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그놈 데려와2022.01.01.
회의가 없는 나른한 오후. 정오는 업무를 이어가다가 목을 길게 빼고 은비의 자리를 살폈다. 오전에 외근이라며 나간 채은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제작 1팀 안찬섭 팀장이 몇 번 은비가 어디 갔는지 찾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고소하겠다고 돌아다니고 있을 것 같은데.’
제 오빠한테 가서 쪼르르 일러바치려나? 그럼 채은엽은 누구의 변호사가 되어줄까? 채은엽은 당연히 이정오를 버리고 채은비 편에 설 것이다. 애초부터 자신에게는 하진철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했으니 필요한 정보만 얻고 나면 곧장 연락을 끊겠지.
‘앞으로 채은엽을 만날 수 있는 건 한두 번 정도야. 그마저도 엄청 각오해야 할 테고.’
채은엽을 어떻게 골탕 먹여야 할까 고민하는 정오에게 박영광 차장이 다가왔다.
“이 대리, 정 이사님이 집무실로 오라고 하는데.”
“아, 네. 알겠습니다.”
정오는 지헌이 무슨 일로 자신을 찾을까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훈이 의자를 돌려 정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같이 가드려요?”
“아니야. 혼자 갈게. 고마워.”
정오가 기훈에게 미소 지었다. 성미란 팀장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오와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제, 화장실에서 소동이 있었다. 정오가 은비를 때렸고 은비는 정오를 거칠게 비난했다. 그 일 때문인지 동료들이 더욱 정오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결같이 대하는 사람은 고은주 대리뿐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정오는 조용히 보고를 하고 집무실로 떠났다. 집무실 앞에 늘 앉아 있던 비서가 자리에 없었다. 똑똑.
“이사님. 이정오입니다.”
“네.”
왠지 문 가까이에서 대답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홱. 문을 열자마자 안쪽에서 뻗어온 팔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멜버른의 호텔에서와같이. 달칵. 지헌이 정오를 품에 안고서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그 품이 참 넓고 포근해서 좋긴 했지만, 정오는 그의 행동이 걱정스러웠다.
“이러다간 비서님이 바로 눈치채겠어.”
“윤 비서 오늘 휴가야.”
“볼일도 없으면서 집무실로 부르지 마.”
“볼일이 왜 없어. 네가 제일 큰 볼일인데.”
정오의 어깨에 머리를 푹 기댄 지헌이 말했다. 그녀가 벗어나려 하니 더욱 세게 압박하고서.
“답답해.”
“나도 답답해.”
“그렇지? 너도 답답하지?”
“아니. 오빠가 너무 힘을 줘서 답답하다고.”
정오가 그의 결박을 힘껏 밀어내며 반박했다. 밀려난 지헌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실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사님, 일에는 순서가 있다고요. 그 순서에 안 맞으면 사람들은 불편하게 생각하는 거고.”
정오가 눈을 무섭게 뜨고서 지헌과 맞섰다.
“우리 문제는 치정 싸움이 끼어 있어서 사람들이 멋대로 떠들기 딱 좋은 소재야. 제대로 정리해야 해. 시간도 좀 흘러야 하고.”
“하지만 예나가 기다리잖아.”
“그래도 급하게 하면 안 되지.”
“…….”
“오빠 변덕이 며칠 갈지도 모르는 거고.”
“뭐?”
그녀의 훈계가 서운하긴 했으나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려 했던 지헌은 기가 막혔다.
“내 마음이 변할 거라고 생각해?”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너나 변하지 마, 하고 으름장을 놓고 싶었지만 그는 반박할 힘이 없었다. 7년이나 그녀를 기억해내지 못한 자신의 탓이 가장 크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
“…….”
“절대 안 변해.”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그가 변할 리 없다는 걸 정오도 알고 있었다. 7년 전의 그 본능 그대로 접근해온 남자니 어련하겠냐마는.
“그래. 믿을 테니까 오빠도 모범을 보여. 일도 대충대충 하지 말고 열심히 하고. 어? 본부장 자리에 앉았으니 진정한 리더가 되어야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비서 자리에, 아니, 아예 집무실 한편에 정오의 자리를 만들어놓을 것만 같아 잽싸게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사님, 회사에서는 호칭 주의해주시죠. 괜한 일로 저 부르지도 마시고요.”
“그래도 너를 봐야 자극이 돼서 기억이 좀 더…….”
“회사에서는 일만 합시다. 아셨죠!”
서로 떨어져 살았던 7년. 달라진 건 지헌이 아니라 정오였다. 그녀는 매섭게 이성을 챙겼다.
