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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엄마는 나의 세상 (74/183)

74. 엄마는 나의 세상2022.01.12.

예나의 두 눈에 눈물막이 생겨나는 것을 보며, 지헌은 한 번 더 말했다.

16551155135199.jpg“아저씨가 사실은 아빠야.”

16551155135205.jpg“…….”

16551155135199.jpg“예나의 아빠. 예나의 진짜 아빠.”

거듭 목소리를 내는 동안 심장이 뻐근하게 죄여들었다. 예나야. 아빠야. 아빠야, 아빠. 백번이고 천번이고 하고 싶은 말. 그리고 듣고 싶은 말. 사실은 아주 오래전에 들었어야 했던 말. 불렀어야 했던 이름. 시간이 멈춘 듯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오와 국순도 숨을 죽이고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예나의 눈동자에 눈물이 더 크게 부풀었다. 예나는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는 듯 얼굴에 힘을 주었다. 얼굴 전체가 새빨개졌다.

16551155135205.jpg“……거짓말.”

예나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켜보던 정오가 나섰다. 곁으로 다가온 정오가 예나의 어깨를 다독이며 조근조근 말했다.

16551155135221.jpg“예나야, 정말이야. 진짜 아빠야. 예나의 진짜 아빠.”

16551155135205.jpg“거짓말.”

예나의 목소리가 고집스럽게 높아졌다.

16551155135205.jpg“그럼 왜 지금까지 모른 척했어?”

예나의 예리한 지적에 정오가 답했다.

16551155135221.jpg“아빠가 기억을 못 했어. 우리 예나도 기억 못 할 때 있잖아.”

16551155135205.jpg“거짓말.”

16551155135221.jpg“…….”

16551155135205.jpg“어떻게 기억을 못 해. 나는 우리 엄마, 할머니, 할머니 친구들까지 다 기억하는데.”

예나는 씩씩대며 따졌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빠라면서 어떻게 한 번도 나타나질 않았어? 왜 날 모른 척했어? 아빠의 꿈을 꾸었던 적이 더러 있었다. 꿈속의 아빠는 하늘나라에 있었다. 하늘나라에 있어서 예나에게 찾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이따금 꿈속에서 찾아올 테니 낮에 신나게 놀고 밤에 만나자는 말을 했다. 어느새 꿈은 일곱 살 예나의 사고를 설득했다. 예나는 아빠가 하늘나라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으면서 딸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건 납득할 수 없었다. 자격이란 말은 모르지만 자격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그런 아빠는 자신의 아빠가 될 자격이 없었다.

16551155135205.jpg“왜 그런 얘길 해?”

얘기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6551155135205.jpg“그런 얘길 왜 해!”

엄마랑 할머니랑 아저씨랑, 세 사람이, 세 어른이 나를 속이려는 것 같아. 내가 꼬맹이라고 놀리는 것 같아. 나도 기억력 좋은데. 나는 아저씨랑 했던 바둑대국까지 다 기억하는데. 그때 아저씨는 나를 조금 귀찮아했었는데. 예나는 지헌을 처음 만난 날, 지헌이 자신을 바라보며 지었던 그 무심한 표정까지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이는 기억하고 있다. 서러움이란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날의 장면, 장면을 가슴속 깊은 곳에 시간 순서대로 쌓아두고 있었다.

16551155135205.jpg“아저씨 나가!”

애써 참아왔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16551155135205.jpg“나가! 우리 집에 오지 마!”

으아앙. 울음이 뻥 하고 터져버리자 정오가 예나를 끌어안아 다독였다.

16551155135221.jpg“예나야. 아유, 왜 울어, 우리 예나.”

정오가 토닥여주니 그 품에 의지하듯 예나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지헌 또한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지헌이 움직이지 않자 예나는 국순을 향해 외쳤다.

16551155135205.jpg“할머니이, 아저씨 나가라고 해애! 으어어엉.”

