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애타는 짝사랑2022.01.22.
이정오의 간교에 보기 좋게 당했다. 은엽은 일생일대의 당황스런 순간을 맞이하였다.
“변호사님, 왜 말씀을 못 하시나요? 정말로…… 변호사님 이름은 하진철이 아니에요?”
정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이제야 은엽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은 것처럼 추궁했다.
“지금 저 너무 당황스러운데요. 왜 사칭을 하셨나요? 변호사인 건 맞아요?”
물론 은엽은 알고 있었다. 정오가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는 걸. 은엽이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으니 정오가 지헌에게 물었다.
“이사님. 근데 혹시 채은엽이라면…… 채은비의 오빠 아니에요?”
“그렇죠.”
“어머! 제가 고소하려고 했던 사람이 채은비인데!”
이 가증스러운 연극은 계속 이어졌다.
”그럼 이봐요, 일부러 접근하신 거예요? 제가 은비 고소 못 하게 하려고?”
“…….”
“아니, 채은비가 부탁했나요?”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이정오 씨. 억지도 심하시고.”
겨우겨우 생각을 정리한 은엽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제가 언제 하진철이라고 했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채은엽이라고 했는데 이정오 씨가 잘못 알아들었죠.”
증거는 없다. 없을 것이다. 회사 데스크에서 딱 한 번 이정오에게 하진철이라고 소개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그 이름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데스크 직원의 입막음도 쉬운 일일 테니 지금 이 상황만 잘 넘기면 되는 것이다.
“그랬잖아요! 로펌 사무실 로비에서!”
정오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따졌다.
“몹시 불쾌하네요. 본인이 일부러 잘못 불러놓고 제게 덤터기를 씌우려 하다니.”
은엽은 또박또박 말했다.
“게다가 공짜 상담까지 해드렸는데, 오늘도 바쁜 시간 쪼개서 이렇게 이정오 씨를 만나드리고 고소장을 써주겠다고까지 했는데, 호의의 결과가 이런 거라니.”
“…….”
“이메일로도 그렇고, 계속 제 이름을 잘못 부르시기에 씁쓸했는데 이런 함정을 파두고서 저를 몰아넣을 계획이었군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정오 씨.”
“변호사님, 제가 받은 이메일 기록이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은엽이 계속 우겨대니 정오가 휴대폰을 들었다. 이메일 기록을 들이밀 생각이라는 것이 잘 읽혔다. 은엽은 옅게 코웃음 쳤다. 이메일에도 주구장창 정오가 하진철이라고 불러댔을 뿐, 은엽이 직접 사칭한 증거는 없었다. 이를 깨달은 정오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사람 이름 멋대로 잘못 부르지 마시죠. 이정오 씨.”
은엽의 질타가 이어지는 동안 지헌이 정오의 휴대폰을 가져갔다.
“내 눈에는 네가 거짓말을 하는 걸로 보이는데, 채은엽.”
정오의 이메일을 모두 살핀 지헌이 말했다.
“이메일이 이렇게 왔다면 정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고객에게 진실해야 할 변호사가, 제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딴 이름으로 불렸는데 바로잡지 않는다는 건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실제로 너희 회사에 하진철이란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는 일인데.”
지헌이 은엽의 성의 없는 태도를 지적하자 은엽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처럼 사칭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려면 네가 진작 제대로 바로잡았어야지. 왜 그랬어. 이건 네 회사에도 먹칠을 하는 짓인데.”
“…….”
“그 로펌이 일하는 방식은 아주 불쾌하네. 내가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순 없어. 회사에 전해. 맥스기획과의 계약은 전부 파기한다고. 신뢰할 수 없는 변호사와는 일할 수 없지.”
“…….”
“아니다. 내가 직접 연락할게. 네가 또 어떻게 전할지 믿음이 안 가서 못 맡기겠어.”
“지헌아, 그건 네가 결정할 게 아니라 회사 대표가 결정할 일이지. 너는 맥스기획 대표는 아니잖아.”
은엽은 겨우겨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비꼬아댔다. 이렇게 된 이상 은엽 또한 발톱을 완전히 감출 필요는 없었다. 일개 직원의 호출에 본부의 이사가 동료로 나선다는 것 또한 지적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헌아, 혹시 이정오 씨랑 각별한 사이는 아니겠지?”
짐을 모두 챙겨 꼿꼿이 선 은엽은 지헌을 지나치며 지헌의 귀 가까이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지헌아,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사람은 가려 사귀어야지. 어머님 놀라셔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오늘은 먼저 갈게. 정말로 이동 중에 간신히 시간을 낸 거라서 말이야. 우리는 나중에 따로 만나자.”
