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정오에게2021.12.11.
멍하니 쳐다보는 국순에게 은비는 다시 제 이름을 말했다.
“저 모르세요? 기억 안 나세요? 채은비. 정오 고등학교 동창이잖아요.”
“아…… 그래요.”
국순은 겨우 대답만 했다. 좀처럼 환영해주지도, 웃지도 못했다. 채은비와의 악연은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인데, 여전히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기도 했다. 13년 전. 정오의 학교 급식소에서 일하던 국순은 채은비와의 소동 때문에 쫓겨났다. 이후 국순은 일자리를 찾아 군산으로 내려가야 했고 정오는 엄마와 떨어져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때 딸의 나이가 열일곱. 한창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때에 딸은 혼자 지냈다. 생때같은 딸을 홀로 두고 지방 생활을 해야 했던 국순 또한 매일매일이 가슴 미어지는 날들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딸에게 미안하다. 그래서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근데 정오가 얘기 안 하던가요? 저 정오랑 같은 회사 다니는데.”
국순이 별로 환영해주지 않으니 은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국순이 알지 못하는 정보였다. 국순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은비는 픽 코웃음을 쳤다.
“정오가 그런 얘기도 안 하는구나. 제가 정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상사예요, 아주머니.”
국순은 얼마 전에 딸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엄마, 나 고1 때, 내가 되게 싫어하던 애가 있었거든. 걔를 회사에서 만났다.”
“왜 싫어해. 사이좋게 좀 지내지 그랬어.”
“원래 인성이 덜된 애야. 근데 걔는 여전히 별로더라.”
“…….”
“오늘은 걔랑 마찰이 좀 있었는데, 너무 분하다.”
그 아이가 채은비였구나. 엄마가 속상할까 싶어 딸은 끝내 채은비란 이름까지 털어놓지 못했던 거였다. 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동안 얼마나 상처받았을까. 그때 좀 더 딸의 편을 들어주지 못하고 나무랐던 것이 지금 와서 가슴 미어지게 후회되었다. 그럼에도 국순은 눈앞의 채은비에게 모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채은비가 정오의 상사라면, 국순에게도 채은비는 여전히 상전이었다.
“그래. 잘 왔어요. 오랜만이네. 어서 앉아요.”
은비가 국순이 권하는 자리로 이동하며,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와.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이쪽은 제 친구고요. 이쪽은 저랑 친한 BJ예요.”
은비는 국순에게 같이 온 두 명을 소개했다.
“BJ가 뭔지는 아세요? 인터넷 방송 진행자예요. 잘됐다. 소영 씨, 방송에서 이 식당 소개 좀 해줘요. 장사 좀 잘되게.”
“일단 먹어보고요.”
BJ란 사람이 픽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방송이고 뭐고, 국순은 빨리 이들이 떠났으면 싶었다. 일찌감치 장사를 접는다고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주문을 기다렸다. 은비가 메뉴판을 대충 보고서 주문했다.
“백반 정식으로 3인분 주세요. 같이 온 친구들도 이런 식당에선 만나기 힘든 귀한 손님들이니까 성의껏 잘 부탁드릴게요.”
국순은 조용히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백반 정식은 이미 준비가 된 반찬들에 찌개만 끓이면 되는 일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어서 해먹이고 보내야지. 식당일을 한 지도 어언 13년이 되었다. 그동안 식당을 다녀간 별의별 진상 손님들을 떠올리니 오늘의 재회는 아무것도 아닌 듯이 생각되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잘한다면. 국순은 특별히 신경 써서 밥을 퍼 담고 반찬을 담고 찌개를 올렸다. 특별히 달걀찜에 생선구이까지 더했다. 어느덧 반찬은 10가지나 되었다.
“모자라면 또 얘기해요. 얼마든지 더 줄 수 있으니까.”
국순은 거한 한 상을 나르며 손님들에게 말했다.
“네. 잘 먹겠습니다.”
은비가 인사했다. 어느새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국순은 BJ란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기, 우리 가게는 촬영 안 하는데. 카메라는 꺼 주면 안 될까요?”
“네. 방송으로 내보내지는 않을 거예요.”
