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한마디만 하면 돼2021.12.18.
끼이익! 지헌은 다가오는 차를 피하지 못하고 서 있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아버렸다. 차를 세운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달려왔다.
“저기, 괜찮아요? 제가 차로 친 건 아닌데…….”
운전자가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건강에 문제가 있으신 것 같은데, 병원에 가 보시는 게…….”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지헌은 겨우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덜터덜 다시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동차 전조등이 번쩍하는 순간, 이름 하나가 머릿속에 박혔다. 낯선 감정 또한 진하게 여울졌다. 사랑해, 정오야. 나는 왜 그 말을 아꼈을까.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 후회하는 나……. 그 이외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집의 잔재를 발견한 기분으로 기억 한 조각을 붙잡고 있다. 내 기억은 진짜인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망상인가. 하지만, 망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헌은 두 달 전, 정오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 마냥 바르르 떨던 여자. 잔뜩 긴장한 게 너무 이상하여, 계속 신경이 쓰여서 정오를 집무실로 따로 부르기도 했다. 그때 역시 그녀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듯한 눈초리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려는 것처럼 물어오던 때도 있었다.
“……제가 누군지 아세요?”
“알죠. 카피라이터 이정오 대리.”
“……그것 말고는요?”
“내가 더 알아야 할 게 있습니까?”
그녀의 애타는 눈빛을 외면하며 그렇게 싸늘하게 대꾸했었다. 자꾸 마음을 빼앗기는 자신을 통제하고자 그녀에게 더욱 쌀쌀맞게 대했다.
“혹시 제 이름 한 번이라도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제 이름이요. 이정오.”
“본인 이름이 남을 만큼 유명한 광고라도 찍었습니까?”
그때 그녀가 보내온 실망의 눈빛은, 왜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느냐는 거였을까. 그녀와의 만남과 대화를 하나하나 떠올리니 더욱 의심은 짙어졌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어요.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닐 수도 있어요. 여자의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남자는 떠났어요. 그래서 여자는 아이를 혼자 키웠죠. 그런데 이 남자가 몇 년 뒤에 여자 앞에 나타난 거죠.”
“사실은 아빠가 아니라 오빠예요. 이사님은 제 아빠가 아니라 전남친을 닮은 거였어요.”
“내 매정한 전남친이랑 이사님 하는 짓이 똑같아서요.”
그것이 모두, 전부 다 나였던 건가. 그녀의 알 수 없는 이야기들. 그것은 내게 던지는 힌트 같은 거였나. 그렇게 너는, 내게 힌트를 던져주며 내가 스스로 기억을 되찾길 바랐던 건가.
“이사님, 기억을 찾길 바랄게요. 쓸모없었던 기억은 아닐 거예요. 아닐 거라고 믿어요. 제일 소중하고 좋은 기억이라 아무도 못 찾을 깊숙한 곳에 넣어놓았을 수도 있잖아요. 타임캡슐처럼.”
너는 그렇게 나를 기다렸을까? 언젠가 내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믿으면서? 엘리베이터가 서고 문이 열린 후에도 지헌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잊은 기억들을 메우듯 그녀가 건넸던 말들이 심장을 마음대로 쥐었다가 놓고, 흔들었다가 놓았다. 간신히 몇 걸음 걸어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또다시 무너졌다.
‘아…….’
너의 아이…….
“우리 예나 예쁘죠?”
“그 사람하고 내가 그렇게 보잘것없는 사이였어도 그래도 빛나는 게 나올 수도 있더라고요.”
“그래도 나는 고맙게 생각해요. 어쩔 수가 없어요. 예나를 만들어줬잖아요.”