* 어제에 비해 평화롭게 흘러간 하루. 정오도 일찍 퇴근하여 국순의 식당일을 도왔다. 오늘은 꽤 손님이 있어서 8시가 넘어서야 식당문을 닫게 되었다. 정리까지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9시가 넘었다. 예나를 먼저 재우고 거실로 나온 정오가 국순의 옆에 앉았다. 빨래를 개던 국순이 흘끔 보고서는 뚱하게 물었다.
“왜. 또 배고파?”
“엄마는. 내가 식충인 줄 아나.”
정오는 구시렁거리며 수건을 집어 들었다. 어젯밤에 식당에서 있었던 일과 정오의 편지에 대하여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는 견고한 사랑. 하지만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는 말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엄마. 나 할 말이 있어.”
수건 하나를 깔끔하게 개서 잘 쌓아놓은 정오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왜 무릎을 꿇고 그래. 무섭게.”
긴장한 정오가 자리에 고쳐 앉자 국순이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회사라도 때려치운 거야?”
“어후, 엄마. 내가 왜 회사를 때려치워.”
“그럼 왜. 뭐가 또 문제야.”
“……예나 아빠를 만났어.”
딸의 행동이 못마땅한 듯 벌어진 입이 딸의 이어진 고백에 더욱 크게 벌어졌다. 하지만 역시나 이국순 여사는 크게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괜찮아, 너는?”
내 딸이 괜찮은지, 그게 먼저였다.
“당연히 괜찮지.”
“어떤 놈인데. 잘 살고는 있대?”
“응. 엄청 잘 살아.”
엄청 잘 살고 있다는 대답에도 국순의 인상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며칠 전 정오와 함께 식당에 찾아온 남자가 떠올랐다. 회사의 이사라고 했는데, 왠지 정오를 대하는 눈빛이 남다르게 여겨졌다. 설마 그놈은 아니겠지.
“그때 식당에 같이 온 이사님 있지. 그 사람이야.”
설마 했는데, 세상에. 후! 국순이 거칠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엄마가 속으로 이를 갈고 있는 것이 정오의 눈에 잘 보였다. 국순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잘 갠 티셔츠는 어느새 바짝 구겨져 있었다. 정지헌 씨. 당신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디 하나 부러졌겠어……. 정오는 국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사연이 좀 있어. 그 사람이 기억상실증이거든.”
“…….”
“내가 임신한 걸 몰랐대. 나를 아예 잊어버렸었대.”
“잊어버렸다고? 7년 동안을?”
“응. 7년 동안.”
“몹쓸 놈. 그걸 어떻게 잊어버려. 진짜야? 거짓말 아니고?”
“응. 내가 다 확인했어.”
“아이고, 세상에.”
“…….”
“세상에. 세상에…….”
국순은 지진지대의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엄마의 눈치만 보며 눈을 깜빡이는 딸아이의 얼굴을 확인하니 더욱 안쓰러웠다. 이 어린 것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도 없을 것 같아 속이 미어졌다.
“그놈 데려와. 내일 바로.”
국순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서 엄하게 일렀다.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 각오하라고 해.”
엄명을 던져놓고 엉뚱하게도 밖을 나서는 엄마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정오가 물었다.
“어디 가.”
“회초리 꺾으러.”
“이 밤에? 아, 아니, 남의 자식을 때리겠다고?”
“신고식이여.”
“…….”
“내 자식 눈에서 피눈물 나게 했으면 지도 두들겨 맞을 각오를 해야지.”
“엄마, 피눈물은 안 났어!”
달칵. 정오의 반박에 콧방귀를 뀌는 일도 없이, 엄마는 홀연히 집을 떠났다. 어쨌든 한고비를 잘 넘긴 정오는 곧장 지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정오의 전화만 오매불망 기다리던 지헌은 득달같이 전화를 받았다.
[엄마한테 얘기했어.]
“뭐라셔?”
두근두근두근…….
[내일 데려오래.]
하아아……. 긴장이 풀리며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지헌은 의자에 등을 깊이 기대고서 정오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아직 안심하지 마. 오빠 어쩌면 맞을지도 몰라. 회초리로 맞을 수도 있으니까 옷은 두껍게 입고 오는 게 좋겠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하는 채로 목소리만 들으니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호했다. 정오가 그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독이는 희망의 계획 하나를 추가했다.
[엄마랑 얘기하고 나서, 우리 예나한테도 얘기하자. 내일.]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 다음 날 오후. 바둑학원 앞. 어린이집 버스가 서고 예나가 내렸다. 진서의 임신으로 예나는 다시 등하원 모두 어린이집 통학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예나를 기다리고 있던 바둑학원 선생님이 반가운 얼굴로 예나를 맞았다. 머리를 발레리나처럼 올려 묶고 예쁜 드레스를 입은 예나는 공주님처럼 보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예나 오늘 예쁘게 입었네?”
