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폭풍의 밤2021.12.15.
정오. 이정오.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 지헌의 눈이 투명하게 젖어들어갔다. 흰자위에서는 붉은 실핏줄이 툭툭 터졌다. 마치, 당장 피눈물이 흐를 것 같은 붉은 눈.
“손님…… 괜찮으세요?”
잠잠히 바라보던 남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제가 이 사진을 가져가도 될까요?”
지헌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남자에게 요청했다. 남자는 흔쾌히 파일을 전송해 주었다. 사진을 챙긴 지헌은 꽃집에서 나와 바로 승규에게 연락했다.
[어어, 친구.]
“퇴근했어?”
[응. 집에 가는 길인데. 왜?]
“이정오 씨에 대해 조사한 자료, 지금도 가지고 있지?”
[어…… 그렇지.]
얘기하기 어려운 화제라는 듯, 승규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것 좀 내 이메일로 보내줄 수 있어?”
승규에게 부탁했다. 승규가 조사한 이정오에 대한 자료를, 지헌은 직접 확인해본 적이 없었다.
* 오랜만에 편안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다시 야근이 시작되었다. 정오는 긴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느른하게 등을 기댔다. 지헌의 집무실 쪽 복도에서 사람이 나타나면 이젠 저도 모르게 척추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오늘 그 사람은 일찍 퇴근했는데. 어김없이 낮 12시, 일이 많아 바쁘다는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오늘 정지헌의 흔적 전부였다. 두어 번 멀리서 얼굴을 보긴 했지만 그냥 눈코입이 안녕하신지 확인했달까. 같은 회사, 같은 본부 소속이지만 집무실과 그녀의 자리 거리만큼 두 사람은 멀리 있었다. 그와 자주 볼 수 없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할까. 아마도 간밤의 꿈 때문인 것 같았다. 꿈에서 정오와 예나는 하얀색 어여쁜 드레스를 커플처럼 맞춰 입고서 공원을 거닐다가 지헌을 발견했다. 지헌도 멋진 슈트 차림이었다. 지헌을 알아보고서 망설이는 정오와는 달리 예나는 두 팔을 벌리며 뛰어갔다. 그리고 지헌에게 폭 안겼다. 지헌은 예나를 안고서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예나는 지헌의 무릎 위에 앉아 편안히 웃었다. 엄마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문제는 정오의 기분이었다. 지헌에게서 예나를 데려오고 싶은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다리를 굽히다가 진저리를 치며 꿈에서 깨어났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 아마도 누군가에게 예나를 빼앗길 수도 있단 두려움이 꿈으로 나타난 것 같았다. 금요일에 채은엽을 만난 것도 불안요소 중의 하나겠지. 어쨌든 지헌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으니 얼마간은 꾹 참아보려고 한다. 정오는 불안요소를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았다. 그나마 누가 수상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랄까. 어떤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올지 알 수 없었는데, 이제는 방향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게 된 느낌. 게다가 채은엽은 다른 변호사를 사칭하여 접근했으니 이를 약점 잡아 이용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는 와중에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렸다. 요즘 밖에 나가 있는 일이 잦은 채은비가 또 어딘가에서 놀고 들어와 밤늦게 일을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저 팀은 도무지 협업이란 게 없구나.’
제작 1팀의 리더, 안찬섭 팀장을 안타깝게 여기며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생각은 집에 가서 하고, 일을 빨리 끝내고 퇴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엄마 국순의 이름이 화면에 떴다. 정오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엄마.]
“예나 공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국순의 목소리가 아니라 딸의 목소리였다. 정오의 목소리가 예나를 반기며 한 톤이 높아졌다. 미혼모란 사실이 본부에 잔뜩 알려진 뒤로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박영광 차장이 정오가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복도로 뛰어가는 것을 보며 픽 웃었다. 밤 8시. 시각을 확인한 정오가 물었다.
“집에 왔어?”
[응.]
“씻어야지. 씻었어?”
[응. 오늘은 혼자 씻었어.]
“잘했어. 할머니는 뭐 하셔?”
[화장실에서 빨래해.]
덤덤하게 대답한 예나의 목소리가 돌연 낮아졌다.
[엄마, 그런데 오늘 할머니가 울었어.]