예나 생일도 안 왔으면서 어떻게 아빠야. 그런 아빠가 어디 있어. 딸이 일곱 살이 다 되도록 나타나질 않는 아빠가 어디 있어.

16551155135205.jpg“빨리이! 빨리 나가라고 해애!”

아침부터 뭔가 이상했다. 아니, 어제부터 이상했다. 아니, 아저씨가 코알라 인형을 건넨 그날부터. 엄마와 함께 만난 그날부터 아저씨의 태도가 이상해졌다. 나도 알아. 아저씨가 날 만나러 온 게 아니라는 거. 우리 엄마를 빼앗아가려고 온 거라는 거.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아저씨는 어른이고 나는 어린인데. 어린이는 엄마가 필요한데. 내 세상에는 엄마밖에 없는데. 엄마의 세상엔 내가 전부였는데. 으아아앙. 들이닥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울음소리만 거세어졌다. 지헌을 먼저 보낸 후, 정오는 예나를 다독였다. 예나의 울음은 쉬이 그치질 않았다. 온종일 무릎에 앉히고 함께 TV를 보고 동화책도 몇 권 읽어주고 나서야 예나는 울음을 그치고 잠자리에 누웠다. 그사이에도 지헌의 얘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아 정오는 안타까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16551155135221.jpg“예나야.”

16551155135205.jpg“응?”

16551155135221.jpg“예나는 아빠 없어도 돼?”

의외로 대답이 빨리 나왔다.

16551155135205.jpg“응. 예나는 아빠 없어도 돼.”

이미 많이 울어서인지 더 이상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예나는 제 확실한 마음을 어느 때보다도 말끔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16551155135205.jpg“나는 엄마랑 할머니랑 이렇게 셋이 살고 싶어. 평생.”

냉랭하게 대답하고서 기다렸으나 엄마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반응이 없으니 초조해졌다. 내가 너무 나쁘게 말해서, 엄마가 날 미워하게 된 걸까? 왠지 어두운 방 안에서 엄마의 눈이 빛나는 것 같아서, 엄마가 우는 건 아닐지 걱정되기도 했다.

16551155135205.jpg“엄마 사랑해.”

예나는 정오를 폭 끌어안으며 말했다. 엄마는 나의 세상.

16551155135221.jpg“엄마도 사랑해.”

다행스럽게도, 품에서 엄마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예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16551155135205.jpg“예나가 더 사랑해.”

16551155135221.jpg“얼만큼?”

16551155135205.jpg“온 세상만큼. 온 세상만큼 사랑해.”

예나는 정오를 더 꽉 끌어안으며 제 마음을 고백했다.

16551155135205.jpg“그러니까 나 떠나지 마, 엄마.”

16551155192546.jpg

  * 영미는 유전자 연구소에 지헌과 예나의 친자 검사를 의뢰했다. 연구소장이 오늘 밤 늦게라도 전화로 결과를 통보해준다고 하였기에 영미는 오매불망 연락을 기다렸다. 왠지 아이가 지헌의 핏줄일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예쁜 아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 표정이 뇌리에 박혀 지워지질 않았다.

16551155222761.jpg‘그 아이가 우리 지헌이의 아이라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헌이한테는 뭐라고 해야 하는가. 너무나도 걱정스러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밤 9시가 넘어서 전화가 걸려왔다. 영미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16551155222761.jpg“네. 소장님.”

16551155222773.jpg[사모님. 보내주신 자료, 검사 완료했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16551155222761.jpg“……결과가 어떻던가요?”

16551155222773.jpg[두 검체물의 유전자 타입은 일치하는 게 없다고 나오네요.]

16551155222761.jpg“그럼…… 친자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16551155222773.jpg[네. 전혀 가능성 없습니다.]

다리에 힘이 쫙 풀리며, 영미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불안함, 초조함이 빠르게 씻겨 내려가고 동시에 화가 치솟았다. 그럼 내 아들이 그 여우 같은 계집애한테 놀아나고 있다는 거야?

