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흑역사2021.12.29.
“애 앞에서 울지 마.”
정오는 예나 몰래 지헌에게 주의를 주었다. 겨우 어린이집 버스 기다리는 처지에, 딸내미 시집이라도 보내는 듯이 눈시울이 붉어진 지헌을 보니 정오는 그저 우스웠다. 정오의 경고에도 그가 표정을 풀지 않아 정오는 더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다.
“오버하지 마. 사기꾼 새아빠처럼 보여.”
사기꾼 새아빠라는 말은 듣기 싫었는지, 그제야 지헌의 표정이 평범해졌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하고.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선생님의 지도로 곱게 인사하는 예나를 보며 또 주책맞은 지헌은 코끝을 붉혔다. 이 감정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의 모습, 행동, 손짓 하나하나에도 가슴이 먹먹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벅찬 마음이 내내 여울졌다. 정오는 손을 흔들며 지헌에게 몰래 말했다.
“쟤 지금 어린이집 가는 거야. 군대 가는 거 아니야.”
정오의 일깨움 덕택에 지헌은 그나마 남들 눈에 수상하게 보이지 않는 이별을 할 수 있었다. 정오의 눈에는 여전히 우스웠지만. 버스 문이 닫히고, 아이가 자리에 앉고, 버스가 출발하고, 그 버스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지헌은 오래오래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뜨거운 만남 후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이산가족 같은 아침 인사였다. 지헌에게는 모질게 잔소리를 했지만 사실 정오도 지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가 보고 싶어서 아침부터 달려온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싶어 그녀도 더 핀잔을 줄 수가 없었다.
“기분은 어때? 출근은, 운전은 할 수 있겠어?”
“괜찮아. 아주 좋아.”
“그래. 회사에서 만나. 나는 지하철 타고 갈게.”
“같이 가. 옆에 있어.”
지헌의 안위를 확인한 정오가 손을 흔들었지만, 곧장 붙잡혔다.
“네가 옆에 있어야 자극이 돼.”
“…….”
“기억이 돌아올 것 같다고.”
지헌의 고백이 영 거짓말은 아니었다. 좀 전에도 지헌은 7년 전의 상황을 조금 기억해냈다. 새로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지헌의 마음은 예나에 대한 것이 맞았다. 아이에게 많은 것들을 해주고 싶었던 예비 아빠의 마음. 기억을 인질로 삼으니 정오는 어쩔 수 없었다. 정오는 지헌에게 손을 잡혀 차가 주차된 곳으로 움직이며 야무지게 조건을 달았다.
“회사 근처에서 내릴 거야. 사람 없는 데서.”
“오다가 우연히 만났다고 하면 돼.”
“사람들이 잘도 믿겠다.”
“…….”
“어떻게 무슨 소문이 날지 몰라. 조심해줬으면 좋겠어.”
“그냥 먼저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
걸음을 우뚝 멈춘 정오가 그의 눈앞을 막아섰다.
“안 되지. 이게 다 누구 때문인지 생각해봐.”
또렷하게 뜬 커다란 눈이 지헌을 향했다.
“오빠가 채은비랑 가짜 연애만 안 했어도 이렇진 않았겠지.”
정오는 진심을 토로했다. 자신이 옹졸해 보일까 싶어 길게 할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내가 없는 7년 동안 되는대로 막살았던 당신에게, 사실은 아직도 서운해. 그 어떤 책임감도 없이 물 흐르는 것처럼 아무 집념도 없이 살았다는 게 너무 원망스러워.
“책임감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막살 수가 있어.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지.”
내가 없어도, 당신이 그렇게 살아선 안 되는 거지. 그가 내 것이 아니기에 함부로 꺼낼 수 없었던 서러움은 그것이었다. 정오의 질책에 지헌은 입술을 말아 감추었다. 머릿속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다니고 있었다. 왜 이렇게 꼼짝을 못 하겠지? 이게 나의 원래 모습인가? 혹시 나는 그녀에게 잡혀 살았던 건가? 이제 내 운명은 이렇게 되는 건가? 7년을 막살았던 만큼 반성하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는 잘할게.”
