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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손잡아줄게 (60/183)

60. 손잡아줄게2021.11.24.

은비의 출근길은 지옥길이었다. 이제 더는 일이 재미있지 않았다. 매일매일 아이디어 타령하는 팀장도 꼴 보기 싫었고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정지헌도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오늘은 이정오가 해외 출장과 휴가를 끝내고 복귀하는 날이었다. 정지헌이 이정오를 열렬히 바라보는 꼴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빠 은엽이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분부를 내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단 사실도 너무나 괴롭고 답답했다. 어제는 장영미 여사에게 전화가 왔으나 받지 않았다. 장 여사가 무슨 일로 전화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받을 수가 없었다. 정말 지헌과 헤어졌느냐고 물어보면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제 입으로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여러모로 짜증이 가득한 와중에 이 모든 사달의 원흉. 이정오의 모습이 보였다. 한 20분 전쯤 지헌의 집무실로 향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그 20분 동안 집무실에서 둘이 뭘 했을까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정지헌은 내 건데! 은비는 탕비실로 향한 정오를 쫓아가 싸늘하게 말했다.

16551151226142.jpg“이정오. 너 알아? 너는 버리면 그만이라는 거.”

16551151226148.jpg“…….”

16551151226142.jpg“미혼모에, 가진 건 아무것도 없는 너를 누가 받아주겠어. 언젠가 오빠도 정신 차리면 넌 버려지게 돼 있는데 그땐 어쩔 거야?”

16551151226148.jpg“…….”

16551151226142.jpg“나 정말 걱정돼서 그래.”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들려오는 말이 걱정처럼 들릴 리는 없었다. 정오는 그런 은비의 속을 잘 알 것 같았다. 사실 은비가 딱하게 여겨졌다.

16551151226148.jpg“은비야. 그거 나한테 하는 걱정 맞아?”

정오는 감정의 동요 없이 물었다.

16551151226148.jpg“버리면 그만인 건, 네 얘기 아냐?”

은비의 눈이 커졌다. 정오는 씁쓸하게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16551151226148.jpg“미안하지만 정 이사님과 너와의 관계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네 일 말이야, 일.”

16551151226142.jpg“…….”

16551151226148.jpg“너는 회사에 쓸모있는 사람이니? 입사하고 보니 넌 쓸 만한 카피를 내놓은 적이 없던데. 아이디어도 없고.”

16551151226142.jpg“…….”

16551151226148.jpg“계속 그러다간 대리인 나한테 네 자리 다 뺏기겠어. 회사에서도 널 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정오는 은비의 얼굴근육이 부들거리는 것을 보고는 먼저 탕비실을 떠났다. 따끔한 지적이었지만 실은 인본주의적 감성을 담았다. 은비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관계에 목매어 허송세월을 보내기보다는 일에 좀 더 집중하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결국 은비에게도 그런 때가 올 것이다. 사람에겐 실망해도 일이 자신을 버티게 해주는, 그런 때. 채은비는 영영 깨닫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정오는 쇠귀에 경을 읽어줬구나 싶어 헛헛한 마음을 안고 자리로 돌아갔다.

16551151256106.jpg“대리님! 보고 싶었어요!”

팀 내로 돌아오니 기훈이 영롱한 눈으로 정오를 반겼다.

16551151226148.jpg“기훈 씨 잘 지냈어? 힘든 일은 없었어?”

16551151256106.jpg“그럭저럭 평화로웠어요. 대리님은 어떠셨어요? 호주 공기는 어때요? 대리님은 멜버른에 사신 적도 있다면서요.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나셨어요?”

16551151226148.jpg“응. 거의 안 변했더라. 공기도 좋고 다 좋았어.”

16551151256106.jpg“그래도 고생하셨죠. 이사님까지 가셨다면서요.”

기훈이 정오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16551151256125.jpg“이정오 대리.”

그 순간 저승사자 같은 지헌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어떻게 이런 순간마다 귀신같이 알고 자신을 부르는지 정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훈도 자리로 돌아가 흠흠, 목을 가다듬었고 정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헌을 바라보았다. 지헌이 복도 끝에서 다가오며 말했다.

16551151256125.jpg“해외출장 보고서 오늘 안에 가져와요.”

정오는 자신을 스쳐 회의실 쪽으로 향하는 지헌을 있는 힘껏 흘겨보았다.

16551151226148.jpg‘어휴. 눈만 아파.’

조용한 반항을 30초 만에 포기하고 PC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정오는 빨리 다음 스텝을 밟아야겠다고 생각했다.

16551151226148.jpg‘되도록 빨리 변호사를 만나야 해.’

