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인생의 매운맛2022.01.15.
“넌 이정오한테 완전히 속고 있는 거라고!”
지헌은 흥분해서 소리치는 영미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어머니야말로 어떻게 아셨죠? 정오와 제가 만난다는 걸.”
질문하는 목소리에는 냉기가 흘렀다. 영미는 벌어진 입을 다물고 눈썹을 구겼다. 지헌의 추궁이 이어졌다.
“제 뒷조사라도 하십니까?”
“나는…… 은비한테 들은 거야. 그래. 은비한테.”
“은비가요. 은비가 대체 무슨 얘길 했길래.”
“…….”
“채은비가 제 뒷조사를 했다는 말씀이세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아뇨. 제겐 그게 중요한데요.”
“……뭐?”
“대체 누가 어머니한테 예나가 제 친딸이니 아니니 그런 말을 한 거죠?”
“내가 알아본 거야. 내가 직접!”
영미는 어떻게든 채은비에 대한 이야기를 건너뛰고 이정오란 아이의 추악한 행실을 짚어주고 싶었으나 아들은 좀처럼 핵심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너무나 답답하고 원통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유전자 시험성적서’라고 쓰인 결과지를 꺼내 지헌에게 보여주었다.
“자! 보고도 못 믿겠어?”
몇 장의 결과지 가장 앞면의 하단에, ‘친자확률(%) : N’이라는 결과가 굵은 글씨로 박혀 있었다. 지헌은 결과지를 넘겨받아 차분히 훑고는 차갑게 비웃었다. 어머니가 예나한테 접근했구나. 그러고선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구나. 이젠 어머니를 조금도 믿을 수가 없었다.
“검체물은 어떻게 얻으셨죠? 예나한테 어떻게 접근하셨나요.”
지헌이 추궁하자 영미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이쯤에서 아들이 충격을 받아 무너져야 하는데, 과거를 반성하고 후회해야 하는데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 당황한 것이다. 이제 지헌은 더 날렵해진 눈으로 영미를 쳐다보았다. 모자 관계보다는 진실에 집중한 눈이었다. 혹시 예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데 가담했다면 아무리 어머니라도 신고할 수밖에 없겠단 마음으로.
“혹시 예나를 유괴하려고도 하셨나요?”
“무, 무슨……!”
“예나의 유괴사건에 가담하셨어요?”
“유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영미는 영미 나름대로 억울하여 버럭했다.
“어떻게 예나와 정오의 존재를 아셨죠? 언제부터 알고 계셨죠?”
지헌은 집요하게 따졌다. 흥분하여 소리치는 영미와 달리 지헌은 내내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였다. 그래서 무시무시했다. 숨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는 아들의 공격에 놀란 영미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얼마 안 됐어! 딱 이틀 됐다! 그것도 은비가 찾아와서, 이정오 이정오 하면서 하소연을 하길래 알게 된 거야!”
“채은비가 이정오라는 이름을 말하자마자 어머니께서는 예나의 친자 검사를 하셨고요.”
지헌은 싸늘하게 조롱조의 웃음을 흘렸다. 서서히 윤곽이 잡혔다.
“어머니는 7년 전에 제가 정오를 만났다는 걸 아셨군요.”
결국 영미는 그 모든 것을 털어놓은 꼴이 되었다.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다시 확인했을 뿐이라 지헌의 입장에서는 크게 놀라울 것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실망한 마음은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겠지만. 지헌은 다시 한번 결과지를 살펴보았다.
“친자 검사는 어제 했고, 어제 결과지까지 받으셨네요. 검체물은 연구소에 직접 갖다 주셨나요?”
“…….”
“최 기사님 시키셨겠죠. 그럼 최 기사님은 믿을 수 있을까요?”