흡. 지헌의 시무룩한 표정이 우스워서 정오의 꾹 다문 입술이 우그러졌다. 정오의 마음속 악마가 그를 조금 더 놀려도 된다고 유혹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정지헌 씨가 내 전남친 손 봐준다고 했던 것 같다. 뭐라고 그랬더라? 보이는 데는 다 분질러버리겠다고 했던가?”
“…….”
“정지헌 씨, 왜 내 눈을 피해?”
“…….”
“응? 말을 해봐.”
“……가만. 그러고 보니 이정오 씨는 나보고 변태라고 했어?”
“응? 언제?”
“그랬잖아. 지난주 목요일에!”
“자기는 내 전남친한테 미친놈이라고 그랬으면서, 뭘.”
“…….”
흐으으으으. 정오처럼 따져보려다가 본전도 건지지 못한 지헌이 고개를 숙이고 깊이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워서 침 뱉기인 줄도 모르고 그토록 그녀의 전남친 욕을 했던 과거를 싹 다 도려내고 싶었다.
* 딸과 손녀딸을 배웅한 국순도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식당으로 출근했다. 전날 뒷정리도 하지 않고 식당을 떠나버린 것이 이제 와 후회되었다. 벌레도 꼬였을 것 같고 냄새도 날 것 같아 걱정을 앞세우고서 식당문을 열었다. 그리고 식당 안을 확인한 국순의 입이 벌어졌다.
“아니 이게 다 뭐야…….”
우렁각시가 다녀간 것처럼 깨끗하게 정리된 식당을 둘러본 국순은 쉽게 감격하지 못했다. 마음이 아팠다. 알아버렸구나. 딸애가 알아버렸구나. 그래서 아침에 그렇게 애교를 부린 거였어. 야근을 하고 그 고된 몸으로 식당에 와 엄마가 하지 못한 뒷정리를 대신했을 딸의 모습을 떠올리니 다시 한번 지난 밤이 후회되었다. 팔다리에 힘이 쑥 빠져 곁의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딸에게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 엄마는 슬퍼진다. 언제까지고 내가 딸아이의 기둥이, 그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딸아이는 엄마의 앞으로, 해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자꾸 나아가고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자라는 나의 아이가 조금 더 천천히, 천천히 가주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조금 더 해줄 만한 게 있도록. 딸 아이에 대한 대견함과 미안함에 한숨만 쉬던 국순은 바로 옆 테이블에 웬 색종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엉덩이를 들어 색종이를 집었다. - 사랑하는 엄마. 딸이 쓴 편지였다. 국순은 두 번 접힌 색종이를 펴 문장을 읽어내렸다. - 사랑하는 엄마. 언젠가 엄마한테 괜한 투정을 부렸어. 힘들다고. 사실 하나도 힘들지 않았는데 엄마가 있어서 어리광을 부렸어. 엄마는 항상 내 어리광을 받아주니까. 그래서 너무 미안해. 다시 태어나면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고 싶다. 엄마는 싫다고 하겠지만. 엄마. 그러니까 우리는 이 생에서 최고로 행복하게 살아요. 사랑해, 엄마. 편지를 읽는 내내 정오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딸아이다운 담백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 편지. 편지의 끝에는 추신처럼 몇 줄의 문장이 더 있었다. 자그마한 글씨였다. 노안이 오기 시작한 엄마가 차마 읽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서 숨겨놓은 메시지 같았다. - 채은비 그 년은 가만두지 않겠어. 걱정 마, 엄마. 나는 이제 이기는 전쟁만 할 테니까. 두고 봐. 엄청난 행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게…… 엄마를 웃기려고 쓴 건지, 엄마의 분을 풀어주려고 쓴 건지. 하지만 하늘색 색종이를 매만지는 국순의 마음은 이내 하늘처럼 너그러워졌다. 엄청난 행복이 뭐건 간에 조금만 천천히 왔으면 좋겠네. 내 예쁜 딸. 엄마는 엄청난 행복이 필요 없어. 지금 이대로도 너무나 행복하거든. 국순은 처져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딸이 혼자 울고 있지 않을까 해서, 천 리까지 흘러갈 눈물을 안에 가두어두고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해서, 자나 깨나 딸아이의 걱정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새 늠름한 어른으로 성장해서 엄마 몫의 걱정까지 대신하는 기특한 딸이 되었다. 엄마를 한없이 약하게도, 강하게도 만드는 보석 같은 딸. 정오야, 엄마는 다시 태어나도 네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꼭 너의 엄마가 아니더라도. 네 옆에서 온종일을 노래하는 새가 되어도, 너와 함께 크는 나무가 되어도 좋겠다. * 은비는 회사에 출근하여 얼굴도장만 찍고 외근 핑계를 대고서 밖으로 나왔다. 회사 동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아 더 이상 회사 생활을 즐길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건 이정오 때문이었다. 회사를 나선 은비는 은엽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오빠, 나 고소할 거야. 고소장 써줘.”
