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로미오와 줄리엣2021.11.10.
컥컥…….
“꺅!”
목이 바싹 말라 잠결에 마른기침을 하던 은비는 질겁하며 눈을 떴다. 낯선 공간. 제 옆엔 헐벗은 낯선 남자. 은비의 호들갑에 잠에서 깬 남자도 일어나 눈을 깜빡이며 느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어났어요?”
“뭐예요? 뭐, 뭐, 뭐예요?”
“뭐긴 뭐예요.”
“…….”
“본인이 안아달라고 했으면서.”
남자는 기가 막히다는 투로 한숨을 픽 쉬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호리호리하면서도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뒷모습에 은비는 또다시 화들짝 놀라며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이불 안에서 제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안아달라고 했다고? 내가?’
믿을 수가 없었다. 휘발된 줄 알았던 기억은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정지헌이 이정오와 함께 해외출장을 떠났단 사실에 절망하여 홀로 술집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자를 만났다. 맙소사. 집에 간다는 남자를 붙들고 울며불며 내 얘기 좀 들어달라고 하소연하던 지난밤의 일이 모두 떠올랐다. 그리고, 외롭다며 매달린 기억까지……. 얼굴 반반한 거 하나만 보고서, 웬 근본도 모르는 놈을 끌고 호텔에 온 것이다.
‘저 자식 꽃뱀이면 어쩌지?’
법조인 집안. 게다가 아버지는 곧 정계에 진출하실 텐데 이런 스캔들을 만들 수는 없었다. 은비는 우왕좌왕하며 옷을 챙겨입었다. 얼른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옷을 다 입고서 가방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남자가 욕실에서 나왔다.
“안 씻어요?”
“…….”
“그럼 나가서 해장이나 하죠.”
은비는 도망칠 기회를 잃고 말았다.
* 아침 식사 내내 무거운 표정을 풀지 못한 승규는 출근 준비를 끝낸 후 부인 진서에게 말했다.
“여보. 이제 도빈이 바둑학원 그만 보내자.”
“응? 왜?”
“어차피 바둑 배우지도 않는데 뭐.”
“일곱 살짜리가 뭘 대단하게 배우겠어. 그냥 좋아하니까 다니게 하는 거지. 예나 본받아서 어깨너머로 조금 익히면 좋은 거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해야지, 왜 예나가 좋아하는 걸 따라 해.”
“애들은 다 그래.”
진서는 도윤의 밥을 먹이며 픽 웃었다. 도빈은 엄마 아빠가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도 모르고,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두고는 변기에 앉아 힘을 주고 있었다. 승규는 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기 몸도 힘든데 예나까지 신경 쓰느라 더 힘들잖아.”
“예나가 뭐 힘들다고. 이번 달까지만 지켜봐. 이미 학원비도 냈어. 도빈이는 예나랑 못 헤어지고.”
진서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그 순간 도빈이 후다닥 달려왔다.
“엄마 나 잘 닦고 손도 씻었어! 됐지? 잘했지?”
변을 보고 나온 도빈은 말끔하게 씻은 손을 진서에게 보이며 경망스럽게 까불어댔다.
“박도빈.”
승규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도빈을 불렀다.
“너 이제 바둑학원 그만 다녀. 대신 아빠가 너 좋아하는 축구교실 보내줄게.”
“난 축구교실보다 바둑학원이 더 좋은데?”
“그럼 바둑학원에서 배운 거 말해봐.”
“흑돌이랑 백돌이 싸운다!”
“또.”
“집을 많이 지은 사람이 이긴다!”
“어떻게 집을 짓는지는 알아?”
“어. 이렇게.”
도빈은 허공에 네모를 만들어 보였다. 아들이 딱 거기까지만 안다는 것을 눈치챈 승규는 인터넷으로 대국 문제 하나를 검색하여 사진을 보여주었다. 딱 봐도 백돌이 이긴 사진이었다.
“봐봐. 이건 누가 이긴 거야.”
역시나 도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바둑 그만해. 그만둬.”
“그럼 예나는?”
“예나는 예나고 너는 너지.”
“예나 못 만나?”
“박도빈.”
“…….”
“너랑 예나 바둑학원에 데려다주느라고 엄마가 고생하잖아. 이제 동생도 한 명 더 생길 텐데 더 의젓해져야지.”
도빈의 눈동자에 진도 8도쯤 되는 지진이 일었다.
“바둑학원은 그만 다녀. 오늘 예나한테도 인사 잘하고.”
