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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저도 사랑해요 (55/183)

55. 저도 사랑해요2021.11.06.

16551149873471.jpg“너무 취하신 것 같은데.”

옆에 앉은 잘생긴 남자가 은비를 보며 말했다. 혼자 바에 왔다가 남자와 얘기를 나누게 된 은비는 검지를 흔들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바텐더가 눈치껏 은비의 잔에 술을 채웠다. 은비는 단번에 술을 들이켜고 만족스럽게 빙긋 웃었다. 옆에 앉은 남자는 더욱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16551149873471.jpg“그만 마셔요.”

은비가 바텐더를 시켜 술을 더 주문하려고 할 때 남자가 말했다.

16551149873481.jpg“그쪽이 뭔데 감히 나를 막아요.”

은비가 발그레한 얼굴로 따졌다.

16551149873471.jpg“몸 다 상하겠어요.”

남자가 상냥하게 말했다. 힘있게 노려보았던 은비의 눈동자가 금세 풀렸다.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일부러, 애써 지은 눈물이 아니라 정말로 가슴에서 흘러나온 눈물이었다. 정지헌 하나만 바라고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남자의 한마디에 흔들렸다. 이토록 쉽게도 흔들릴 수 있는 거였다. 정말로 진심으로, 나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었던가? 은비는 오늘 처음 만난 남자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정오는 잠잠한 그의 눈 속에서, 그녀의 모든 것을 점령하고자 하는 욕구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녀의 솜털 하나까지 놓치지 않을 기세로 집요하여 정오는 문득 부끄러워졌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니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7년 전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들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넓은 가슴, 선명한 복근의 옆에 자리한 상처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니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긴장하여 호흡을 숨긴 만큼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그 호흡을 진정시키려는 듯 그가 제 숨결을 나누어주었다. 그 안에도 떨림이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그 또한 긴장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그 위안은 잠시. 어깨에 걸쳐진 블라우스 속에서 등줄기를 쓸고 올라간 커다란 손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멈추었다. 손끝이 제게 닿은 것을 툭 건드리자 힘없이 봉인이 풀려버렸다. 언젠가는 분명히 익숙했던, 낯선 부끄러움에 정오는 다시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의 능숙함에 정오는 묘하게 서운해졌다. 그 마음을 드러낼 수가 없단 사실이 서럽기도 했다. 어느새 그녀를 다시 침대 시트 위에 고이 눕힌 그가 정오의 몸 곳곳에 제 체온을 실어날랐다. 그녀가 저항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가 손목을, 허리를 꽉 눌러오면 저절로 힘이 빠졌다. 그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새하얀 피부에는 발긋한 자국이 남았다. 서른세 살의 그는 스물여섯 살의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간극에 정오는 계속 몸이 저릿저릿했다. 움찔하며 눈가에 자꾸 이슬이 맺혔다. 얕은 자극들에 눈앞이 뽀얘져서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제 몸 아래 그녀를 붙잡아두고, 그 윗공기를 군림하게 된 지헌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감탄사가 되어 길게 흘렀다. 길고긴 인내의 시간 끝에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고스란히 눈에 담게 되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처럼 눈이 시리고 심장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단순한 쾌감을 넘어 신앙하는 대상을 마주한 듯한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머리까지 저려왔다. 그녀가 정말로 도망갈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데, 본능은 무언가 다른 판단을 내린 듯 그녀를 붙잡고서 놓지 않았다. 내가 그대를 원하는 만큼 그대도 나를 원했으면 한다.

16551149873488.jpg“말해요.”

16551149873492.jpg“…….”

16551149873488.jpg“싫으면 싫다고.”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느냐는 말이었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눈을 하고서 허락을 구하는 건 참 못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그의 진심이라는 걸 정오는 잘 알고 있었다. 너무 마음을 다 주지는 말라고, 언젠가 또다시 상처 입을 수도 있다고. 나에게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위해 그를 찾아왔고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이성적인 판단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면서도 그의 목소리, 숨소리, 그의 눈빛, 행동에 몸이 옥죄는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정오, 너는 예나 지금이나, 내가 기억을 잃었든 잃지 않았든 내 것이 될 거야. 본능이 드러난 그의 눈빛은 그런 말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예술가의 조각상처럼 고르게 근육이 분포돼 있는 몸에 조명이 비추어 음영을 만들었다. 모든 것에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또 너무나 얄미운 남자였다. 이제 뒤돌아볼 수 없는 길. 그가 그랬듯이, 그녀 또한 그에게 투덜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16551149873492.jpg“당신은 진짜 못됐어요.”