대뜸 사무실에 들이닥쳐서는 고소장을 써달라니. 동생의 요구에 은엽은 짜증이 났다. 본 척도 하지 않고 들고 있던 서류를 넘기고만 있으니 은비가 정보를 몇 마디 덧붙였다.
“어젯밤에 이정오가 나 폭행했어. 내 뺨을 쳤다고.”
후우. 은엽은 이를 악물고서 사납게 눈을 뜨고 말했다.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은비는 그런 은엽의 반응이 서러웠다.
“이정오가 날 때렸다고 말했잖아. 동생이 맞고 왔다고 하면 너 괜찮니, 어떻게 된 일이니, 그렇게 물어보는 게 정상 아니야?”
“이정오가 괜히 그랬겠어? 네가 열 받을 만한 짓을 했으니까 그랬겠지.”
은엽이 만난 이정오는 참한 인상이었으나 맹한 사람은 아니었다. 변호사를 만나 꽤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말을 조리 있고 분명하게 하는 사람이었고 눈썰미도 있어 보였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은엽은 정오가 털어놓은 ‘자신을 괴롭히는 C양’이 누구인지 금방 파악했다. 그건 동생 채은비였다. 정오의 말을 듣는 내내 은엽은 화가 치솟았다. 동생이 너무나도 일차원적이고 무식해서 화가 난 거였다. 동생은 조금도 쓸모가 없었다. 차라리 이정오가 동생이었다면 좋았겠다 싶기도 했다.
“됐어. 오빠 아니면 변호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이를 갈고 있는 은엽에게 은비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제 인생에 오빠가 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은비도 더 이상 사무실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문손잡이를 잡은 은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참.”
오빠가 그것만은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나도 오빠 없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오빠는 영 내 일에 관심도 없는 것 같고 오빠한테 다 맡기려니 답답하기도 해서 내가 어머님께 직접 얘기했어.”
“무슨 얘길.”
“지헌 오빠 어머님한테 이정오 얘기 했다고.”
“……뭐?”
내내 서류만 보고 있던 은엽이 서류를 내려놓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은비는 은엽에게로 몸을 돌려 어젯밤의 일을 얘기했다.
“이정오가, 일곱 살짜리 애까지 딸린 미혼모가 지헌 오빠한테 집적댄다고 얘기했…….”
짜아악! 그러나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은비는 저편으로 나가떨어졌다. 은비가 쓰러지며 협탁에 쌓여 있던 문서탑까지 건드리는 바람에 사무실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정오의 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매운맛이었다. 은비는 충격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왼손으로 뺨을 감싸고서 은엽을 올려다보았다.
“……오빠.”
“오빠라고 부르지도 마. 쓰레기 같은 게.”
“…….”
“뭘 해?”
“…….”
“뭘 했다고?”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진 은엽은 악마처럼 보였다.
“네가 감히 내 일을 망쳐?”
“…….”
“네가 무슨 짓을 한 건 줄이나 알아?”
옆으로 찢어져서 험악하게 뜨인 눈이 살기를 띠고서 동생을 쳐다보았다. 당장 동생을 목 졸라 죽이기라도 할 듯이.
“네가 장영미한테 친손녀딸을 갖다 바쳤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손녀딸을!”
“그, 그게 무슨…….”
뺨을 맞은 것보다 더 큰 충격에 은비는 선득해졌다. 손녀딸이라니? 은비의 두 눈에 눈물이 돋았다.
“멍청하면 가만히 있기라도 해야지.”
“…….”
“넌 쓰레기야. 정지헌이랑 결혼도 못 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살아갈 가치도 없는 쓰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