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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모든 것을 원해 (54/183)

54. 모든 것을 원해2021.11.03.

은엽은 퇴근길에 장영미 여사의 저택에 방문했다. 지헌이 해외 출장을 떠난 지금이 딱 적기였다. 장영미 여사 개인 소유의 부동산 분쟁에 대한 자문을 주겠단 명목이었지만 속셈은 따로 있었다. 영미 또한 은엽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몇 번을 망설이던 영미는 못 믿겠다는 듯 물었다.

1655114969109.jpg“지헌이가 대뜸 그런 말을 하더라. 은비랑 헤어졌다고. ……그거 사실이니?”

은엽은 별일도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16551149691096.jpg“지헌이가 그러던가요? 사실 두 사람은 헤어졌다 만났다 한 적이 더러 있어서 잘 모르겠네요.”

1655114969109.jpg“아, 그랬니? 난 몰랐는데.”

16551149691096.jpg“지헌이랑 헤어져 있을 때에도 은비가 어머니께 매번 전화 드렸다고 하더라고요.”

1655114969109.jpg“아유. 이렇게 지고지순한 애가 어디 있을까.”

영미가 한탄하니 은엽이 엷게 미소 지었다.

1655114969109.jpg“이렇게 착한 애한테, 지헌이는 웬 변덕인지 모르겠다.”

16551149691096.jpg“어머니, 여쭤볼 게 있습니다.”

그런 영미에게 은엽이 조심스럽게 용건을 꺼냈다.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16551149691096.jpg“혹시 7년 전에 지헌이한테 여자친구가 있었습니까?”

은엽의 질문에 영미의 눈이 커졌다. 잠시 후 영미는 은엽의 시선을 피하고서 시치미를 떼었다.

1655114969109.jpg“여자친구라니. 너도 알잖아. 우리 지헌이는…….”

16551149691096.jpg“저한테는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은엽이 다시 요청했다. 영미는 딱 잡아떼기가 힘들어졌다.

1655114969109.jpg“진짜로 별거 아니야. 여자친구라고 할 수도 없었어. 그냥 우리 애를 따라다니던 이상한 애가 하나 있었고, 내가 알아듣게 잘 말한 뒤로 다시는 연락 안 한다. 7년 전에 연락 다 끊겼어. 지헌이는 아무 흉 없어.”

은엽은 속으로 깊이 안도했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영미는 현재 이정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는 게 확실했다. 7년 전에 성우를 시켜 이정오를 차단한 뒤에 모든 일이 깨끗이 해결됐다고 믿고 있는 거였다. 그렇다면 해결이 조금 더 쉬워질지도.

16551149691096.jpg“어차피 가벼운 만남이었을 거라는 거, 저도 이해해요. 그때의 지헌이는…… 그랬으니까요.”

은엽은 영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16551149691096.jpg“하지만, 어머니께선 지헌이를 감싸주고 싶으시겠지만…… 제가 본 친구로서의 지헌이는 좀 다릅니다.”

1655114969109.jpg“…….”

16551149691096.jpg“기억상실증 덕분에 지헌이 주변이 한번 정리됐지만, 그래도 지헌이의 본성이 남아 있긴 합니다. 4년 전의 소문은 잘 아시죠? 지헌이가 건드렸던, 혹은 건드렸다고 소문이 난 여자들이요. 정말 너무 심했죠. 기억이 사라지고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1655114969109.jpg“…….”

16551149691096.jpg“그런 지헌이를 잘 잡아놓은 사람이 은비고요.”

한 사람의 사생활을 조작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이 집안의 모자는 서로 친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의 신뢰를 깨뜨려 양쪽 모두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할 것이다.

16551149691096.jpg“지헌이 잡아줄 사람은 은비밖에 없습니다. 어머니.”

은엽은 영미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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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규는 이정오에 대한 조사 결과를 이메일로 받았다. 떳떳하지 않은 일을 했단 사실에 손이 부들거렸다. 이정오. 30세. 그녀의 나이, 사는 곳, 학력, 직업, 가족. 한 여자의 성실하게 살아온 이력이 몇 장의 문서에 담겨 있었다. 어머니도 미혼모, 그녀도 미혼모라는 것이 특별하다면 가장 특별한 얘기였다. 과거에도 남자가 있었는지, 아이의 아빠가 있었는지까지 알 수는 없었다. 이정오는 집과 어머니의 가게와 회사 외에 다른 곳에 머무는 일이 전혀 없었다. 최근에는 그녀의 상사, 성미란 팀장의 수술로 병원에 자주 들렀다는 기록만 있었다. 하품이 나올 만큼 별것 없는 보고서였다. 그러나 문서를 술술 읽어 넘어가던 승규의 눈동자는 아이의 사진에 이르러 멈칫했다. 눈을 비비고서 사진을 확인한 승규는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와 아이의 이름을 확인했다. 딸 이예나. 7세.