16551149873488.jpg“그렇지.”

그의 손아귀에 꽉 잡혀서 하는 말은 역시나 가소롭게 여겨졌을까. 그녀의 지적을 곧장 인정하며 지헌이 느른하게 미소 지었다.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가 그녀의 위로 서서히 내려앉았다. 능숙한 척 다 아는 척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꾸 긴장하게 되었다. 심장이 맞닿으니 두 배로 박동이 빨라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그녀의 표정을 주시하고 있기에 정오는 울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그가 당황하여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이 하얗게 그리고 까맣게 변하며 많은 감정들을 실어날랐다. 아스라한 아픔의 끝에 밀려오는 충만한 열기가 그녀의 마음을 꽉 채웠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려는 것 같았다. 정지헌이 얼마나 완고한 존재인가를 인식하게 하려는 듯했다. 결국은 그 존재감을 이기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16551149873488.jpg“고개 돌려봐요.”

16551149873492.jpg“싫…….”

16551149873488.jpg“나 좀 봐.”

그녀가 끙끙거리면서도 눈물을 보여주기 싫어 고개를 돌려버리자 그가 턱을 붙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지헌은 어깨를 내려 그녀의 눈물 자국을 따라 입맞춤을 이어가며 시트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고이 쓸었다. 위로가 되어주고 싶었지만, 떨림을 감추지 못한 눈동자가 주는 쾌감에 자꾸 몸이 취했다. 목소리를 참으려고 끙끙거리다가 결국 견디지 못해 터져 나온 가쁜 숨이 그를 더욱 자극시켰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로 들리는 것이 채워주는 만족감과, 아직 보이지 않는 것, 아직 들리지 않는 것이 만들어내는 갈망에 그녀를 원하고 또 원하게 되었다. 알면 알수록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의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싶어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조차 아깝게 느껴질 만큼. 평생을 찾아 헤맨, 잃어버린 반쪽 같았다. 과거를 다 지우고 또다시 새로 시작해도 그녀 하나만 남는다면 모든 것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정오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지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품에 안은 순간에도 성마르게 갈증이 밀려들었다. 너는 내 거라고 끊임없이 확인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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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 새벽. 책임감이 새겨진 몸이 잠을 깨웠다. 정오는 지헌의 품 안에서 눈을 떴다.

16551149873492.jpg‘헉.’

내 몸의 반절밖에 안 되는 귀염둥이 뽀시래기만 안고 자다가 내 몸의 두 배는 되는 듯한 남자에게 안겨 눈을 뜨니 얼떨떨했다. 정오는 지헌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스르르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지헌은 굳이 일어날 필요가 없겠지만 실무진인 정오는 귀국 정리를 도와야 했다. 조심스럽게 흩어진 옷가지들을 주워입은 정오는 다시 침대 앞에 쪼그려 앉아 잠든 그를 바라보았다. 자는 건 참 예쁜데, 눈만 뜨면 왜 그렇게 사람이 야하고 못됐어? 지난밤의 여파가 여전히 자신을 괴롭히는 느낌이었다. 나도 당신의 머릿속을 괴롭힌 것이었으면.

16551149873492.jpg‘부디 나를 기억해줘.’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사실 모두 꿈인 것만 같았다. 아침이 되면 다 사라질 꿈. 잠에서 깨어나면 이 남자는 다시 자신을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꿈속에서는 행복했지. 지난밤을 떠올리니 다시 두 뺨이 달아올랐다.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난 정오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협탁에 놓여 있는 그의 휴대폰을 보게 되었다. 두근거렸다. 문자메시지만 확인해볼 수 있다면, 통화기록만 살펴볼 수 있다면. 그가 어머니와 얼마나 친한지, 그가 제 어머니를 어떻게 대하는지만 파악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녀의 여정이 훨씬 짧아질 것이다. 정오는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는 반응이 없었다. 지금도 일어나지 않으니, 간밤에 그 또한 엄청 피곤했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또 이런 기회가 언제나 올지 알 수 없다. 정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헌의 휴대폰을 터치했다.

16551149873492.jpg‘으악!’

화면이 켜지니 불빛이 눈부셨다. 정오는 재빨리 휴대폰 불빛을 차단하고서 지헌의 얼굴을 살폈다. 쿵쿵쿵쿵.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홈 화면의 아래쪽에 문자메시지함이 있었다. 메시지함을 누르려는 찰나에.

16551149873488.jpg“일어났어요?”

