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그런 날이 오려나 (78/183)

78. 그런 날이 오려나2022.01.26.

정오와 지헌은 국순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미 밥을 먹은 예나는 정오 옆에 앉아 계속 정오에게 말을 걸었다. 이유는 하나. 정오와 지헌이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하려고. 야박한 따님 덕분에 지헌은 꿋꿋이 밥만 먹는 외로운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식당을 다 정리하고 집에 갈 때도 예나는 고집을 피웠다. 지헌의 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겠다고. 결국 지헌은 식당 앞에서 모두와 인사했다. 그렇게 아무 수확이 없었던 하루. 하지만 지헌은 쉬이 떠나지 못하고 차를 끌고 정오의 집 앞으로 갔다. 근처에 방이라도 알아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어차피 매일 아침저녁으로 왔다 갔다 할 테니.

16551156414017.jpg‘아닌가. 조금 더 기다릴까.’

언젠가 결혼할 테니 다 같이 살 만한 집을 구하는 게 좋겠지.

16551156414017.jpg‘건물을 사서 손볼까.’

방 하나 얻을까 말까 하던 고민에서 출발했는데, 어느덧 지헌의 생각은 주택을 매입해서 내부 인테리어 공사까지 의뢰하는 데에 이르렀다. 머리가 앞서니 마음은 절로 뒤따라갔다. 새집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면 설레기도 했고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새집에서 더욱 행복해질 예쁜 아내와 자상한 어머니와 귀여운 딸. 귀여운 딸……. 줄기차게 자신을 외면하던 예나가 다시 그를 절망의 숲으로 이끌었다. 우리가 같은 집에 살며 함께 웃고 떠드는 날이 올까. 언젠가 정말 올까.

16551156414017.jpg‘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아빠 마음을 참 많이 애태우네.’

정오가 그랬던 것처럼, 지헌도 정오와 예나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정오에게는 10시가 넘어서 연락이 왔다.

16551156414032.jpg[집에 들어갔어?]

16551156414017.jpg“아니. 여기 빌라 앞이야.”

16551156414032.jpg[뭐어? 어휴. 못 살아.]

못 살겠다고 하면서 정오는 바로 달려 나왔다. 지헌은 정오와 재회하자마자 예나에 대해서 먼저 물었다.

16551156414017.jpg“예나는 자?”

16551156414032.jpg“응. 그러니 내가 나왔지.”

후우우. 지헌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서 정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애처로운 듯하여 정오가 물었다.

16551156414032.jpg“왜?”

16551156414017.jpg“아니, 그냥.”

16551156414032.jpg“…….”

16551156414017.jpg“부러워서.”

정오가 훗, 웃었다.

16551156414032.jpg“예나가 나만 좋아해서?”

16551156414017.jpg“응.”

16551156414032.jpg“언젠가는 오빠랑 예나가 짝꿍이 될 거야. 두 사람 취향이 닮았으니까.”

정오가 지헌의 마음을 헤아린 듯 고운 말로 격려했다. 지헌은 쓰게 웃었다. 그런 날이 오려나. 과연 올까.

16551156414017.jpg“세상 그 누구한테도 질투심을 느껴본 적이 없거든. 근데 넌 내가 부러워할 만한 걸 다 가지고 있어. 이정오, 이예나, 어머니.”

16551156414032.jpg“우리 엄마한테도 질투해?”

16551156414017.jpg“좋은 가족 말이야.”

지헌의 대답에 정오는 그가 너무나 애틋해졌다. 나도 어서 당신의 가족이 되어주고 싶다. 많은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처럼 이따금 몹시도 슬퍼 보이는 이 남자를 많이 사랑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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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날. 정오는 전날과 다름없이 지헌과 함께 출근했다. 꾸역꾸역 아침부터 예나를 만나러 와서는 예나의 매정함에 시무룩해진 지헌을 보니 너무 짠해서, 딸이 차가운 만큼 엄마는 따뜻해야 균형이 맞을 것 같아서 회사까지 같이 가자는 그의 청을 들어주게 되었다. 왠지 그가 일부러 더 청승을 떨어서 자신을 차 안으로 유도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16551156414032.jpg“여기, 여기! 여기서 세워줘.”

그래도 언제나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오는 회사 근처에서 악착같이 차를 세웠다.

16551156414017.jpg“이게 더 이상해 보이겠다. 그냥 근처에서 만났다고 하고…….”

16551156414032.jpg“고마워. 이따가 회사에서 봐.”

정오는 지헌의 설득을 들어볼 생각도 않고 바로 차에서 내려 부지런히 걸었다. 경호하듯 천천히 정오의 옆을 지키던 차가 그녀의 살벌한 눈짓에 결국 먼저 떠났다. 정오는 한숨을 내쉬며 앞뒤 양옆을 살폈다. 혹시나 회사 동료가 있을까 해서.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뒤편에서 고은주 대리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16551156414032.jpg‘봤을까? 봤으면 어떡하지?’