흥분하여 코를 벌름거리던 도빈이 눈을 세모로 뜨고서 승규에게 물었다.
“아빠는 엄마랑 헤어질 수 있어?”
“아빠가 왜 엄마랑 헤어져.”
“그럼 왜 나보고만 예나랑 헤어지래?”
“…….”
“아빠도 못 하면서 왜 나보고만 하라는데!”
도빈이 빽 소리쳤다. 좋아하는 그녀에게 나는 평생 바둑학원에 다니겠노라고, 항상 네 옆에 있을 거라고 약속한 게 불과 어제였다. 평생을 가슴에 새겨야 할 약속을 하루 만에 깬다는 건 사나이의 도리가 아니었다. * 이른 새벽 호텔을 나선 촬영팀은 호주에서의 일정을 신속히 정리하고 공항에 도착했다. 촬영팀과 지헌은 비행기편이 달라 공항에서 헤어져야 했다.
“모두 수고했습니다. 그럼 서울에서 뵙죠.”
지헌은 촬영팀에게 인사하며 그 끄트머리에 서 있는 정오를 바라보았다. 오늘 새벽, 지헌의 방을 먼저 떠난 뒤로 정오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따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일도 없었다. 환희로 가득했던 지난밤은 그야말로 한밤의 오로라 같은 기억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어쨌건 그녀가 극도로 조심하는 일에 그가 먼저 나설 수는 없었다. 지헌 또한 그녀를 스쳐 가 먼저 항공편에 올랐다. 지헌과 헤어진 후, 정오는 계속 망설였다. 지난 새벽, 정오는 말없이 지헌의 방을 나와버렸다. 그의 어머니와 나눈 문자메시지를 훔쳐본 것이 부끄럽기도 했고, 그가 너무나도 상냥해서 미안하기도 했다. 말없이 방을 그냥 나와버렸으니 그는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짧게라도 연락을 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 아까 먼저 나가서 죄송했어요. 조심히 가세요.
정오는 짧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현실은 버겁지만 오래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됐으니 방향도 정해진 셈이다. 이제 그의 어머니와 싸울 준비를 해야겠지. 그를 장영미 여사에게서 끌어와 이정오의 옆으로 데려와야 한다. 과거를 덮기 위해서 장영미 여사가 조작한 건 그 통화 음성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작은 단서라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독하게 그의 옆을 지켜야 한다.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도록 그를 유도하고,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더 알아보아야 했다. 정오는 다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 서울에서 봬요. 연락할게요.
* 환승 시간을 포함하여 14시간의 여정 끝에 정오는 한국에 도착했다. 몸이 찌뿌드드했지만 예나를 만날 생각에 마음에는 생기가 피어올랐다. 함께 귀국 수속을 밟은 후, 박영광 차장이 정오에게 말했다.
“이 대리 정말 고생했어. 차 태워줄게. 같이 가자.”
“아니에요. 저는 공항버스 타면 돼요. 집 근처에서 내려줘서 편해요.”
정오는 그간 가장 고생한 박영광 차장이 얼른 집에 가서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대답했다.
“오, 그래? 알겠어. 그럼 집에 가서 푹 쉬어. 내일은 쉬고 모레 보자!”
“네. 차장님도 조심해서 가세요. 고생하셨어요.”
정오는 영광과 인사하고 버스 승강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웬 남자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 그녀의 여행가방을 휙 낚아챘다. 정지헌이었다. 정오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왜 여기 계세요?”
“만나자면서요.”
“서울에서 만나자고 했죠. 여긴 인천이잖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여행가방까지 끌고 가는데도 정오보다 훨씬 걸음이 빨랐다. 정오가 쫓아가며 팔을 뻗었다.
“가방 주세요. 내가 할게요.”
“그냥 빨리 오기나 해요. 누구한테 들키고 싶지 않으면.”
그의 지적에 정오는 놀라 고개를 숙였다. 공항에 먼저 도착한 지헌은 정오를 기다렸다. 어떤 비행기편으로 돌아오는지 알기 때문에 시간만 맞추면 되는 일이었다. 다행히 박영광 차장에게 들키지 않고 정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오가 박영광 차장의 차를 얻어타지 않아 다행이었다. 홀로 한국으로 돌아오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녀가 왜 내 휴대폰을 건드렸을까. 내가 불안해서?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너무 쉽고 가벼워 보여서? 여자가 많은지, 채은비와 여전히 연락을 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이유라면 차라리 환영이었다. 약간의 집착은 그를 기분 좋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 또한 그녀에게 평범하지 않게 집착하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뒷조사를 부탁했던 자신이나, 몰래 그의 휴대폰을 들여다봤던 그녀나 비슷하지 않나 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했다. 이정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여전히 불분명하여 답답한 면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는 거였다. 주차된 차에 정오의 짐을 실은 지헌은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서울로 이동하며 주저 없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송기훈한테 말한 건 다 나한테도 말해요.”
