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다시 그대에게 (2)2021.12.25.
지헌의 차 안. 어떻게 우리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는 지헌에게, 정오는 7년 전 11월 2일 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다음 날 뺑소니 사고 직후 자신이 어떤 상황에 부딪혔는지 모두 털어놓았다. 뺑소니 사고 후 보름 만에 연락한 ‘지헌’이 그녀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까지. 정오는 그가 믿지 못할까 봐 불안했으나 그것은 기우였다. 지헌은 정오의 사정을 금방 이해했고, 그녀와 똑같은 의심을 품었다.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난 그런 전화 한 적 없어. 어머니가 꾸민 일일 거야.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았거든.”
“…….”
“아마 사람을 썼든가, 아니면 뭔가를 조작했겠지.”
조심스럽게 주억거린 정오가 제 의견을 덧붙였다.
“생각해보니 오빠 어머님은 예나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 같아. 아신다면 내가 맥스기획에 입사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을 거야. 아니면 오빠를 막았을지도 모르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오빠’라는 호칭. 심각한 와중에도 지헌은 그 호칭에 자꾸 마음을 빼앗겼다. 자연스러운 반말 역시 어색하게 여겨지면서도 신기하고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이런 사이였구나. 끌어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은 마음에 몇 번 대답이 늦어졌다.
“그렇겠네.”
“그때의 그 전화를 끝으로, 나를 완전히 끊어냈다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 해.”
지헌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오는 조금 후회했다. 그와 이토록 얘기가 잘 통할 줄 알았더라면 더 일찌감치 털어놓는 건데. 하지만 그가 스스로 알아냈다는 사실이 의미 있는 거니까. 정오는 모두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나하나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이 정오는 밀린 이야기에 박차를 가했다. 정지헌은 지금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한 남자였다. 신속히 그간의 일들을 업데이트시켜서 모든 상황에 대처 가능한 남자로 만들어야 했다. 정오는 부지런히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오빠가 조심해야 할 사람이 있어.”
정오의 진지한 표정에 지헌도 곧장 집중했다.
“사실 변호사를 만나려고 했거든. 혹시나 오빠한테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예나를 빼앗기지는 않을까 해서.”
“하여튼 이정오 씨, 차암 철두철미해서…….”
“그런 불안은 당연한 거라고. 내가 겪은 게 있는데 어떻게 마음 놓고 있을 수가 있겠어.”
지헌이 한숨을 쉬며 핀잔을 주니 정오는 불퉁스럽게 따졌다. 정말로 정오의 반응은 당연한 거였다. 지헌도 백 번 천 번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서운한 마음이 별개일 뿐. 정오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상담받으러 법무법인에 갔다가 채은엽 변호사를 만났어.”
“채은비 오빠 채은엽?”
“응. 그 사람이 자기 이름까지 속이고서 함정을 파두고 나한테 접근한 거야.”
“…….”
“채은엽은 예나가 오빠 아이란 걸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정오는 자신이 어떻게 그 법무법인을 찾게 되었는지와 그 사무실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를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미간의 우물이 깊어지도록 인상을 구긴 지헌이 혼란스러운 듯 시트에 몸을 기댔다.
“은엽이는 내 친구야. 그래서 채은비와도 알고 지냈던 거고.”
“…….”
“물론 그 녀석을 깊게 믿지는 않아. 그런 짓까지 벌였다는 건 충격이지만.”
어머니에 이어 친구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그의 근간을 뒤흔든 것 같아 정오도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그를 위하여,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진실이었다. 잠시 후, 그가 마음을 정리한 듯 끄덕였다.
“고마워. 얘기해줘서.”
“또 있어.”
“또 있다고?”
지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듣기 싫어서 그러는 것도, 그것 말고도 하고픈 말이 많아 투정을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껏 혼자 비밀들을 안고 살아야 했던 그녀가 안타까워 그런 거였다. 정오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두 달 전쯤에 예나가 학원 앞에서 납치당할 뻔한 적이 있었어.”
지헌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그의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간 것을 본 정오도 그때의 그 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울컥했다. 그녀는 그날의 모든 일을 지헌에게 털어놓고 경찰에게서 받은 CCTV 화면도 보여주었다. 예나의 가방에 들어 있던 쪽지 얘기까지 털어놓고 나니 조금은 후련했고 꽤 든든해졌다. 이제 자신과 함께 싸워줄 아군이 생겼다. 코끝이 찡해졌다.
“이것 때문에 오빠한테 일찍 얘기하지 못했던 거야. 오빠가 예나의 존재를 미리 알고 나를 겁주려고 한 게 아닐까 해서.”