예나가 긴히 전해준 소식에 얼굴에 한가득 피었던 정오의 미소가 사라졌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식당에 누가 왔거든. 근데 할머니가 울었어. 그래서 식당 청소도 안 하고 집에 왔어.]
“이상한 손님이 왔어?”
[몰라. 밥을 시켜놓고 하나도 안 먹고 갔어.]
“손님이 밥을 안 먹어서 할머니가 울었어?”
[잘 모르겠어. 근데 그 손님이 엄마 친구래.]
“뭐?”
[자기가 채은비라고 두 번 말했어. 그리고 나한테 돈도 5만 원 줬어.]
정오는 고개를 돌려 채은비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채은비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어깨를 들썩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최근 들어 썩은 표정만 보여주던 채은비가 웬일로 신이 난 얼굴이었다. 채은비. 네가 결국 내 가족을 건드렸구나.
[근데 할머니가 돈 빼앗아 갔어. 돈 돌려줘야 한다고.]
“…….”
[엄마, 근데 할머니가 몰래 울었거든. 예나가 얘기한 건 비밀이야.]
정오가 대답을 하기 전에 통화는 저편에서 먼저 끊겼다. 몰래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 것을 본 정오는 바로 뒤따라갔다.
“채은비.”
세면대 앞에서 화장을 손보던 은비가 정오를 쳐다보고서 한쪽 입술 끝을 비뚜름하게 올려 보였다.
“우리 엄마 식당에 갔다 왔니?”
“이정오 대리. 여기 회사예요. 상호 공대하죠.”
은비가 지적했지만 정오는 공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내 딸한테 네가 왜 돈을 줘.”
“넙죽 잘 받던데 뭐.”
“…….”
“너무 잘 받아서 앵벌인 줄 알았어.”
짜악! 정오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은비의 뺨을 한 대 치고 말았다. 정오의 손바닥이 얼얼한 만큼 은비에게도 충격이었을 터. 정오의 한방에 세면대 위로 폭 쓰러진 은비는 뺨을 감싸고서 정오를 노려보았다. 도발했다가 손찌검을 당하면 그 사실을 이용할 계산이었지만 막상 일이 닥치니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감히 날 쳐?”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일어난 은비가 악을 써댔다.
“이러니까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야!”
“…….”
“대대로 미혼모 집안이 자랑이니? 몸 함부로 굴리는 건 유전인가 보지? 그래도 인생을 생각해서 애는 지우지 그랬어. 엄마 닮아서 몸 함부로 쓴다는 소린 듣기 싫었을 텐데.”
채은비의 발악에 다시 한번 정오의 손이 올라갔다.
“꺅!”
은비가 한번 맞았던 뺨을 두 팔로 가드하며 고함쳤다. 그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됐다. 넌 그냥 구제불능인데.”
손을 거둔 정오는 체념하고 돌아섰다.
“다신 내 가족 건들지 마. 이건 경고야.”
“경고가 뭐, 뭐! 나도 너 고소할 거야. 폭행으로 고소할 거라고!”
은비가 먼저 떠나는 정오를 향해 외쳤다. 이때 은비의 등 뒤에서 황당한 음성이 들려왔다.
[대대로 미혼모 집안이 자랑이니? 몸 함부로 굴리는 건 유전인가 보지? 그래도 인생을 생각해서 애는 지우지 그랬어. 엄마 닮아서 몸 함부로 쓴다는 소린 듣기 싫었을 텐데.]
방금 전 자신의 목소리였다. 화장실 변기 칸에서 나온 고은주 대리가 녹음 파일의 재생 정지 버튼을 눌렀다.
“오해하지 마세요, 과장님. 이건 불법 도청이 아니라 화장실에서 내 목소리가 얼마나 곱게 들리나 시험 중이었는데 과장님 때문에 망한 자료니까.”
은주는 싸늘하게 비웃고는 먼저 화장실을 떠났다.
“혼자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추하다 추해.”