BJ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국순은 돌아서서 주방으로 건너갔다. 홀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너무 작게 얘기를 해 발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이상한 방송을 내보내지는 않을까, 13년 전처럼 이상한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잠시 후 홀에서 은비가 국순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상을 차린 지 5분 만이었다.
“여기 계산이요.”
평상에 앉아 있던 국순은 벌떡 일어나 계산대로 갔다. 테이블의 밥과 반찬들은 거의 그대로였다.
“밥을…… 거의 안 드셨네요.”
“네. 입맛에 안 맞아서요.”
“그럼 돈은 됐어요. 그냥 가요.”
“아녜요. 그래도 그거 차리시느라고 괜한 고생도 하셨는데.”
은비의 친구가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수표를 받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국순은 계산대 금고를 열었다. 국순이 부랴부랴 잔돈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에 은비는 유유히 주방 안쪽으로 걸어갔다. 평상에 웬 아이가 색종이접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 은비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네가 예나구나?”
“네.”
예나가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엄마가 일하셔서 여기서 혼자 노는 거야? 어휴. 너무 안됐다.”
“…….”
“엄마 닮아서 아주 예쁘네. 아빠는 누구야?”
예나는 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눈만 깜빡거렸다. 처음 보는 아줌마가 왜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지 의아했다.
“애기야, 말을 잘 못 해?”
한숨을 푸욱 쉰 은비는 지갑에서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예나에게 내밀었다.
“자. 언니가 너 예뻐서 주는 거야.”
“…….”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야지. 어른이 주시는데.”
은비가 돈을 거듭 흔들며 빤히 바라보자 예나는 그 기세에 눌려 돈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그래. 착하다.”
은비는 흡족하게 돌아섰다. 이정오. 네가 내 인생 뒤틀리게 했으니, 나도 네 인생 밟아줘야 공평하지 않겠어? * 회사 일을 마친 지헌은 주얼리숍 가까이에 위치한 꽃집을 찾았다. 플라워드림. 카드 회사로부터 받아본 카드이용내역서에 이 꽃집의 이름이 있었다. 다행히 꽃집이 7년 전의 그 이름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7년 전 11월 2일, 그는 주얼리숍에서 반지를 구입한 후, ‘플라워드림’에서 카드결제를 했다. 꽤 상당한 액수였기에 프러포즈용 꽃을 구입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부디 이곳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기를. 아주 작은 것이라도. 지헌은 떨리는 마음으로 꽃집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지헌을 반겼다. 규모가 큰 꽃집이라 꽃도 아주 많았다. 한쪽의 커다란 테이블에서는 여자가 바구니에 꽃꽂이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뭐 좀 여쭤보려고 합니다.”
“네. 말씀하세요.”
“제가 7년 전에 이 꽃집에서 카드결제를 한 적이 있는데 기억이 잘 안 나서요. 혹시 7년 전에도 이 꽃집을 운영하셨습니까?”
“네. 그렇죠. 그때도 저랑 제 아내랑 같이 꽃집 운영했습니다. 이제 9년 차고요.”
“그럼 이 결제 내역을 봐주실 수 있을까요?”
지헌은 따로 체크한 카드이용내역서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지헌이 건네준 서류를 받아들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7년 전이네요……. 저희가 하루 주문량이 상당하다 보니 고객님 한 분 한 분 기억하기는 약간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도 50만 원이 넘는 금액이니 아무래도 큰 화분 세트나 프러포즈용 같기는 한데……. 고객님은 정확히 기억 안 나시나요?”
이렇게 큰 금액을 기억하지 못하는 손님을 이상하게 여기는 투로 남자가 물었다. 지헌은 어쩔 수 없이 사정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제가 이 결제를 한 다음 날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기억을 잃었는데, 최근에 이 기억에 대한 단서를 발견해서 여기까지 찾아오게 됐습니다.”