지헌은 서운한 듯 턱에 힘을 주고는 울멍울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꽤 귀엽긴 했지만 정오는 조금 기가 막혔다.
“내 과거를 생각해봐! 어떻게 내가 오빠를 마냥 믿을 수 있었겠어! 게다가 정지헌 씨는 그 당시에 싸가지가 없었다고요!”
정오의 호소에 지헌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반성하는 줄 알았는데, 그 한숨의 끝에 내놓은 대답이란.
“결혼부터 해.”
몹시도 정지헌다웠다. 기쁨과 슬픔과 반가움과 안타까움과 기대와 후회. 많은 감정과 많은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쓸려 가고, 감정이 바닥나기 무섭게 또 다른 감정이 찾아오는 엄청난 밤. 그 끝은 너무나도 깔끔하고 유쾌했다. 정오는 웃어버렸지만 지헌은 웃지 않았다.
“농담 아니야.”
“천천히 해.”
“무슨 소리야. 당장 해야지.”
“예나가 제일 중요하지.”
“…….”
“가족이 되는 건, 예나가 받아들인 후에. 알겠어?”
대단한 사실을 깨달은 듯 멍해진 그의 얼굴을 보니 정오는 거듭 웃음이 났다. 정지헌 씨. 부모가 되면 인생의 중심이 이동해.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거야. 지구가 돌듯이, 계절이 변하듯이, 물 아래에서 빛이 굴절되듯이. 낮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밤에는 육지에서 바다로 바람이 불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인생이 변해. 아이가 자꾸 내 인생의 주인이 돼.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돼. 아이를 지키기 위해 나도 계속 강해지니까. 이제 아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당신도 내 마음을 알게 되겠지.
“예나가 오빠를 인정해주면, 그때 준비해도 돼.”
아직도 눈물이 다 마르지 않아 눈가가 촉촉한 남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러나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채은엽 변호사가 뭘 얼마나 알고 있는지 파악하고 싶어. 우리 예나 납치하려고 했던 여자가 누군지도.”
“내가 알아볼게.”
“오빠는 의심받지 않게 평소처럼 지내. 일단 내가 좀 생각해볼게.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정오는 또박또박 계획을 정리했다. 마음은 따끈따끈했지만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일 저녁때쯤 엄마한테 얘기할게. 오늘은 좀 그래. 시간도 늦었고.”
“…….”
“그리고 엄마한테 오늘 힘든 일이 있었거든.”
사실 오늘 엄마의 식당에 채은비가 찾아온 일까지 모두 토로하고 싶었으나 말을 아꼈다. 지금의 그는 충분히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
“알겠어. 얼른 들어가.”
“손 좀 놔줄래?”
정오가 놀리듯 부탁했다. 모두 정리된 것처럼 얼른 들어가라고 말하면서, 그가 정오의 손을 꼬옥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손끝이 저릴 정도로 꼬옥. 매정하긴. 지헌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았다. 7년 전의 연애는 기억에 없지만 짐작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었다. 그는 매번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손을 놓기까지 꽤 오래 걸렸을 것이고.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또 눈물을 보이게 될까 싶어 차마 말하지 못하고 정오를 놓아주었다. 차에서 내린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지헌도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빠.”
빌라 출입문을 열기 직전에 정오가 그를 불렀다.
“이제, 나 잊지 마.”
여름의 밤공기를 타고 흐른 따뜻한 간청이 그의 가슴을 문질렀다. 지헌은 곧장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너른 품에 폭 감싸인 정오도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뜨거운 감정 하나는 그대로 남아 있다. 정오야, 라고 부르던 그 심장은 여전히 같은 사람을 향해 뜨겁게 뛰었다.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밤. 몇 시간 눈을 붙인 정오는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정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주방으로 나갔다.
“뭐 벌써 일어나. 좀 더 자도 되는데.”
다가오는 정오를 보고서 국순이 말했다.
“어제도 야근한 거 아니야? 늦게 들어오는 것 같던데.”
방에서 가만히 숨죽여 눈물을 훔치다가 딸이 집에 들어오는 소리에도 나와보지 못한 엄마의 슬픔을, 정오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야근은 별로 안 했고 누구 좀 만났어.”
“부지런도 하다.”
국순이 냄비에 된장을 풀며 말했다. 금세 주방에 된장찌개 냄새가 구수하게 퍼졌다. 엄마와 함께한 아침이 7년째. 7년 동안 한결같이 이 자리를 지켜온 엄마께 어떻게 고마움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엄마.”
정오는 국순의 등 뒤로 가서 가만히 엄마를 끌어안았다.