“네. 손님이 온다고 해서요.”
“무슨 손님?”
“몰라요.”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예나는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오늘 아침에도 아저씨가 찾아왔다. 엄마의 이사님. 아저씨는 어린이집 버스 앞에서 손을 흔들며 ‘내일 또 봐’라고 말하지 않고 ‘이따 보자’라고 말했다.
‘아저씨가 엄마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것 같아.’
엄마도 아저씨를 좋아하나? 그렇다면 오늘의 손님은 아저씨겠지? 왠지 그것이 서운하기도 한 명탐정 예나였다. 예나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서 바둑학원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타고 가자.”
선생님이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로 예나를 이끌었다. 예나는 선생님과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히려 하는 찰나에 누군가 그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문이 다시 열리고 한 여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크고 몸이 곧은 중년 여자였다. 걸친 옷과 액세서리가 값나가는 것으로 보여 예나의 선생님은 여자가 이 건물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선생님의 손을 꽉 붙들고 있는 예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너구나. 네가 예나구나.
“몇 층 가세요?”
여자가 버튼을 누르지 않아 선생님이 먼저 물었다. 여자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버튼을 눌렀다. 버튼 바로 옆에 서 있던 예나가 한 걸음 피했지만 여자의 화려한 팔찌가 예나의 머리에 걸렸다.
“아야!”
예나가 소리를 냈다.
“어머 이를 어째!”
여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팔찌를 재빨리 거두어갔다. 옆에 서 있던 선생님이 미처 살펴볼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아얏!”
예나는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아침에 정오가 예쁘게 빗겨준 머리가 헝클어졌다. 머리가 엉망이 된 걸 알고서 예나의 얼굴도 울상이 되었다.
“아이고 예쁜 머리가 다 망가졌네. 이를 어쩌나…….”
여자가 민망한 듯이 말하며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5만 원짜리 지폐였다.
“아가야. 미안하다. 이걸로 어떻게 안 될까?”
“아니, 괜찮아요. 아이 머리는 제가 다시 묶어주면 돼요.”
선생님이 여자와 예나의 사이를 막아서며 말했다.
“아유. 정말 미안해요. 아가야.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하니 선생님도 예나도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먼저 사과해오는 사람을 너른 마음으로 용서하라고 배운 예나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예나와 선생님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여자는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팔찌를 꽉 쥔 채로. 잠시 후 위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섰으나 여자는 내리지 않고 1층의 버튼을 다시 눌렀다. 1층에서 내린 여자는 건물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애는 예쁘네.”
영미는 차 안에서 건물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갖고 온 팔찌에서 머리카락을 뜯어내 봉투에 담아 최 기사에게 건넸다.
“나는 집에 내려주고 이건 이 봉투에 쓰여 있는 주소로 갖다 주면 돼요. 직원한테 미리 얘기해놨으니까 시간 안에 늦지 않게 갖다 줘요.”
“알겠습니다, 사모님.”
대답한 최 기사는 차를 출발시켰다. * 은엽은 초조하게 최 기사를 기다렸다. 기다린 지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최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기사님.”
“네. 변호사님.”
은엽은 제 뒤에 있는 유아용 전동자동차를 기사에게 보여주었다.
“아유. 엄청 새 거네요.”
“조카가 몇 번 안 탔다고 하더라고요. 새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면 좋겠네요.”
“보나 마나 엄청 좋아하죠. 고맙습니다.”
이 만남을 위해 은엽은 오늘 꽤나 노력했다. 오며 가며 인사했던 최 기사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파악한 은엽은 조카가 쓰던 전동자동차를 주겠다며 주구장창 연락하면서 장 여사의 동태를 살폈다. 은비에게서 예나의 존재를 확인한 장 여사가 바로 행동을 개시할 거라고 확신했다. 역시, 장 여사는 예나를 찾아 바둑학원에 직접 들렀다.
“트렁크에 실으셔야 할 것 같은데, 도와드릴까요?”
“아유. 아닙니다, 변호사님.”
최 기사는 기분 좋은 듯 커다란 전동자동차를 번쩍 들었다. 그동안 은엽은 기사가 끌고 온 차의 앞 좌석을 살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운전석 바로 옆에 하얀 봉투가 보였다. 은엽은 재빨리 문을 열고 봉투를 집어 들어 그 안을 살피고, 머리카락이 든 봉투를 제가 가져온 것과 바꾸었다. 이제 됐어. 모든 것을 해낸 은엽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