영미는 자신을 제 손바닥 위에 둔 것처럼 진실에 접근해가는 지헌의 예리함에 소름이 끼쳤다. 최 기사는 지헌의 집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영미를 기다렸다. 어젯밤, 영미가 대뜸 전화해서는 새벽 6시에 아들의 집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주 불만스러웠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 군소리 없이 알겠다고 했다. 겨우겨우 쏟아지는 잠을 물리치고 일어나 장영미 여사를 태우고 지헌의 집까지 온 최 기사는 영미가 아주 늦게 나왔으면 했다. 좀 더 오래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일찍 나왔다. 게다가 그녀의 아들, 정지헌도 함께였다.
“기사님 안녕하셨어요.”
“네. 이사님도 안녕하셨죠.”
“기사님, 죄송하지만 블랙박스 메모리카드 좀 확인하겠습니다.”
가볍게 인사한 지헌은 차 안으로 들어와 블랙박스 안의 메모리카드를 꺼냈다. 군더더기도 없이 빠른 움직임이었다. 최 기사는 영문을 모르는 채로 멀뚱히 서 있었다. 지헌이 메모리카드를 갖고 온 태블릿PC와 연결했다. 그리고 메모리카드에 담긴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어제 오후 4시경, 최 기사가 장영미 여사에게서 서류봉투를 건네받아 연구소까지 이동하던 그 시간의 동영상 기록. 중간에 채은엽 변호사를 만난 시간이기도 했다. 그때의 동영상을 확인한 지헌은 싸늘한 한숨을 내쉬었고 영미는 황당하다는 듯이 버벅거렸다.
“아, 아니, 은엽이가 왜, 왜…….”
최 기사가 자초지종을 대답하기 전에 지헌이 먼저 물었다.
“기사님, 어제 채은엽 변호사 만나셨죠?”
“아, 네…… 변호사님이 언젠가 전동자동차를 주겠다고 하셨는데, 어제 받았죠.”
“어제 그 사람이 기사님께 전화를 몇 번이나 했습니까.”
“한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지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미의 입은 크게 벌어졌다. 고상한 장영미 여사가 이토록 황당해하는 표정은 처음 보았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최 기사는 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더 이상 채은엽 변호사랑 연락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아예 차단하세요.”
최 기사는 곧장 지헌의 지시에 따랐다. 최 기사가 채은엽의 번호를 차단해버린 걸 확인한 지헌은 바로 영미에게 물었다.
“어머니, 채은엽한테 제 얘기를 얼마나 하셨죠?”
하지만 영미는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다. 봐 봐. 이게 뭔가를 바꿔치기할 만한 시간이니?”
동영상을 몇 번이나 되돌려보고도 진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블랙박스엔 내부를 비추는 장치가 없었다. 은엽이 차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긴 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찍혀 있지 않았다. 영미는 다시 소리를 높였다.
“난 검사 결과를 믿어! 네가 속고 있는 거야! 네가 정신 차려야지!”
“흥분하실 거 없어요, 어머니. 검사는 다시 하면 되죠.”
사람은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나면 현실을 부정하는 법. 지헌은 어머니가 지금 그 과정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100% 제 말이 맞겠지만 혹시나 아니라고 해도 제 마음이 변하지는 않아요.”
어머니가 경멸스러웠지만 지헌은 끝까지 점잖게 말했다.
“이제 그만하세요.”
“…….”
“어머니 때문에 아이가 아빠 없이 6년을 살았어요. 나중에 그 애를 어떻게 보시려고요.”
* 이른 아침.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국순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주방에 서 있던 정오가 국순이 나온 것을 보고는 헤헤 웃었다. 살다 보니 딸이 주방일 하는 걸 다 본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엄마 살림을 다 망쳐놓으려고 작정을 했나.”
“아니야. 어제 엄마가 이것저것 많이 해서 집에 먹을 게 많으니까. 내가 그냥 데우기만 해도 되잖아.”
“됐어. 회사 갈 준비나 해.”
국순은 정오가 들고 있는 프라이팬을 빼앗았다. 정오는 그런 엄마의 팔을 문질러대며 아양을 떨었다.
“엄마, 어제 힘들었지.”
“…….”
“지헌 씨가 엄마 너무 고생하셨다고, 죄송하다고 전해드리래.”