송기훈부터 정리.
“이정오 씨에 대해 송기훈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건 기분 나쁘니까.”
정오는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속에 담아둔 말이 많을 것 같은데 꼼짝 않고 앉아 있으니 도발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전에 스쳐 간 이성에 대해 얘기하고, 그걸로 도발하려고 하는 건 나쁜 거예요. 그러니까 남친이 없었지.”
역시, 그녀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넌 뭔데, 하는 무언의 압력이 느껴졌다. 지헌은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붙였다.
“나는 그만큼 이해심이 많은 남자고.”
그녀는 돌연 한숨을 쉬었다. 그의 농담에 수긍할 수 없다는 뜻인지 다른 고민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자그마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기하면 안 돼요?”
“…….”
“난 그래도 얘기할 건데. 하고 싶은데.”
그녀의 넋두리에 조금 기분이 상했다. 전남친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고? 승규에게 뒷조사를 부탁하긴 했지만 사실 그녀의 전남친에 대해선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전남친이라는 놈이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지 그 사실을 확인하고자 했을 뿐이다. ……나보다 잘생겼는지 그게 약간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얘기할 때마다 내가 괴롭힐 건데?”
“그래도 하고 싶은데.”
그녀는 입술까지 삐죽 내밀고서 칭얼대듯 구시렁거렸다. 아양인지 고난도의 괴롭힘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그마한 목소리가 피부를 간질이는 것처럼 들려서 숨이 조금 탁해졌다. 이미 빠져 있는데 더 정신 못 차리게 하겠다는 건가? 역시 이 여자는 보통이 아니다.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낸 후 그녀가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이사님 가족들이 나에 대해 알면 뭐라고 할 것 같아요? 가령, 이사님의 어머님이나 아버님…….”
이번에도 무척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무언지 이번에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 있는 주제에 대하여 지헌은 확고하게 말했다.
“어머니한테는 얘기할 거예요.”
“……왜요?”
“채은비가 먼저 말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채은비한테 듣는 것보단 나한테 듣는 게 좋겠죠.”
“…….”
“이정오 씨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게 할 거예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그걸 어떻게 믿어요?”
그녀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고 싶었는데 지헌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뾰로통하게 되쏘았다. 갑작스럽게 높아진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정오는 자신이 너무 티를 냈단 생각에 바로 반성하게 되었다. 그가 점잖게 대답했다.
“믿지 못하겠으면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말. 그럼에도 정오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믿을 수 있지만 그의 어머니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 그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
‘어머니예요, 나예요?’
당신 어머니와 내가 세상의 반대편에 서 있다면, 당신은 어디로 갈 거야? 하지만 왠지 자신이 질 것 같아서 입 밖으로 질문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내 손을 잡으려면 당신 어머니를 등져야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래도 괜찮아? 고심 끝에 정오는 지헌에게 부탁했다.
“내 얘기 안 하면 안 돼요? 어머니한테.”
“채은비가 먼저 얘기할 수도 있다니까요.”
“채은비도 얘기 못 하게 하면 되잖아요.”
“…….”
“할 수 있죠?”
“…….”
“못 해요?”
“생각 좀 해보고.”
지헌은 한쪽 입술 끝을 기울여 웃었다. 그는 부탁이라는 기회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른손을 길게 뻗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귓불을 건드리니 그녀가 간지럽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참다못한 그녀가 그의 오른손을 붙잡아 손등에 키스하고는 센터박스 위에 고이 올려놓았다. 끼익. 결국 지헌은 길목에 차를 세웠다. 안전벨트를 툭 풀고 다가오는 그의 우람함에 정오는 바짝 쫄았다. 어젯밤과 같은 그 정염의 빛이 눈에 가득 고여 있었다.
“아, 안 돼요.”
“그쪽은 되면서 왜 나는 안 돼요?”
“안 돼요. 내, 내가 하는 것만 돼요. 당신은 안 되고.”
나만 돼요. 너는 안 돼요. 그가 아니라 그녀가 한 말이었다. 그의 성질머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말. 그는 그런 앙큼한 단정을 받아줄 바보가 아니었다.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제야 여독이 풀리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