16551155222761.jpg“소장님, 검사 결과지 좀 팩스로 보내줘요.”

영미는 분노에 떨려오는 목소리로 요청했다. * 지헌은 바로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정오의 집 앞을 지켰다. 밤 9시가 넘었을 무렵 정오가 밖으로 나왔다. 지헌도 정오의 모습을 보고 곧장 차에서 내려 달려왔다.

16551155135199.jpg“예나는 자?”

16551155135221.jpg“응.”

정오는 대답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엔 쉬운 게 하나도 없다. 딸이 이토록 아빠를 거부할 줄이야. 지헌은 국순의 당부가 어떤 의미인지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예나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 독단, 그 고집이 자신의 유전자라는 걸 알기에 불평할 수도 없었다.

16551155135199.jpg“어머님은 알고 계셨던 거 같아. 예나가 단번에 날 받아들이진 않을 거란 거.”

16551155135221.jpg“훗. 그렇구나. 어쩐지.”

그런데 그 고백에 정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16551155135221.jpg“그럼 오빠. 나도 괜찮아.”

16551155135199.jpg“괜찮다고?”

그럼…… 나는? 지헌의 입장에선 정오의 의견이 청천벽력이었다. 정오는 또박또박 대답을 이어갔다.

16551155135221.jpg“내가 뭐 오빠가 엄청 예뻐서 받아준 것도 아니고. 우리 예나가 있으니까, 예나한테도 아빠가 필요하니까 받아준 건데 예나가 저렇게 나온다면야 나도 할 말 없지.”

딸에게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어서 무작정 지헌을 받아들였는데 딸의 생난리를 경험하고 나니 조금 더 천천히 가도 되겠다 싶었다. 지헌이 상처받은 표정이라 안됐단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어른이니까.

16551155135221.jpg“예나를 이해해주자.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거야. 예나는 오랫동안 나랑 짝꿍이었으니까.”

16551155135199.jpg“…….”

16551155135221.jpg“아무리 아빠라도 짝꿍을 빼앗기는 마음이 들면 싫잖아.”

정오의 설득에 지헌은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지헌 또한 정오가 회사의 다른 남자 동료들과 친한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일이란 걸 잘 알면서, 인정하면서도 그녀가 제 곁에만 있었으면 하는 욕심을 포기하지 못했다. 예나가 아빠를 닮아 독점욕이 강하구나.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도 아니고, 딸이 엄마가 좋다는데, 이해해야지. 마음을 바꿔먹으니 왠지 착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 부모가 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리고 인내심을 갖는 것. 7년을 지각한 초보 아빠는 그렇게 인생을 배워간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된 지헌은 정오에게 한 걸음 다가가 가만히 끌어안고서 사과했다.

16551155135199.jpg“미안해.”

16551155135221.jpg“응? 뭐가?”

16551155135199.jpg“그냥. 모든 게 다.”

정오의 집에서 나와 그녀를 기다리며 지헌은 다시금 지난날을 반성했다. 국순의 이야기와 예나의 눈물이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정오에게 미안한 마음은 가득했으나 미안하다는 말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정말로 그녀는 자신이 마냥 좋아서 받아준 것도 아니었을 텐데. 아이를 위해서 마음을 많이 양보했을 텐데.

16551155135199.jpg“아이를 혼자 키우는 건 힘든 일이잖아.”

지헌이 포옹을 풀고서 따뜻하게 말했다. 정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라서.

16551155135221.jpg“아니야. 엄마가 있어서 혼자는 아니었어.”

16551155135199.jpg“그래도 아프고 힘들었겠지.”

16551155135221.jpg“아니. 우리 예나를 봐. 얼마나 예쁜가. 예나를 보면 피로가 싹 풀린다고. 그래서 하나도 안 힘들었어…….”

목소리는 덤덤하게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눈물이 예고도 없이 뚝 떨어졌다. 정오도 당황스러워 서둘러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16551155135221.jpg“아니, 이건 서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고…….”