지헌에게 짤막하게 충고한 은엽은 곧장 테이블을 떠났다. 여유로운 척했지만 진땀이 났다. 그들에게 잡힐세라 성큼성큼 걸었다. 마지막 몇 걸음은 거의 뛰다시피 했는지도 모르겠다. 카페를 떠나 주차장 쪽으로 한참 움직이고서야 조용히 숨을 돌린 은엽은 카페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이정오와 정지헌. 두 사람은 서로 공대를 하고 있었다. 정지헌이 이정오를 꽤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두 사람이 연인 사이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았다. 지난 금요일, 이정오가 회사에 찾아왔을 때는 정지헌과 이정오가 아무 사이도 아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라면 이정오가 무료상담을 받으러 찾아오지도 않았을 터. 일주일 동안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진 걸까? 이정오가 정지헌에게 이예나의 존재까지 모두 털어놓았을까? 그렇다면 자신이 이예나의 머리카락을 바꿔치기했던 일은 헛수고가 되어버린다. 물론 잠깐 동안이야 혼란을 줄 수 있겠지만.
“하, 버러지 같은 것들!”
은엽은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왜 이렇게 헷갈리게 하는 거야!
* 승규는 빨리 퇴근하고 싶어서 엉덩이가 계속 들썩거렸다. 아니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퇴근시각이 되자마자 총알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승규는 오랜만에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여보, 여보, 여보, 여보!”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빠 왔다’가 아니라 ‘여보’를 연거푸 네 번이나 부른 건 참 오랜만이었다.
“왜, 왜, 왜!”
도빈의 방에서 정리정돈에 대해 가르치고 있던 진서가 남편의 호들갑스러운 외침에 헐레벌떡 거실로 나왔다.
“아빠아!”
“아빠, 아빠!”
도빈과 도윤도 달려와 승규를 맞았다.
“어. 그래그래. 우리 도빈이 도윤이 엄마 말씀 잘 들었어?”
승규가 도빈과 도윤을 한 번씩 안아주는 동안 진서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채근했다.
“왜 그래. 뭐가 잘못됐어? 무슨 문제야.”
“하…… 엄청난 소식이 있어.”
승규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는 듯 희열에 가득찬 눈으로 대답했다.
“뭔데. 뭔데 그래.”
“허허허.”
승규는 아이들끼리 놀 수 있도록 두 아이를 거실에 데려다놓고서 진서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예나 친아빠가 누군지 알아?”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연예인이야?”
“허허허허.”
“아, 누군데!”
“정지헌이야.”
“……오늘 만우절이야?”
“아니. 진짜라니까! 지헌이한테 직접 들었다고. 지헌이가 그동안 기억상실증이라 이정오 대리를 기억하지 못한 거였어. 이정오 대리는 그것도 모르고 실연당했는 줄 알고 혼자서 예나를 키운 거고.”
“정마알? 말도 안 돼!”
“진짜, 진짜라니까!”
“세상에…….”
진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승규는 이제야 속이 시원해졌다.
“대박이지? 자기는 선견지명이 있나 보다. 자기가 두 사람 안 이어줬으면 어쩔 뻔했어.”
“세상에, 웬일이야, 웬일이야…….”
놀란 가슴에 손을 올리고서 웅얼거리던 진서가 물었다.
“그럼 정오 씨는 어떻게 되는 거야? 지헌 씨 어머니가 엄청 무서운 사람이라며.”
“잘되겠지. 애가 있는데. 그 집안에서 첫 번째 손녀딸인 거잖아.”
“그럼 지헌 씨랑 정오 씨랑 살림 합칠 거래?”
“아직 거기까지는 못 들었는데.”
“에그…… 제발 이제 고생 좀 덜 했으면 좋겠네, 정오 씨.”
진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정오네 집안의 평안을 기도했다. 그 찰나에 밖에서 와장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서와 승규는 동시에 거실로 나갔다. 냉동실 문이 열려 있고 얼음통의 얼음들이 바닥에 온통 쏟아져 있었다.
“잘못했어요!”
도빈이 진서에게 혼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절절하게 두 손을 모은 아들의 호소에 진서는 한숨을 내쉬고서 팔을 뻗었다. 팔을 쭉 뻗는 순간 한 대 맞는 줄 알고 흠칫하는 아들이 애처롭고도 사랑스러웠다.
“아들. 앞으로 얼음 먹고 싶으면 엄마한테 얘기해. 알았지?”
“……응.”
“사랑해, 아들.”
진서는 도빈을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생각해보니 도빈이 예나를 그토록 좋아하지만 않았다면, 자신 또한 승규의 말에 따라 정오와의 관계를 정리했을지도 모르겠다. 선견지명은 아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엄마 왜 그래? 또 내 장난감 실수로 버렸어?”