16551149730305.jpg‘그 예나가 이예나라고?’

승규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내 아들 도빈이의 첫사랑 예나가, 이정오 대리의 딸? 승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서 길게 탄식했다.

16551149730305.jpg‘아. 뭐가 이렇게 꼬이냐…….’

설마, 이정오가 예나를 이용해서 정지헌한테 계획적으로 접근한 건 아니겠지. 내 부인도 그런 이정오에게 이용당한 건 아니겠지? 왠지 찜찜했다. 친구를 사랑하는 승규의 마음은 시름에 가득 찼다. 이 사실을 소중한 친구에게 어떻게 털어놓아야 할지. * 한 시간 전, 지헌은 정오가 호텔 1층 데스크 앞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속으로는 애타게, 그녀가 어서 로비를 벗어나길 바라면서도 그는 다른 압력을 가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객실로 돌아와 그녀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마지막 결정은 그녀 본인이 하길 바랐다. 그리고 길고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카드키를 쥐여줬는데도 노크를 하는 바람에, 처음엔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여 지헌의 긴장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부끄러운 듯 발긋해진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금세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1655114976502.jpg“이사…….”

그녀가 자신을 부르기도 전에, 낚아채듯 당겨 품에 안았다. 끌려 들어오는 바람에 중심을 잃은 그녀가 그의 품에 폭 파묻혔다. 그런 그녀를 붙들어 세워 바라보았다. 방 안에 별을 끌고 들어온 듯 반짝거리며 파르르 흔들리는 눈동자는 불안함 같기도 했고, 다가올 시간에 대한 체념 같기도 했고, 어떤 갈망 같기도 했다. 지헌은 그걸 모두 삼켜버리고 싶었다. 정오는 사실 조금 겁이 났다. 목 뒤쪽으로 들어온 뜨거운 손가락들에 정오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긴 시간 예열된 듯 높은 체온의 몸이 조금 걱정될 정도였다. 정오는 그의 열기운을 확인하려는 듯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재빨리 입술을 내렸다. 이에 반응하며 그의 뺨에 올린 손이 스륵 내려왔다. 입술로 전해지는 체온은 더욱 뜨거워 심장박동이 점점 더 거세지는데도, 그의 입술이 온전히 닿자 어찌 된 일인지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셨다. 그의 숨결로 읽을 수 있는 욕망의 덩어리들이 정오의 다른 생각들을 헤집어놓았다. 그가 단정하게 입은 블라우스 앞섶의 단추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놀란 그녀가 숨을 들이켜자 그가 기회를 이용하려는 듯 미끄덩 더 깊게 침입했다. 언젠가 다 겪어본 일인데도 정오는 처음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입술을 떼자 ‘하아’ 하며, 그녀의 입술 사이로 갇혀 있던 옅은 숨이 빠져나갔다. 그는 그 모습을 감상하는 듯 지그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16551149765025.jpg“키스만 할 거라고 생각해?”

그가 놀리듯이 물었다. 반드르르 윤기가 흐르는 입술로. 열렬한 눈빛과 미소를 같이 보고 있으니 그가 더욱 얄궂고 탐욕스러워 보였다. 어제 분명히 각오하란 경고를 들었는데, 아니라고 순진한 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 또한 순해 빠진 어린애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벅찼다. 지헌은 미약하게 계속 변하는 그녀의 표정을 주시했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좀 더 흐트러진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걸 확인하면 자신은 더 미쳐 날뛰리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16551149765025.jpg“어떻게 할까.”

마치 그녀에게 마지막 선택을 맡기려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물었다. 언제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듯이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에 이미 홀딱 빠져 있었다.

1655114976502.jpg“다 알잖아요.”