아이 이야기를 할 때 유난히도 애틋했던 너. 지켜보는 나까지도 사랑에 빠지게 만들 만큼 사랑스럽게도 말하던 너. 지헌은 언젠가 예나를 안아주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이에게 열이 나는 것 같아서 그는 이마를 들추어 열을 짚어보았다. 그리고 아이의 선명한 연어반을 발견했다. 지헌은 가만히 손을 들어 연어반이 사라진 제 이마를 짚어보았다. 이정오는 O형, 아이는 B형. 나도, B형. 우리의 아이였나? 예나가…… 너와 나의 아이였던 거였어? 비틀거리며, 떨려오는 다리로 차 스마트키를 찾아 헤맸다. 다른 일이 머릿속을 장악해버려 도무지 차 키가 어디 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보조키라도 가져가야 할 것 같아 서재로 갔다. 보조키는 서재의 책상 서랍에 있었다. 그리고 보조키 아래, 한번 펼쳐져 접힌 채로 서랍에 넣어버린 두툼한 문서가 보였다. 정오가 5월 27일에 작성한 제안서. 그녀가 추가했던 두 줄의 카피를 다시 손끝으로 짚어보았다. - 나를 잊은 그대. 잊은 것을 그리워하다 울게 되리라. 끝끝내 굵은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화장실에서 정오와 은비의 소란을 들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놀라움에 제 입을 막았다. 예쁘고 싹싹해서, 그리고 집안도 좋다 하여 동료들은 채은비를 품위 있는 카피라이터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은비와 지헌이 헤어졌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사람들은 은비의 편에 서서 지헌의 험담을 했다. 은비가 딱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런데 화장실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동료들이 갖고 있던 채은비의 이미지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미혼모를 얕잡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엄마의 욕을 서슴없이 하는 은비의 악다구니를 들으며 사람들은 꽤 충격을 받았다. 은비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했다. 은비는 근처에 엉거주춤 서 있는 제작 1팀 조유리 대리에게 다가갔다.
“조 대리, 조 대리도 들었지? 나 폭행으로 이정오 고소할 거야. 증인 돼줄 거지?”
“저기, 과장님…….”
조유리 대리가 은비의 눈빛을 피하며 자그마하게 말했다.
“……저는 잘 못 들어서요.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보시면 안 될까요?”
그 옆에 서 있던 안찬섭 팀장 역시 으흠, 헛기침을 했다.
“저기, 채은비 과장, 오늘은 좀 스트레스가 많은 것 같은데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지 그래.”
은비는 기가 막혔다. 곧장 퇴근한 은비는 지헌의 본가, 장영미 여사의 집을 찾았다. 은비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장영미 여사는 버선발로 달려나갔다. 그간 은비와 연락이 닿질 않는 데다 지헌도 며칠 전 본가를 방문했다가 급히 떠난 후로 전화도 받지 않는지라 답답하던 차였다. 장 여사는 내일 맥스기획으로 지헌과 은비를 찾아가볼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어머니이!”
은비는 장 여사를 알아보고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은비야, 이게 무슨 일이니. 왜 그래. 왜!”
장 여사는 안절부절못하며 은비를 안아주었다. 아들과 긴 연애를 하다가 헤어진 아이. 아들은 채은비를 놓았다지만 장 여사는 아직 미련이 가득했다. 은비처럼 싹싹하고 시부모에게 헌신하는 며느리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다. 지헌과 은비가 자주 헤어졌다 만났다 하는 사이라는 은엽의 이야기도 어떤 희망이 되었다.
“그동안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나는 괜찮다.”
“오빠랑 저, 헤어진 것 같아요. 그 말을 하기가 너무 무서웠어요…….”
“아유, 어쩌니…….”
영미는 은비가 마음에 들었지만 아들이 확고한 이상 자신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억지로라도 지헌과 은비를 결혼시켜버리고 싶었지만.
“내가 도와줬으면 좋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를 어쩌니…….”
“어머니, 오빠 좀 막아주세요. 오빠가 지금 위험하다고요.”
위로하는 영미에게, 은비가 대뜸 이상한 소리를 했다. 영미가 미간을 구기고서 물었다.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한테 회사 직원 하나가 들러붙었어요. 제대로 된 여자도 아니고, 애까지 있는 여자가 오빠를 조종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 헤어진 거예요.”
은비가 눈물을 철철 흘리며 말했다. 영미는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미혼모가, 오빠한테 먼저 꼬리를 쳤어요, 어머니. 그래서 오빠가 지금 거기 놀아나고 있다고요.”
“…….”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네? 으어어어, 으어어어어어…….”
“……미혼모라니, 은비야. 알아듣게 얘기해봐. 지헌이가 미혼모랑 놀아난다고?”
영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은비가 손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곱 살짜리 애가 있는 미혼모예요. 감히, 우리 오빠한테…… 흐윽…… 오빠가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건지, 제 설득은 통하질 않아요, 어머니…….”
“그게 누구니. 그 애 이름이 뭐야.”
“이정오 대리요. 제작 2팀 카피라이터 이정오.”
은비가 끄억거리며 꺼낸 대답에 영미의 눈이 커졌다.
“어머니!”
