이렇게 안아줘.”

도빈은 인형을 끌어 안아드는 시늉을 했다.

16551143305777.jpg“아빠는 힘이 세니까.”

지금까지 도빈이 했던 말들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안아준다는 말에는 왠지 가슴 안의 무언가가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았다. 아빠는 힘이 세서 병원에 갈 때 안아줄 수 있구나.

16551143305777.jpg“예나야, 나도 아빠가 되면 병원 갈 때 애기를 안아줄 거야.”

예나가 잠잠히 끄덕이는 동안 도빈은 자기 어필을 잊지 않는다. 도빈의 고백을 듣지 못한 예나는 그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16551143305764.jpg“응. 나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

16551143305777.jpg“그럼 내가 물어볼까? 우리 아빠한테 너네 아빠도 해달라고.”

16551143305764.jpg“아마 안 될걸?”

16551143305777.jpg“될 수도 있잖아. 우리 아빠는 나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댔어.”

도빈은 이렇게 아빠의 좋은 점을 또 말했다. 예나는 쉽게 거절하진 못하고, 아마 안 될 거라고 도빈에게 두 번 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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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원 수업이 끝나고 예나를 식당에 바래다준 후. 집으로 가며 도빈이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진서에게 말했다.

16551143305777.jpg“엄마, 예나랑 나랑 아빠를 나눠 갖기로 했어.”

16551143363606.jpg“그게 무슨 소리야?”

16551143305777.jpg“예나는 아빠가 없어서.”

도빈은 흐뭇하게 웃었다. 뿌듯했다. 사랑이란. 엄마, 아빠는 자신을 사랑해서 뭐든 주고 싶다고 했다. 도빈 또한 그랬다. 예나가 좋아서 예나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예나에게 줄 것이 있어서 행복했다. 진서는 웃음을 꾹 눌러 참고서 도빈에게 말했다.

16551143363606.jpg“도빈아, 그럼 예나랑 결혼 못 하는데 괜찮겠어?”

16551143305777.jpg“왜?”

16551143363606.jpg“아빠가 같으면 둘이 남매가 되는 거잖아. 남매끼리는 결혼 못 해. 몰랐어?”

부처님의 미소를 짓고 있던 아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16551143305777.jpg“그럼 어떡해? 벌써 예나랑 약속했는데?”

16551143363606.jpg“그러게. 큰일이다.”

청천벽력 같은 대답에 도빈의 눈동자가 인생이 무너진 듯 흔들렸다. 사실 아직 예나에게 결혼하자고 얘기하지 못했다……. 지난주 목요일 예나의 생일에, 기껏 편지와 삼행시를 준비해갔건만 어쩌다 보니 보여주지 못했다. 엄마가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며 울음을 터트린 예나를 웃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개다리춤과 마술 세 가지를 먼저 선보인 것이다. 엄마 엄마, 하고 우는 친구에게 결혼 결혼, 하며 매달릴 수도 없었고. 사랑이란 그런 것……. ‘어쩌다 보니’로 흘러가 뜻밖의 결정을 만드는 것. 그렇게 자신의 결정을 뿌듯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미 약속을 했는데 이를 어쩐단 말인가. * 저녁 시간. 정오와 기훈은 자리에서 대화를 나눴다.

16551143363646.jpg“대리님, 대리님 노트북 바이러스는 누가 일부러 심어놓은 거래요?”

1655114336365.jpg“글쎄. 그건 모르겠대. 요즘 유행하는 바이러스라 기획팀의 누군가도 고생했다고 하더라.”

16551143363646.jpg“아…… 우연히 걸린 건가?”

1655114336365.jpg“그런가 봐. 근데 클라우드에 내가 올린 파일을 누가 일부러 삭제한 건 맞대.”

16551143363646.jpg“오. 범인이 있었군요. 역시!”

1655114336365.jpg“응. 적어도 내가 잘못한 건 아니라는 게 밝혀졌으니 다행이지 뭐.”

16551143363646.jpg“범인을 찾을 수는 없고요?”

1655114336365.jpg“공용 컴퓨터에서 작업해서 알 수가 없대.”

16551143363646.jpg“너무 안타깝네요.”

사무실이 조용하여 두 사람의 대화는 잡음 없이 주변에 전달되었다.

16551143363646.jpg“아! 대리님! 어쩌면 범인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가까이, 제작 1팀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조시내 대리가 움찔했다. 정오와 기훈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1655114336365.jpg“응? 어떻게?”

16551143363646.jpg“지문인식 마우스라고 들어본 적 있으세요?”

1655114336365.jpg“아, 그런 게 있어?”

16551143363646.jpg“네. B실이었나 C실이었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언젠가 누가 그쪽 공용 컴퓨터랑 마우스가 고장 났다고 전산관리실에 항의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전산관리실 직원이 컴퓨터랑 마우스 교체하면서 마우스를 지문인식으로 바꿨거든요. 마우스의 엄지가 닿는 부분 있죠? 거기의 지문이 컴퓨터에 저장되는 거예요. 그 정보로 누가 컴퓨터를 자꾸 고장내는지 알아볼 수 있죠.”

1655114336365.jpg“오, 그래? 한번 알아봐야겠다. 범인이 어디 공용 컴퓨터를 썼는지.”

자리에 앉아 있는 시내의 손이 마구 떨렸다.

16551143363646.jpg“네. 빨리 알아보세요. 보안용이라 정보가 통신으로 전송되진 않고 암호화시켜서 컴퓨터에 그대로 저장만 되는 시스템인 것 같았어요. 컴퓨터에 남아 있는 정보가 지워지면 안 되잖아요.”