“엄마, 오늘 나랑 놀까?”
“회사 안 가?”
“하루 쉬지 뭐.”
“쉰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쉬어. 그러다가 쫓겨나지.”
“쫓겨나도 엄마가 나 먹여 살릴 거잖아.”
“널 어떻게 먹여 살려. 밥도 코끼리만큼 먹는 놈을.”
“에이, 코끼리는 심했다.”
“그래. 코끼리는 아니지. 넌 고기까지 갖다 바쳐야 하니까.”
엄마의 목소리엔 물기가 없었다. 딸에게 약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언제나 애쓰는 강한 엄마. 이국순 여사의 딸로 태어난 이정오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왜. 이젠 회사 관두고 가수 하게?”
“어휴 참. 분위기도 없는 우리 엄마.”
“분위기 차릴 새가 어딨어. 밥상 차릴 새도 없다.”
엄마의 시니컬한 대꾸에 정오는 한숨을 쉬며 팔을 풀었다. 아무렇지 않은 엄마의 모습에 가슴이 찡했고 힘이 났다. 든든한 아침 식사로 기운을 차린 정오의 출근길. 예나와 정오가 명랑하게 인사했다.
“할머니 다녀오겠습니다.”
“엄마, 다녀올게. 저녁때 봐요.”
국순도 귀여운 모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 우리 강아지는 차 조심하고.”
“응!”
정오는 예나의 손을 잡고서 계단을 내려왔다. 어린이집 버스가 집 앞 골목까지는 들어오지 않아 정오가 매일 아침 출근길에 예나를 데리고 큰길로 나간다.
“오늘은 일찍 나왔네.”
계단을 내려와 빌라 출입문을 연 정오가 휴대폰으로 시각을 확인하며 말했다. 예나는 눈앞을 가리켰다.
“엄마, 저기 봐.”
정오도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지헌이 두 사람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정오가 놀라 굳은 사이에 성큼 다가온 지헌이 예나에게 먼저 인사했다.
“예나 안녕?”
“안녕하세요.”
정오는 인사 대신 질문을 던졌다.
“……잠은 좀 잤어요?”
“덕분에.”
덕분에 잤다는 얘기야, 못 잤다는 얘기야. 그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정오는 눈썹을 구겼다. 지헌은 그런 정오의 반응을 못 본 체하고 한참 동안 예나를 바라보았다. 잠이 올 리 없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한 지헌은 내내 뒤척이다가 새벽에 일어나 씻고 다시 정오의 집 앞을 지켰다. 두근거리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고 벅차기도 했다. 7년 전의 일을 떠올려보려고 애썼지만 더 이상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헌은 그 대신 정오를 7년 만에 다시 만난 날, 그리고 예나를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을 차근차근 되새겨보았다. 역시 지난 시간들은 후회되는 것이 많았다. 예나의 생일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정오를 괴롭힌 것을 비롯하여 정오와 예나에게 상냥한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것, 특히 예나가 안아달라고 했을 때 바로 안아주지 못한 기억은 그의 가슴에도 못처럼 박혔다. 다시 예나와 마주하니 한 번만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그를 괴롭혔다. 그런 지헌의 속을 알 리 없는 예나가 야무지게 물었다.
“아저씨 왜 왔어요?”
“예나 보려고 왔어.”
“…….”
“이제 매일 올 거야.”
뾰로통하게 물었으나 지헌의 대답이 싫지 않은 듯 아이의 입술 끝이 슬며시 들려 올라갔다. 그래도 예나는 새침함을 잃지 않고 대꾸했다.
“그래도 아저씨랑은 못 놀아요. 어린이집 가야 해서요.”
“그래. 어린이집 안 가는 날, 아저씨랑 놀자.”
지헌은 아이를 안아주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예나는 이전과는 달리 그 손을 곧장 잡았다. 아이의 귀여운 손가락이 지닌 간지러운 힘이 가슴께까지 금세 전해졌다. 다시 코끝이 뜨거워진 순간. 정오야. 우리 아이는 정말 예쁠 거야. 잊었던 기억이 기지개 켜듯 되살아났다. ……그때 나는 프러포즈를 하러 가고 있었고, 아이를 생각하니, 생전 처음 품어보는 감정에 금세 손가락이 생긴 듯 가슴이 계속 간지러웠고.
‘아…….’
지헌은 두 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조용히 탄식을 흘려보냈다. 더 이상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았다. 언젠가 태어날 아가에게. 밤사이 내린 눈을 가장 처음 밟게 해줄게. 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게 해줄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줄게. 손잡아줄게. 지켜줄게. 눈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