고은주 대리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정오를 발견하고도 뛰어가기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만 까딱 들어 보이고는 사뿐사뿐 걸어왔다. 움직이는 걸음걸음에 도도한 기품이 넘쳐 흘렀다. 은주를 기다리는 동안 정오의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렀다.

16551156414032.jpg“고 대리님, 좋은 아침이에요.”

16551156477157.jpg“별로요.”

16551156414032.jpg“왜, 왜요?”

16551156477157.jpg“회사 가기 싫어서요.”

못 봤구나! 은주의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 냉소적인 대답이 어찌나 고맙던지. 은주의 앞길에 꽃잎을 뿌려주고픈 기분이었지만 크게 내색은 할 수 없기에 정오는 적당히 맞장구쳐 보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56414032.jpg“하하. 그렇죠. 그래도 오늘이 금요일이니 다행이에요. 이번 주는 편히 쉴 수 있겠네요.”

16551156477157.jpg“글쎄요. 과연.”

16551156414032.jpg“…….”

16551156477157.jpg“어쩐지 주말 근무의 조짐이 느껴져요.”

하지만 끝까지 은주의 반응은 냉했다. 그리고 정오는 한 시간 후에 고은주 대리의 감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원주류 담당 AE가 달려온 것이다.

16551156506237.jpg“팀장님, 이거 보셨어요?”

태블릿 PC를 들고 달려온 AE가 미란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박영광 차장과 정오도 일어나 미란의 옆에 섰다. 신제품 맥주 광고였다. 그런데 패키지 디자인이 다원주류에서 준비하는 신제품과 아주 유사했다. 상표 이미지는 달랐으나 상표를 감싼 디자인이 비슷해서 언뜻 보면 착각할 것 같았다. 광고주는 패키지 디자인까지 상표등록을 하지는 않았다. 법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16551156506237.jpg“오늘 출시되는 상품이고 전국 매장에 쫙 깔릴 거예요. 오늘 밤 10시에 온 매체에 광고 온에어될 거고요.”

미란은 허탈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광고주가 패키지 디자인을 결정하지 못하는 바람에 광고 촬영까지 늦춰졌는데 디자인을 결정하자마자 이런 일이 터진 것이다.

16551156414032.jpg“신제품이라서 더 문제가 되겠네요. 광고주는 알아요?”

16551156506237.jpg“당연히 알죠. 그쪽도 지금 회의 중일 거예요.”

정오의 질문에 AE가 답했다.

1655115650625.jpg“이사님은 아시고?”

미란의 물음에는 AE가 고개를 저었다.

1655115650625.jpg“같이 가서 보고하죠.”

미란이 앞장섰고 AE가 뒤따랐다. 남은 팀원들은 침울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패키지 디자인을 열 번 이상 수정하고 겨우겨우 광고 시안까지 통과시켰는데, 당장 화요일이 촬영인데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다. 30분 만에 성미란 팀장과 AE가 지헌과 함께 돌아왔다.

16551156414017.jpg“패키지는 변경하기로 했습니다. 상표만 남기고 모두 들어내도 된다고 합니다. 다만 디자이너 쪽으로 레퍼런스 컬러를 보낼 테니 컬러는 그쪽을 참고해달라네요. 오늘 저녁 6시까지 1차 시안을 보내야 합니다. 되도록 한 번에 컨펌받도록 힘써봅시다.”

지헌이 결단력 있게 말했다. 이곳저곳에서 탄식 소리가 들렸다. 주말은 이렇게 사라지게 되었다. 정오 또한 안타까웠다. 예나와 함께 군산에 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를 인지한 지헌이 회의실로 향하는 정오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16551156414017.jpg“너는 가.”

16551156414032.jpg“네? 어디를요?”

16551156414017.jpg“주말 근무하지 말고 군산에 다녀오라고. 카피라이터가 꼭 필요한 작업은 아니야.”

16551156414032.jpg“어휴, 이사님. 공과 사는 구별합시다!”

광고주가 까탈스러워서 패키지를 바꿀 때마다 TV 광고까지 수정하길 원할 텐데 필요가 없긴. 정오는 지헌의 편애에 학을 떼며 회의에 들어갔다. 캠페인 콘셉트와 광고 제작 시안이 확정된 후에 담당에서 물러났던 제작 1팀도 회의에 참석했다.

16551156506237.jpg“말이 쉽지 몇 시간 만에 뚝딱 어떻게 바꾸냐고.”