헉.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듯 갈라진 목소리에 정오는 얼른 휴대폰 화면을 끄고서 지헌을 향해 몸을 돌렸다.

16551149873492.jpg“네! 정리할 게 많을 것 같아서요.”

당황하여 목소리 톤을 너무 높였단 생각에 정오는 속으로 크게 후회했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16551149873488.jpg“같이 나가죠.”

16551149873492.jpg“아니,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 해서요. 내 방으로 갈게요.”

그녀가 허둥지둥 일어나자 그가 손을 쭉 뻗어 그녀의 허리를 당겼다. 털썩. 순식간에 침대 위로 정오의 엉덩이가 다시 내려앉았다.

16551149873488.jpg“여기서 씻어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길, 옅게 지은 그의 미소가 지나치게 요염했다. 지난밤을 그대로 다시 떠오르게 하는 위치였다. 아니, 흉내만 내려는 것 같진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그런 건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손잡고 나서의 진도가 쭉쭉 나갔고 몸이 이어졌을 때부터는 갈증이 가시지 않는 사람처럼 계속 원했다. 그의 과거를 알고 있는, 그의 현재도 지금 막 알게 된 정오는 덜컥 겁이 나 몸을 뒤로 물렀다. 행복했지만 그만큼 괴롭힘도 많이 당했기에.

16551149873492.jpg“……아프다고요.”

그녀의 반응은 의외로 즉각적인 효험이 있었다. 그가 깜짝 놀란 눈으로 물었다.

16551149873488.jpg“많이 아파요?”

16551149873492.jpg“뭐 그냥 좀.”

16551149873488.jpg“말을 하지.”

이내 그의 눈에서 야욕의 빛이 지워졌다. 그는 정오의 몸을 이불로 감싸고서 침대 위에 고이 누였다.

16551149873488.jpg“좀 더 누워 있어요. 얼른 씻고 나올 테니까.”

당부한 후 시간을 확인한 그는 곧장 욕실로 떠났다. 이윽고 욕실에서 쏴아아, 물소리가 들려왔다.

16551149873492.jpg“후우…….”

침대 위에 꼼짝 않고 누워 있던 정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눈앞의 휴대폰. 정오는 재빨리 화면을 터치하여 문자메시지함을 열었다. 따로 보안 설정이 되어 있지 않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메시지함에서 ‘어머니’라는 이름은 꽤 상단에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그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메시지는 ‘잘 다녀와 아들♥’이었다. 정오는 떨리는 마음으로 문자메시지를 눌렀다. 그간 어머니와 지헌이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 한 번에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건 나흘에 한 번 정도. 어머니가 길게 문자를 보내면 지헌이 짧게 답변을 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지헌이 먼저 메시지를 보낸 적은 거의 없었고 먼저 보냈다 한들 살가운 내용은 아니었다. 반면 어머니는 애교가 넘쳤다. 우리 아들, 착한 아들, 잘생긴 아들. 애교 많은 엄마와 무뚝뚝한 아들의 평범한 대화였다. 하지만 몇 계단 너머에 이르러 정오의 손이 멈추었다.

16551149933919.jpg- 사랑해 아들. 엄마 맘 알지?

16551149873488.jpg- 네. 저도 사랑해요.

그의 휴대폰을 훔쳐보는 동안 나뭇가지에 매달린 열매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던 심장이,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툭 떨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사랑한다는 말. 내게는 한 번도 해준 적 없었던 사랑한다는 말. 정오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지헌은 서둘러 샤워를 마쳤다. 정오가 아프다고 했던 것이 걱정되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쉬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신 나가면 되니까.

16551149873488.jpg“나가지 말고 여기서…….”

물기를 털며 욕실 밖으로 나온 지헌의 말은 금세 끊겼다. 이정오가 떠났다. 묵묵히 걸어온 지헌은 빈 침대에 털썩 앉았다. 함께 누웠던 침대엔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는데, 그녀는 없었다. 지헌은 협탁 위에 놓아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에 시간을 확인하고 놓아두었던 휴대폰은 조금 삐딱하게 놓여 있었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도 그녀는 몰래 휴대폰을 만지려고 했었다.

16551149873488.jpg‘그때 말 걸지 말고 그냥 둘 것을 그랬나?’

가장 최근에 사용했던 어플 리스트에는 문자메시지함이 떠 있었다. 그 또한 문자메시지함을 눌러보았다. 일 얘기가 많고, 회사 기밀도 약간 있는 것 같고……. 허탈한 한숨이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그녀는 무엇을 들여다보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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