1655114336365.jpg“그러게. 혹시 지금 유행하고 있다는 그놈의 바이러스라도 걸린다면 범인은 영원히 못 잡을 수도 있겠네. 빨리 움직여야겠다. 민감한 정보라 관리실에서 협조해줄지 그것도 장담할 수가 없고.”

16551143363646.jpg“힘드시면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 제 동기가 전산관리실에 있거든요.”

1655114336365.jpg“오! 정말 고마워 기훈 씨!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가자!”

16551143363646.jpg“네!”

대화는 여기까지. 정오와 기훈은 자리에 앉아 업무를 이어갔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시내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오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정오의 노트북에 바이러스를 심은 건 잘 넘어간 것 같고, 문제는 C출력실의 공용 컴퓨터였다. 시내는 지난 목요일, C출력실에서 이정오가 클라우드에 올린 자료를 삭제했다. 모든 게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의 마우스가 지문인식 마우스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시내는 USB를 챙겨가지고 몰래 C출력실로 향했다. 회사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저녁때라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도 발소리를 죽여 C출력실에 닿았다. 아주 작은 방. 구석의 컴퓨터는 그때의 컴퓨터 그대로였다. 마우스도 그랬다. ……그랬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때는 긴장한 상태라 그런 것까지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 하여튼 지금의 마우스는 지문인식 마우스가 확실했다. 기훈의 말처럼 오른손의 엄지가 닿는 부분이 독특했다. 그곳으로 지문을 인식하는 것 같았다. 시내는 엄지를 휴지로 감싸고서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16551143421973.jpg‘하지만, 내 지문 정보를 어디서 찾지?’

지문 정보는 컴퓨터에 저장돼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시내는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모른다. 이것저것 눌러보던 시내는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흠칫 놀랐다.

16551143421973.jpg‘빨리 해결해야 해!’

어쩔 수 없었다. 최후의 방법을 쓰는 수밖에. 시내는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건너건너 아는 사람이 만들어주었는데 아주 간편했다. USB 단자에 꽂기만 하면 컴퓨터 안에 알아서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신박한 물건이었다. 시내는 컴퓨터에 USB를 꽂고 컴퓨터를 껐다가 켰다. 정오의 노트북 모니터에서 한번 보았던 장면이 우르르 지나갔다.

16551143421973.jpg“됐다!”

1655114336365.jpg“뭐가 됐어요?”

16551143421973.jpg“헉!”

시내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 소리에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았다. 정오와 기훈이 저승사자처럼 서 있었다. 시내의 안색은 새빨갛게 변했다.

16551143421973.jpg“어어…… 여기 어쩐 일이세요? 대리님?”

1655114336365.jpg“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조시내 대리님, 지금 뭐 하세요?”

16551143421973.jpg“추, 출력하려고 온 거잖아요!”

1655114336365.jpg“지금 출력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에 바이러스를 심고 계신 것 같은데요.”

16551143421973.jpg“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요!”

1655114336365.jpg“지금 화면이 그렇게 뜨는데요, 뭘. 제 노트북에 있던 그 바이러스네요. 왜 멀쩡한 컴퓨터를 망가뜨리고 계세요?”

16551143421973.jpg“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 컴퓨터를 쓰려고 보니 이런 화면이 떴다고요!”

시내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서 악을 써댔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때 기훈이 저벅저벅 다가와 컴퓨터 본체에 꽂힌 USB를 빼냈다.

16551143363646.jpg“이 USB는 뭐고요?”

16551143421973.jpg“…….”

16551143363646.jpg“이 USB 조 대리님 거잖아요. 1개월 전인가, 웨딩박람회 가셨다가 기념품으로 받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기훈이 그런 걸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시내는 계속 우겼다.

16551143421973.jpg“웨딩박람회를 저만 갔겠어요? 그리고 저는 그런 USB 받은 적 없다고요. 제가 받은 건 다른 거예요!”

1655114336365.jpg“네. 알겠습니다. 정확한 사실은 저 카메라가 증명해주겠죠.”

한숨을 푹 쉰 정오가 출력실 천장 구석을 가리켰다. 시내의 얼굴은 이번엔 혼비백산이 되었다. 여긴 카메라가 없는 곳이었는데! 언제 저런 걸!

1655114336365.jpg“여기서 클라우드에 제가 올린 파일을 지운 사람은 조 대리님이었군요.”

16551143421973.jpg“증거 있어요? 증거 있냐고요!”

1655114336365.jpg“클라우드에 있던 파일을 지운 장소는 여기였어요. C출력실. 대리님은 그 정보를 지우러 여기 오신 거 아닌가요?”

16551143421973.jpg“아닌데요!”

1655114336365.jpg“네. 그럼 그건 아니라고 쳐요. 제 노트북에 바이러스를 심은 걸 부정하실 수는 없겠죠.”

16551143421973.jpg“무슨 헛소릴 하시는 거예요. 대리님 피해망상에 개가 웃겠어요.”

증거는 없다. 지워진 과거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이대로 계속 우기면 그들도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오도 물러나지 않았다. 정오는 기훈에게 USB를 넘겨받았다.

1655114336365.jpg“그건 이 USB를 분석해보면 알 수 있겠죠. 이 안에 든 바이러스가 제 노트북을 망가뜨린 바이러스와 같은지 다른지. 만약 같은 거라면 그 안에 심어진 암호화 코드들도 일치하겠죠.”

시내의 등골이 싸해졌다. 그때 지헌이 몇몇의 직원들과 함께 나타났다.

16551143508514.jpg“너무 시끄럽네요. 무슨 일이죠?”

1655114336365.jpg“조 대리님이 직접 말씀하시죠.”

정오가 시내에게 말했다. 완전히 걸려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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