안찬섭 팀장이 불평했다. 팀원들이 아니라 클라이언트를 향한 불평이었다. 하도 답답해서. 다른 팀원들도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이미 제작 회의를 수없이 거듭하며 아이디어는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침묵이 오랫동안 이어진 가운데 미란이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1655115650625.jpg“상표 주변에 색을 넣거나 문양을 넣을 수밖에 없겠네. 참 어렵다. 엄청 눈에 띄게 하자니 아이덴티티를 훼손한다고 할 테고 눈에 안 띄게 하자니 대체 한 게 뭐냐는 말을 들을 것 같고.”

16551156414032.jpg“아. 페이크아트!”

미란의 의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정오가 말했다.

16551156414032.jpg“멀리서는 브랜드 로고로 보이고 가까이에서는 메시지나 다른 그림으로 보이는 페이크아트는 어때요? 우리 광고랑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16551156535911.jpg“음, 잘만 하면 괜찮겠다.”

박영광 차장이 정오의 의견을 거들었다. 은주와 기훈도 나쁘지 않다는 듯 끄덕였다.

16551156414032.jpg“한번 만들어볼게요.”

1655115650625.jpg“그래. 일단 해보고, 그리고 다시 얘기하자. 나는 이사님께 보고할게.”

미란이 지시했다. 미란과 정오 덕에 회의가 빨리 끝났다. 디자이너들은 이제 시작이지만. 회의를 마친 후, 정오가 이전의 제품 패키지 시안을 붙인 우드락을 정리하려 하니 기훈이 다가왔다.

16551156535923.jpg“저 주세요. 제가 정리할게요.”

16551156414032.jpg“아니야, 얼른 가서 작업해. 기훈 씨는 몸을 아껴야지.”

16551156535923.jpg“에이, 이 정도야 뭐.”

기훈은 정오가 들고 있는 우드락 더미를 가뿐히 빼앗아 들었다.

16551156535923.jpg“솔직히 처음에 그 광고 보고 머리가 멍했는데 대리님 덕분에 반짝 빛이 들어온 것 같아요. 역시 존경스러워요, 대리님.”

존경이라고 말했지만 그 눈빛에는 존경보다 애정과 흠모의 감정이 묻어났다.

16551156414032.jpg“뭘. 아니야.”

정오가 멋쩍게 대답했다. 은주는 두 사람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기훈이 조금 딱하기도 했다. 이정오 대리를 볼 때마다 입이 헤벌쭉, 눈동자에는 별사탕이 굴러다니는데. 어쩌나, 저건 사랑인데. 송기훈 씨. 그러다가 너 상처 받아.

16551156535923.jpg“고 대리님, 하실 말씀 있으세요?”

은주의 눈빛을 수상하게 여긴 기훈이 물었다. 은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1156477157.jpg“아니. 없어.”

됐다. 내 일도 아닌데 뭐. 남의 복잡한 연애사에 끼어 한마디 더 보태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선 일만 하면 되는데, 이정오 대리의 그 이상한 마수에 걸려 팀원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우를 범할 뻔했다. 어후. 내가 요즘 너무 주책이네. 개인주의가 편한 건데. 은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먼저 떠났다. 오후 6시에 보낸 시안은 비교적 금방 피드백이 왔다. 하지만 한 번에 통과는 아니었다. 광고주는 내일 아침에 2차 시안을 보겠다고 했다. 디자이너들은 꼼짝없이 야근이었다. 다른 팀원들은 페이크아트를 삽입하게 된 당위성을 만들고 패키지 변경에 따른 광고 제작 수정안에 대해 회의했다. 정오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게 되었다. 잠시 사라져서 어디 갔나 했던 지헌이 회사 앞에 차를 대놓고 정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오는 누가 볼세라 냉큼 뛰어가 차에 올랐다.

16551156414032.jpg“빨리, 빨리 출발해. 빨리!”

정오는 차에 타자마자 좌석 등받이를 낮게 내리며 외쳤다. 지헌은 그런 정오의 행동에 자그마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회사와 한참 멀어져서야 정오는 등받이를 다시 세웠다.

16551156414032.jpg“예나 재웠다고 연락 왔어. 어차피 못 볼 텐데 왜 기다리고 있었어.”

16551156414017.jpg“그래도 데려다줘야지. 그리고…….”

정오의 질문에 당연하게 대답한 지헌이 흠, 목을 가다듬었다. 정오는 지헌이 조심스러운 얘기를 꺼내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16551156414017.jpg“나 잠깐 들어갔다 나오면 안 될까?”

16551156414032.jpg“응? 우리 집에?”

16551156414017.jpg“예나 자는 거 잠깐만 보고 나오면 안 될까?”

회사에서 내내 지엄하고도 든든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사님. 그 이사님이 말랑말랑한 짐승이 되어 자신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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