다리에 힘이 쫙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영미를 향해 은비가 소리쳤다. 은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영미는 머릿속이 멍했다. 이정오. 설마, 설마, 그 아이가……. * 퇴근 후 정오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엄마의 식당으로 갔다. 식당 문을 열고 보니 치우지 않은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테이블의 밥이 거의 그대로였다. 채은비와 그 친구들이 왔다 간 흔적이겠지. 하얀 밥 위로 정오의 눈물이 뚝 떨어졌다. 정오는 꿋꿋이 눈물을 닦고 테이블을 치웠다. 거의 손대지 않은 듯한 반찬과 밥을 버리니 음식물 쓰레기 한 봉지가 나왔다. 백반 정식 3인분. 2만 원 남짓을 그냥 버렸다는 죄책감과 엄마가 받았을 상처에 속이 쓰렸다. 깔끔하게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밖으로 내놓고 식당 구석구석을 깔끔하게 청소하고, 모든 뒷정리를 마치고 짧은 편지까지 남겨놓고서 식당을 나왔다.
‘엄마, 내일부터 우리, 또 다 잊고 열심히 살아요. 언제나 그랬듯이 행복하게.’
불 꺼진 식당을 바라보며 일부러 미소 지었다. 하지만 자꾸 눈물이 흘렀다. 정지헌의 옆에 머물러야 하기에 느끼는 서러움. 나 혼자 당하는 서러움이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나 때문에 가족이 힘들어진다면……. 오래전 예나의 유괴 미수, 엄마의 식당까지 찾아와 가족을 괴롭히는 채은비. 이를 가만히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냥 다 버리고 엄마와 예나만 데리고 지방으로 가 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하아. 안 되지. 나는 카피라이터다. 회사 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도 이것저것 가지 않은 길을 생각하다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터덜터덜 세월아 네월아 하며 걸어가느라 집까지 가는 데 한 시간 이상이 걸렸지만. 빌라 건물이 보이는 골목에서 정오는 옷매무새와 얼굴을 정리했다. 휴대폰으로 들여다본 제 얼굴은 여전히 눈가가 부어 보였다.
‘그래도 집 안에 불이 꺼져 있으니 엄마한테 들키지는 않을 거야.’
정오는 낙관하며 발을 디뎠다. 그런데, 그녀의 앞길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지헌이었다. 골목에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꽤 오래 그녀를 기다린 것 같았다.
“……왜 여기 있어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가 묵묵히 다가왔다. 정오는 저도 모르게 한 발을 뒤로 뺐다. 겨우겨우 눈물을 정리했는데 다시 울음이 터져버릴까 봐 불안했다. 여기는 집 앞인데.
“이사님, 우리 내일 얘기할까요? 오늘은 내가 너무 힘들어서.”
“…….”
“……너무 힘든 일이 많았거든요.”
“…….”
“내일 회사에서 봐요. 나 먼저 갈게요.”
정오는 도망가듯 몇 발짝 더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아예 돌아섰다. 그런데 그 순간.
“정오야.”
7년 전, 그녀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그가 이름을 불렀다. 울컥 정오의 목 안쪽이 다시 습해졌다. 너무해. 나를 그렇게 부르면 내가 힘들어한다는 거 알면서. 정오는 고개를 돌려 원망스러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방금 내뱉은 말에 대해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는 듯했다. 오히려 그녀를 원망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면서도 애틋한 눈빛.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 그 역시 힘든 일이 있었나. 그래서 내가 필요한 건가? 그 갈망의 눈빛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럴 땐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가슴 한쪽이 이지러진 채로 살아왔으나 그것조차 모르는 남자를. 함께한 모든 시간을 잊고 본능만 남아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정오는 애처로운 마음에 지헌에게로 발을 내디뎠다. 몇 발짝 가까워지자 그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 아래, 음영이 진 그의 얼굴은 아름답지만 슬퍼 보였다. 왜 그러느냐고 묻기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
“예나 아빠는 누구지?”
“…….”
“내가 아는 사람인가?”
지헌은 정오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그녀가 대답을 회피하며 다시 뒤돌아버릴까 초조했다. 항상 그랬다. 그는 그녀를 쫓아가고, 그녀는 계속 도망쳤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7년의 세월을 품고 있던 상흔 때문이겠지.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가 깨달은 비통함의 무게를 지지해주지는 못할지라도. 그때의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나의……. 나의 잃어버린 기억. 나의 전부. 가장 소중한 것. 내가 지켜야 했던 것.
“한마디만 하면 돼.”
그녀를 고요히 바라보던 지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내 아이라고.”
“…….”
“예나가 내 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