그간 PT 준비와 미란의 입원, 해외 출장 때문에 변호사를 찾아볼 시간이 없었다. 그제야 정오는 숨을 돌리고 검색을 시도해보게 되었다. 미혼모 관련 분쟁들을 전문으로 하는 법무법인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법무법인들이 블로그 또는 웹사이트에 관련 자료들을 올려놓아 정오도 유심히 살피게 되었다.

16551151226148.jpg‘오. 나랑 비슷한 사연이 있네?’

그중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연을 소개한 법무법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블로그 글도 최신 정보였다. 대형 로펌인데 수임료도 비싸지 않고 무엇보다 상담은 무료로 진행된다는 말이 끌렸다. 정오는 찾아본 법무법인에 상담 예약을 걸어놓고 업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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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흘간 자리를 비운지라 할 일들이 많아 해외출장 보고서까지 마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오후에는 진서에게도 연락이 와서 정오는 마음이 급했다. 부랴부랴 해외출장 보고서를 가지고 지헌의 집무실을 다시 찾은 정오는 지헌의 자리 위에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16551151226148.jpg“바빠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16551151256125.jpg“그렇게 바쁘면 내일 한다고 하지.”

지헌은 보고서를 들추어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정오는 울컥 심술이 났다. 정지헌, 이놈! 내가 당하기만 할 줄 알아? 나도 당신 괴롭힐 거야.

16551151226148.jpg“생각해보니까 그놈의 괜찮은 점이 하나 또 있긴 했네요.”

역시. 보고서를 살피던 그의 손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16551151226148.jpg“요리할 때 엄청 멋있었어요. 음식도 기가 막히게 잘하고.”

보고서를 내려놓은 그가 천천히 고개를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에 정오는 잠시 쫄았지만 용기 있게 말을 이었다.

16551151226148.jpg“착착착착착착 칼질할 때 엄청 멋있었고요. 특히 프라이팬으로 뒤집기 할 때는 진짜 짱.”

16551151256125.jpg“…….”

16551151226148.jpg“부침개를 부쳐 먹으면 말이죠. 부침개를 뒤집어야 한단 말이죠. 그때 이렇게 이렇게. 한 손으로 뒤집기 알아요? 스냅을 이용해서. 이렇게. 확.”

정오는 그가 뒤집기를 할 때의 포즈까지 시연해 보이며 그를 자극시켰다. 그리고 마무리는 추억에 젖은 눈망울.

16551151226148.jpg“그때 정말 멋있었는데.”

지헌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으려 입술을 굳게 붙였다. 전남친 이야기를 현남친 앞에서 이토록 당당하게 하는 여자가 또 있을까. 아니, 내가 현남친이 맞긴 한가? 한 번도 그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16551151256125.jpg“이정오 씨. 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16551151226148.jpg“네. 말씀하세요.”

16551151256125.jpg“우리 사이는 뭔가?”

16551151226148.jpg“…….”

16551151256125.jpg“내가 이정오 씨 남자친구라고 생각해도 되나?”

16551151226148.jpg“…….”

16551151256125.jpg“아니면 몸만 허락하는 사인가?”

16551151226148.jpg“몸만 허락하는…… 아니, 몸도 허락은 안 했죠.”

16551151256125.jpg“됐다. 말 안 해.”

지헌은 그녀가 발뺌을 할까 싶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16551151256125.jpg“이정오 씨의 밀당에 일도 못 하겠네요.”

16551151226148.jpg“네. 밀당을 하려고 한 적은 없지만, 일도 못 하게 해서 죄송하고요.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정오가 어깨를 으쓱하고서 한발을 뒤로 빼자 지헌은 또 조바심이 났다. 이게 밀당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16551151256125.jpg“아니 또 뭘 그렇게 금방 나가나.”

16551151226148.jpg“사실 지금 잠깐 나가봐야 하거든요.”

16551151256125.jpg“무슨 일 있어요?”

16551151226148.jpg“도빈이가 오늘 배탈이 나서 학원을 못 갔나 봐요. 학원 끝나고 예나를 집까지 바래다줄 사람이 없어서요.”

예나. 예나의 일이라면 그 또한 참을 수 없었다.

16551151256125.jpg“같이 가죠. 태워줄게요.”

지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헌은 잠깐 외출하겠단 핑계를 대고서 정오를 태우고 예나의 학원으로 향했다. 왠지 예나를 만나는 일이 정오를 만날 때만큼이나 긴장되었다.

16551151256125.jpg“예나는 뭘 좋아합니까.”

학원이 가까워질 즈음, 지헌이 물었다.

16551151226148.jpg“대강 감이 오지 않아요? 바둑 좋아하고 그 또래 애들이 좋아하는 장난감들 좋아하고 개그프로 좋아하고 말장난 좋아하고, 뭐 그래요.”

16551151256125.jpg“먹을 거는요?”