누군가에게 개인 사정을 털어놓는 것은 가장 꺼리는 일 중 하나다. 하지만 지헌은 작은 단서 하나라도 찾고 싶은 마음에 매달리게 되었다. 낯선 이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번도 해본 적 없었기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5월 27일의 이정오가 떠올랐다. 예나의 생일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자신에게 일찍 퇴근하겠다고 사정할 때의 그녀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절박한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고, 때론 인생을 걸기도 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나침반 하나만 믿고 나아가기도 한다.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손짓하고 있을 희망 하나를 그려 보며. 그런 인생의 애틋함을 알게 되었다. 역시 경험한 만큼 보이는 법인 것 같다. 경계심을 보이던 꽃집 주인이 지헌의 사연에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테이블에서 꽃꽂이를 하던 여자도 손을 털고는 지헌에게 다가왔다.
“여보, 우리 프러포즈용 주문은 꽃 사진 찍어두잖아. 찾아보면 사진 있을 것 같은데?”
여자의 반가운 말에 지헌도 힘을 보탰다.
“네. 프러포즈용 주문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제가 같은 날 반지도 주문했었거든요.”
“…….”
“꼭 좀 부탁드립니다.”
지헌의 간절한 요청에 여자는 남편의 어깨를 툭 쳤다. 남자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PC 앞에 앉았다.
“파일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요.”
남자가 PC 파일들을 살펴보는 동안 여자는 지헌에게 의자를 건넸다.
“앉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제가 남편이랑 일을 같이했었다면 기억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때는 제가 임신 중이라서 일을 많이 못 했거든요.”
상냥하게 말을 거는 여자에게 지헌도 살가운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아이가 일곱 살쯤 되었겠네요.”
“네. 지금 일곱 살이에요.”
여자의 대답에 지헌은 예나를 떠올렸다. 예나 생일이 5월 27일이라고 했으니 딱 그때쯤 이정오도 임신을 했었던 거구나. 남자가 여러 폴더들을 살피다가 말했다.
“사진 파일을 제가 제대로 정리를 안 해서 찾는 데 좀 시간이 걸리네요.”
“번거로운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지헌의 점잖고 정중한 사과에 남자는 더 잔투정을 부리지 못하고 우직하게 움직였다. 찾는 시간이 길어지자 지헌의 주변을 서성이던 여자도 테이블로 돌아가 하던 작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30분이 지나고.
“어. 여기 있네요. 11월 2일. 이거 같은데.”
남자의 목소리에 지헌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자도 달려왔다. 너른 테이블 위에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꽃밭을 이룬 사진이었다. 그 위에는 ‘MARRY ME?’라는 문장의 갈런드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건 좀 다르네. 테이블에 장식을 했네. 원래 차 트렁크에 장식하고 사진을 찍거든요.”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여자가 손뼉을 짝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아아! 나 생각났어! 프러포즈 꽃 주문하고 결제까지 다 마쳤는데 연락 안 하는 사람이 있다고 자기가 말했었잖아. 다음 날 꽃 찾으러 오겠다고 해놓고 휴대폰은 꺼져 있고 연락도 안 되더라고.”
눈동자를 굴리던 남자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아, 맞아! 그래! 그래서 차 트렁크 사진을 못 찍고 테이블 위에서 찍었지. 그때 정말 별걱정을 다 했었는데. 프러포즈를 하기도 전에 차인 건가, 누가 교통사고라도 당했나 해서. 그때 주문한 사람이 정말 잘생긴…… 맞아! 손님이었네요!”
기억이 떠오른 남자는 여자보다 더 감격한 표정으로 지헌의 손을 붙잡았다.
“……사진 좀 확인해봐도 될까요?”
지헌은 가슴이 울렁거려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했다.
“네. 앉으세요, 여기.”
남자는 PC 앞의 의자를 내어주었다. 지헌은 자리에 앉아 천천히 사진을 살펴보았다. MARRY ME? 갈런드의 글자에 지헌은 눈이 따끔거렸다.
‘나는 정말로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구나.’
그리고 교통사고로 그 사람을 까맣게 잊게 되었구나.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낯선 먹먹함이 그의 마음을 소란스럽게 했다. 그 어지러움 속에서 지헌은 사진의 오른쪽 가장자리, 곱게 쓰인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의 겉면에 쓰인 글씨를 알아본 지헌의 눈이 커졌다. - TO 정오 분명히 그 이름이었다. 정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