얼음통을 쏟고도 혼나지 않아 의아해진 도빈이 진서에게 물었다. * 정오는 회사로 다시 돌아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끝내고 지헌과 함께 퇴근했다. 카페에선 은엽을 더 몰아붙이지 못했다. 역시 은엽은 용의주도하게 행동했고 함정에서도 재빨리 빠져나갔다.
“어쨌든 더 이상 채은엽이 오빠한테 접근하진 않을 테니 이걸로 됐어. 오빠 어머님이 걱정인데…….”
“어머니도 조심스럽긴 할 거야. 채은엽의 모습이 담긴 블랙박스를 보여드렸으니. 내 앞에서는 고집을 부리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의심이 커지겠지.”
“응. 다행이야.”
“오늘 정말 잘했어.”
“그렇지? 나 연기 너무 잘하는 것 같아.”
“그러게. 배우가 따로 없더라.”
지헌은 진심이었다. 이정오의 말은 뭐든 곧이곧대로 믿게 되는 지헌에게 오늘 정오의 연기 또한 탁월하게 보였을 수밖에 없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지헌이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예나에 대해서 승규한테 다 얘기했어.”
“그럼 곧 도빈이네 가족 다 알게 되겠네?”
“아마 이미 얘기했을걸. 진서 씨한테 얘기하고 싶어서 몸이 달았을 테니.”
“다들 많이 놀라겠네.”
“혹시 회사에서 승규가 괜히 호들갑 떨면 나한테 말해.”
지헌은 오늘 아침 집무실에서 승규가 꽤나 크게 놀랐던 게 생각나 정오에게 일러두었다. 정오는 다른 생각이 나서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서 물었다.
“박승규 차장님이랑 오래전부터 친했다며. 왜 7년 전엔 나한테 소개 안 시켜줬어?”
“…….”
“오빠는 친구고 누구고 아무도 소개 안 시켜줬다고.”
정오의 지적에 지헌의 웃음기도 사라졌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
“너를 뺏길까 봐 불안했나?”
“으응? 그 당시에 진서 씨랑 만나고 있었을 거 아니야.”
“아, 그랬겠지?”
“…….”
“그래도 불안했나?”
지헌이 오른손을 쭉 뻗어 정오의 머리칼과 귓불을 건드리며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며칠간 과거를 파헤치느라, 그리고 예나의 일로, 정오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마음껏 안아보지는 못했다. 지금 역시 그랬다. 그가 잠잠히 간질이니 그녀는 얼른 분위기를 환기시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주말에 뭐 할 거야?”
“없어. 아무 일 없어.”
지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단언했다. 어떤 스케줄이든 그녀가 원한다면 제칠 수 있기 때문에.
“그래. 그럼 예나랑 같이 놀자. 얼굴을 많이 보여줘야 예나도 얼른 마음을 바꾸지.”
정오의 제안에 팔에 쭉 힘이 빠졌다. 과연 내가 놀자고 하면 예나가 받아주긴 할까……. 지헌에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그룹 회장님보다, 장모님보다 더 무서운 예쁜 딸 예나.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져 살아왔던 남자의 애타는 짝사랑이었다. 지헌과 정오가 탄 차는 늦지 않게 시장에 닿았다. 정오가 먼저 식당에 들어가 문을 열었다. 영업 끝난 식당의 홀은 어두웠다.
“다녀왔습니다.”
“엄마아!”
정오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간 예나는 뒤따라 들어온 지헌을 발견하고는 입술에 꽉 힘을 주었다.
“예나 안녕.”
흥. 예나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주방으로 갔다.
“어, 왔어?”
주방에서 출입문을 들여다 본 국순이 환영했다. 지헌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정오는 어색한 발걸음으로 주방에 들어서는 지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예나에게 말을 걸어보라는 신호였다. 지헌이 빠르게 알아듣고는 평상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아 예나에게 말을 건넸다.
“예나야, 토요일에…….”
자신에게는 그토록 진취적이었던 직진남 정지헌이, 예나한테는 꼼짝을 못 한다. 한마디 한마디 조심하며 어렵게 말을 꺼내는 지헌이 안쓰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정오였다.
“……아빠랑, 자전거 탈까?”
아빠랑. 지헌의 물음에 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지헌을 쳐다보다가 평상을 떠나 국순의 바지를 붙잡았다.
“할머니, 토요일에 군산에 갈래!”
“우리 강아지 군산에 가고 싶어?”
“응. 가고 싶어. 식당 할머니도 예나 보고 싶다고 그랬잖아.”
야무지게 할머니를 설득한 예나가 고개를 돌려 정오에게도 말했다.
“엄마, 같이 군산 가자.”
지헌이 낄 자리는 없었다. 지헌은 예나를 향하여 지은 고운 미소를 풀지도 못한 채 멀거니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