화장실을 떠나며 구시렁거리는 혼잣말이 은비의 귀에도 또렷하게 박혔다. 은비의 얼굴에 부들부들 경련이 일었다. * 집으로 돌아온 지헌은 바로 승규가 보낸 이메일을 확인했다. - 친구야, 네 부탁으로 이런 조사를 하긴 했지만, 나는 양심의 가책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내가 이런 조사를 했다는 건 부디 비밀로 해줘. 이메일에는 간절한 당부와 함께 승규가 업체를 통해 받아본 몇 장의 문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지헌은 문서를 한 줄 한 줄 유심히 살폈다. 딱딱하게 정제된 사실들을 살피는데 가슴은 어느 때보다도 요동쳤다. 이정오의 딸 이예나. 7세. 6년 전 5월 27일 군산 산부인과 출생. 아이의 혈액형, B형. 이정오는 O형인데 아이는 B형이었다. 이정오의 가족에 대한 간략한 프로필로 시작된 정보는 이정오의 과거를 파헤치며 점점 세세해져 갔다. 대학생 때 그녀가 살던 원룸은 행당동 원룸촌에 있었다. 지헌은 주소가 왠지 신경 쓰여 로드맵을 켜 보았다. 그리고 금방 그 장소를 기억해냈다. 다원 주류 신제품 시음회 날에 이정오를 만났던 그곳이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기억에 이끌려 그곳을 찾았던 건가?’
내가 과거에 그곳을 많이 드나들었던 건가? 그래서 본능처럼 그곳을 찾았던 건가? 속단하지 말자 생각해도 자꾸 마음은 정해진 곳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7년 전, 워킹홀리데이 기간. 호주 멜버른으로 떠났던 이정오. 나도 그 기간 중에 멜버른에 있었지. 이건 우연일까? 나는 지금 말도 안 되는 사연을 억지로 끼워맞추려 하고 있는 건가? 응? 이정오. 이젠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크게 떨려왔다. 떨려오는 손끝으로 마우스를 클릭하여 한 페이지를 더 넘긴 지헌은 거친 한숨을 토해냈다. 워킹홀리데이 기간 중 그녀가 찍은 사진이 문서에 박혀 있었다. 긴 생머리, 하늘색에 캐릭터가 새겨진 티셔츠. 지헌은 휴대폰을 들어 이전에 멜버른 식당 ‘더 크라운’에서 찍어온 사진을 찾아 열었다. ……그래. 이 옷. 그녀였다. 이정오였다. 모니터를 향한 눈길이 멍해졌다. 기나긴 탄식과 함께 몸을 바로 세운 지헌은 잔뜩 쌓인 메일함에서 ‘THE CROWN’이라는 단어를 읽어냈다. 더 크라운의 사장이 몇 시간 전에 지헌에게 보낸 이메일이 있었다. 지헌은 이메일을 클릭했다. 미스터 정. 잘 지내죠? 다름이 아니라 지난주에 당신이 우리 식당에 방문했을 때 부탁했던 것이 생각나서 연락했어요. 우연히 식당의 CCTV를 돌려볼 기회가 생겨서 당신이 식당을 방문한 그날의 기록을 살펴보았는데, 당신이 식당을 방문하기 1시간 전쯤에 벽면의 사진에 손을 댄 사람이 있었어요. 이 동양인 여자가 당신의 사진을 가져간 것 같아요. 혹시 아는 여자인가요? 지헌은 메일과 함께 첨부되어 있는 동영상을 다운로드받아 열어보았다. 지헌이 방문한 더 크라운의 식당 내부가 보였다. 꽤 한산한 식당에 모자를 눌러쓴 동양인 여자가 들어왔다. 이정오였다. 절대 다른 사람일 수 없는 그녀. 이정오. 식당 구석에 앉은 정오는 사진이 붙어 있는 벽면을 쳐다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주시하지 않는 사이에 사진 한 장을 벽에서 떼어내었다. 목구멍 가득히 울음이 고였다. 이정오. 넌 대체 누구지? 넌 대체 어떤 마음으로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당장 그녀를 만나 그 사정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지헌은 곧장 집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다. 함께 탄 엘리베이터에서 핸드레일을 꽉 움켜잡았던 이정오가 떠올랐다. 급히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가서야 지헌은 자신이 차 키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숨 쉬고 있는 세상이 버겁게 여겨지는 느낌. 그녀에게 가야 하는데. 지헌은 잠시 자리에 주저앉았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때. 끼이익! 주저앉아 있는 사람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 한 대가 뒤늦게 지헌을 확인하고는 타이어 마찰음을 내며 급히 멈췄다. 번쩍. 전조등 불빛이 지헌의 얼굴로 쏟아졌다. 그의 머릿속에도 섬광이 번쩍거렸다. 미처 막지 못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사랑해, 정오야. 나는 왜 그 말을 아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