“뭘 또. 됐어.”
“…….”
“예나 아빠가 더 고생했겠지. 게다가 제 딸내미한테 나가라는 소리까지 듣고.”
“그러게…… 험난하다 험난해.”
정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국순은 당황한 지헌의 표정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조용히 헛기침했다. 딸이나, 딸의 남자나, 왜들 그렇게 귀엽고 난리인지.
“에혀…… 생각하니까 너무 안됐네, 정지헌 씨.”
“그런 시행착오가 있어야지. 그럼 거저 아빠가 될 줄 알았어?”
“…….”
“곱게만 자랐을 텐데 거친 땅도 밟아보고 매운맛도 알고 그래야지. 그래야 아빠가 되지.”
“에혀…….”
“상심할 거 없어. 얼마 안 있으면 너는 쏙 빼놓고 둘이서만 놀걸?”
“에이 설마.”
“어디 두고 봐라.”
국순의 호언장담에 정오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 예나의 등원길. 오늘도 집 앞에는 지헌이 있었다.
“예나 잘 잤어?”
흥. 예나는 자연스럽게 콧방귀를 뀌고는 정오의 손을 꼭 잡고서 앞서 걸었다. 어젯밤처럼 울며 소리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예나의 마음도 지헌의 마음도 너무나도 이해되는 처지라 정오는 운명이 야속할 뿐이었다. 지헌은 두 사람을 졸졸 쫓아갔다. 하지만 다른 말을 건네지는 못했다. 이 예비 가족의 가장 큰 상전은 7살 꼬맹이 이예나였다. 예나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까 봐, 이 아침에 어린이집 버스도 타지 못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지헌은 내내 눈치만 보았다. 그렇게 예나가 떠나고.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어린이집 버스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든 지헌이 정오에게 오늘 새벽의 일을 전했다.
“예나가 어제 어머니를 만난 것 같아.”
“오빠의 어머니?”
“예나 학원 가는 길에. 아마 어머니가 예나의 머리카락을 가져갔을 거야.”
아! 정오는 손뼉을 짝 쳤다.
“맞아, 맞아! 예나가 얘기했어. 어떤 아주머니 팔찌가 머리에 걸려서 머리가 헝클어졌다고 그랬었어.”
지헌이 마음 상할까 싶어서 그 아주머니가 예나에게 오만 원을 건넸다는 말까지 하지는 못했다. 너무 안타깝네. 손녀딸과의 첫 만남을 그렇게 손수 망치시다니.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정오가 물었다.
“그래서, 예나 머리카락 가지고 친자확인 검사를 하셨대?”
“했는데, 친자 가능성이 없다고 나왔대.”
정오가 속상해할까 싶어 지헌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지헌의 예상과는 달리 정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풉. 무슨 검사를 하신 거야. 예나 말고 도빈이 머리카락을 쓰셨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가려지겠나. 검사는 다시 하면 되지.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뭐가?”
“예나가 친자가 아닐 수도 있잖아. 의심 안 해?”
“채은엽이 다 조작했을 거야. 기사님이 어머니한테 자료를 전달받아서 연구소로 가는 도중에 채은엽을 만났어.”
“아니.”
“…….”
“그냥 솔직하게 말이야. 정말로 예나가 오빠 친딸이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의심 안 해?”
지헌이 이성적으로 넘긴 질문에, 정오가 앙탈 부리듯 눈을 깜빡거리며 거듭 물었다. 자신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이 다분한 표정이었다. 그런 데에 걸려드는 바보도 아니었지만, 지헌은 처음부터 의심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 절대 그녀를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 불안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잡음을 일으키려 끼어든다면 참지 않겠다.
“안 해.”
“…….”
“내 옆에 있어.”
“…….”
“내 옆에만 있어.”
지헌은 짤막한 대답과 함께 솔직한 감정을 얘기하며 정오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정오는 어젯밤 예나가 잠결에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나 떠나지 마, 엄마.”
어쩌면 이렇게 부녀가 닮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