16551155135199.jpg“미안해.”

16551155135221.jpg“아니, 난 진짜 별로 안 힘들었는데?”

그의 사과가 너무 고마워서 울기보다는 웃고 싶었는데, 작정 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난감했다. 그때 우두둑, 바닥에도 굵은 물줄기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소나기였다. 지헌이 재빠르게 제 옷을 벗어 그녀의 머리에 덮어주고 자신의 차로 이끌었다. 빌라 건물을 눈앞에 두고 더 먼 차 안으로 이끄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오는 휘청거리며 그를 따랐다. 정오를 먼저 밀어놓고 뒤늦게 차 안으로 들어온 지헌이 머리의 물기를 털며 말했다.

16551155135199.jpg“비 그치면 들어가.”

16551155135221.jpg“…….”

16551155135199.jpg“아, 집이 여기지, 참.”

뜻밖의 비에 당황하여 무작정 차 안으로 끌고 들어온 거였다. 정오는 아하하하, 크게 웃고 말았다. 나는 또, 무슨 야한 계획이라도 있나 했지. 지헌이 웃지 말라고 불평했지만 정오의 웃음소리는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빗소리보다 웃음소리가 더 시원한 밤이었다. 행복은 어쩌면 작은 결핍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처음부터 모두 갖추고 살았다면 무엇이 고마운지도 몰랐을 인생에서, 결핍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려준다. 그 결핍을 우리 힘으로 채워나갔던 기억에서, 그 결핍 속에서 행복해지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기억에서. 우리는 정말로 행복했었고 잊지 못할 추억을 많이도 만들었다. 그러니 당신을 원망하는 마음 같은 건 없어. 돌이켜 보니 모두 좋은 기억이었어. 우리는 계속 행복했거든. * 다음 날 아침, 6시 30분. 딩동, 딩동, 딩동. 아침부터 누군가가 다급하게 초인종을 눌러댔다. 예나 생각 정오 생각을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 지헌은 간신히 일어나서 무거운 걸음으로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장영미 여사였다.

16551155135199.jpg“어머니, 이 아침에…….”

지헌이 원망스럽게 한숨을 쉬었으나 영미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현관문을 활짝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16551155222761.jpg“어젯밤에도 왔었어. 현관문 비밀번호는 언제 바꾼 거야?”

16551155135199.jpg“좀 됐어요.”

영미의 태도가 불만스러웠지만 지헌은 어머니가 직접 찾아온 김에 정오에 대해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7년 전 자신을 사칭한 그 전화. 그리고 이정오에 대한 모든 것이 지워진 과거. 그 모든 것의 배후에 어머니가 있다는 걸 확신했다. 그런데 지헌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영미가 먼저 물었다.

16551155222761.jpg“너, 이정오 그 아이 만나니?”

16551155135199.jpg“…….”

16551155222761.jpg“그 애 딸도 만나고?”

식탁 위에 놓아둔 태블릿. 그 큼지막한 화면에 누가 봐도 어린이용 자전거로 보이는 사진이 크게 떠 있었다. 지헌이 이예나라는 아이에게 선물하려 한다는 걸 영미는 감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16551155222761.jpg“이정오가 너한테, 이예나가 네 딸이라고 하던?”

16551155135199.jpg“그거 확인하러 오셨어요? 이 아침에?”

16551155222761.jpg“정지헌!”

엄마의 입장에서는 복장이 터질 일이었다.

16551155222761.jpg“엄마가 알아봤어. 그 아이, 네 딸이 아니야.”

미련한 내 아들. 못난 내 아들. 7년 전에도 그렇게 당하고서 또 속아 넘어가는 이 불쌍한 아이.

16551155222761.jpg“네 친딸이 아니야.”

아들을 생각하니 화가 치솟는 와중에도 눈물이 맺혔다.

16551155222761.jpg“그 애, 이정오가 어디서 누구 핏줄인지도 모르는 애를 낳아와서는 너한테 사기 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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