그가 놀리니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대답했다. 자신이 왜 여길 왔는지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물어보는 그를 원망하는 투였다.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대답은 다 들은 걸로.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체온이 담긴 손끝이 단추를 톡톡 튕겨내는 동안 거친 탄식이 그녀의 뺨을 느릿하게 쓸었다. 제 몸을 보여주기 부끄러운 것처럼 그녀의 어깨가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순간순간 그녀의 두 팔을 한쪽으로 붙잡고 싶은 충동 같은 것이 안에서 꿈틀거렸지만 지헌은 그 아슬아슬한 순간을 충분히 즐겼다. 왠지 이 여자가 부끄러워하면서도 그의 손길에 제 몸을 맞추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헌은 그녀를 침대에 고이 눕히고 단숨에 그 위를 점령했다. 그런데 그녀가 돌연 상체를 일으켰다. 그 또한 멈칫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당장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은 눈이 그의 드러난 몸을 응시했다. 상처. 정오가 바라보는 곳은 7년 전의 수술 자국이었다. 급기야 그녀는 손끝으로 상처를 더듬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1655114976502.jpg“괜찮아요?”

16551149765025.jpg“뭐가.”

1655114976502.jpg“사고…… 났었잖아요.”

지금 이 순간. 참 엉뚱하게도. 지헌은 7년 전의 까마득한 사고를 묻는 정오가 귀여워서 헛웃음을 지었다. 정오의 얼굴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1655114976502.jpg“상처가 깊어 보여요.”

16551149765025.jpg“갈비뼈가 나갔었으니까.”

1655114976502.jpg“안 아파요?”

그때의 아픔 또한 기억을 따라 증발해버렸을까. 당시의 지헌은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지만 고생스러운 기억은 별로 없었다. 다행히 장기에도 별 손상이 없었다. 지헌은 가벼운 어투로 대답했다.

16551149765025.jpg“여태 아프면 문제가 많은 거죠.”

1655114976502.jpg“기억은 여태 없잖아요.”

그녀가 고집을 부리듯 대꾸했다. 기억. 기억이 중요한가? 나의 과거가 어떤 재질이었는지 모르는데? ‘더 크라운’을 다녀온 뒤로 기억에 대한 마음이 무거웠다. 모르는 게 더 나은 과거를 마주하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도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하지 않나?

16551149765025.jpg“내가 기억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1655114976502.jpg“그래야죠. 자그마치 3년간의 기억인데.”

그녀의 표정에는 어김없이 솔직한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가슴이 따끔거리면서도 그녀의 염려가 기분 좋았다. 그는 오랫동안 이런 상태로 관심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5114976502.jpg“……어떻게 살았어요?”

이번엔 꽤 심각했다.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 닥칠 일들을 조금이라도 유예해보려는 앙큼한 심산인가 싶어 지헌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으니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1655114976502.jpg“7년 동안이요. 기억을 잃으면, 나를 잃은 것 같잖아요.”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또한 시린 눈이 습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어둑해지려는 마음을 곧장 집어넣었다.

16551149765025.jpg“언젠가 말했듯이, 재미없게.”

정말로 그랬다. 세상의 모든 것에 지헌은 별 흥미가 없었다. 그녀를 알기 전의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가슴 뛰는 순간은 지금이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과거의 상처만 어루만지고 있는 어여쁜 여인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우면서도, 이 여인에게 나와 같은 갈급한 욕망은 없나 싶어 서운하고 초조한 마음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16551149765025.jpg“왜 거기만 자꾸 만져요. 만질 데 많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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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전혀 아프지 않다고. 오히려 그렇게 건드리면 감질나 미칠 것 같다고. 그 경고를 해주려다 안으로 삼켰다. 지적해주지 않았다면 한나절을 집중하여 만지고 있을 듯한 손끝이 흠칫 물러났다. 다른 데를 만져보라 권했더니 아예 손을 놓아버리네. 어떤 부분에서는 참 대담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을 만큼 조심스러운 그녀의 행동은 매 순간 그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한번 놀리니 다시 겁먹은 눈동자로 돌아왔다. 모든 것을 각오하고 찾아왔으면서, 무엇을 그렇게까지 겁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어서 옷 속을 헤집는 그 절박한 마음이 무언지 당신은 모르겠지. 지헌은, 그녀는 갖고 자신의 마음은 지키려 했던 그 고고한 오만이 철저히 무너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의 모든 것을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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