16551151226148.jpg“아이스크림을 제일 좋아해요. 많이 먹지는 못하게 하지만. 떡볶이나 돈가스 같은 것도 좋아하고요.”

지헌은 정오가 말한 것들을 머릿속에 잘 새겨두었다. 아이를 잡지 못하면 이정오도 놓친다. 반대로 아이와 가까워지면 이정오도 좀 더 마음을 열겠지. 자신은 계속 이 여자의 곁에 있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든다. 지금은 충분히 시간이 흐르지 않았기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을 뿐.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뵙고, 혹시나 시끄러워질 가십을 미리 정리하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언젠가 같이 살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래서 시간이 좀 더 빨리 흘러갔으면 좋겠단 생각이다. 마음은 가득해도 시간이 쌓이지 않아 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다. 지헌은 자신이 그동안 인생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정오를 만난 후에야 ‘내가 정말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학원으로 올라간 정오가 금방 예나를 데리고 내려왔다. 손을 꽉 잡은 모녀는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참 보기 좋았다. 자신 앞에서는 유난히 도도하고 까탈스러운 여자가 아이 앞에서는 완전히 무장해제된 표정이었다. 그녀가 아이에게 보내는 눈길만큼은 크게 질투심이 생기지 않았다. 송기훈과 이정오의 사이를 바라볼 때만큼 부글부글하는 느낌은 없었다.

16551151384213.jpg“엄마, 오늘은 도빈이 안 왔어.”

16551151226148.jpg“그러게. 도빈이가 배탈이 났대.”

엄마를 향해 금붕어처럼 입술을 뻐끔거리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지헌을 바라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여기, 정지헌 앞에서 유난히 도도하고 까탈스러운 여자가 한 명 더.

16551151384213.jpg“아저씨 또 왔어요?”

16551151226148.jpg“이예나, 아저씨 또 왔어요가 뭐야,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해야지.”

예나의 까칠한 반응에 정오가 따끔하게 지적했다. 입술을 잠시 샐쭉거리던 예나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꾸벅 인사했다.

16551151384213.jpg“아저씨 안녕하세요…….”

16551151256125.jpg“그래. 예나 안녕.”

지헌이 인사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예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헌은 그 경계의 눈빛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를 처음 만났던 날, ‘아빠 없는데요’라고 담담히 말하던 그 모습이 떠올라서일까. 아이를 보면 왠지 마음이 따끔따끔했다. 너와 친해지고 싶은데, 사실 나도 방법을 잘 몰라. 그래도 노력해보려고 해. 너는 이정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순간 기적처럼 아이가 차츰 손을 움직여 보였다. 두근두근. 이윽고 지헌의 커다란 손 위에 단풍잎 같은 자그마한 손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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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잎사귀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것처럼 가슴 안에 낯선 간질거림이 생겨났다. 잎이 바스러질까 조심하게 되었다. 아이가 아파할까 싶어서 꽉 쥘 수도, 아이가 놓칠까 싶어서 살살 쥘 수도 없었다. 그 긴장감 속에서 문득 머리가 저릿하고 울렸다. 손잡아줄게.

16551151384213.jpg“아저씨 왜 그래요?”

지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예나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갑작스런 두통 때문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게 된 지헌이 급히 정신을 바짝 차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1151256125.jpg“아니야. 아무것도.”

정오도 그런 지헌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세 사람은 주차장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주차장 가는 길에 자전거 보관소가 있었다. 예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어린이가 보관소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며 예나가 물었다.

16551151384213.jpg“아저씨 자전거 잘 타요?”

16551151256125.jpg“그럼.”

지헌이 반갑게 대답했다. 아이가 보여주는 관심이 반가웠다.

16551151256125.jpg“아저씨가 자전거 타는 법 가르쳐줄까? 아저씨도 예전에…….”

끼이익- 순간 머릿속에 경적음이 가득 차며 다시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16551151256125.jpg‘아!’

귀에서 뒤통수로, 그리고 다시 전두엽을 꽉 쥐여짜듯이 밀려오는 두통이 사고를 가로막았다. 눈앞의 풍경이 장막 쳐지듯 물러나고 그 앞에 낯선 생각의 조각들이 펼쳐졌다. 언젠가 태어날 아가에게. 밤사이 내린 눈을 가장 처음 밟게 해줄게. 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게 해줄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줄게. 손잡아줄게.

16551151226148.jpg“정지헌 씨.”

걸음을 멈춘 채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싼 지헌이 눈을 깜빡거렸다. 정오가 자신을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아래, 이정오와 꼭 닮은 아이도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지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주 잠시 과거의 어느 순간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그건 과거 어느 시점의 정지헌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애틋한 마음의 편지였다. ……이 기억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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