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아무것도 안 줄 거야2022.01.29.
정오는 웃음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지헌의 바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짠하기도 했다. 예나의 잠든 모습. 그건 못 참지.
“후우.”
“정 어려우면…….”
“아니야. 오빠를 너무나도 이해해.”
“…….”
“난 예나 자는 것만 천 번도 넘게 봤는데 여전히 못 끊어. 진짜 천사거든.”
사실은 잠든 예나를 괴롭히는 취미를 갖고 있다고, 잠든 예나의 손도 잡아보고 뺨도 건드려보고 뽀뽀도 한다고, 그것까진 말할 수가 없었다. 이 남자도 몰래 시도해볼 것 같아서. 금방 중독될 것 같아서.
“근데 자신 있어? 한번 보면 계속 생각날 텐데? 맨날 오고 싶어질 텐데?”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
“그건 안 되지. 애가 자는데 사진 찍겠다고 불을 켤 수는 없으니까. 플래시를 터트릴 수도 없고.”
“아. 하긴 그렇지.”
엄마로서의 거부에 지헌의 시름이 깊어졌다.
“일단 엄마한테 여쭤볼게.”
정오는 바로 국순에서 연락했다. 국순이 지헌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국순은 지헌이 딱하다는 양 혀를 스무 번쯤 쯧쯧 차다가 얼른 들어오라는 말을 남기곤 전화를 끊었다. 국순의 허락이 떨어지자 차는 더욱 빨라져 금방 정오의 집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에서 국순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헌이 먼저 인사했다.
“어머니,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자주 보네.”
“밤늦게 죄송합니다.”
“아니야. 어서 들어와.”
지헌은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든 예나를 만나는 첫날. 지헌은 얼굴만 잠깐 보고 나와야겠다고 다짐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오가 방문을 열어주었다. 어두운 방 안. 그나마 열린 방문을 통해 불빛이 들어와 어스름하게 잠든 아이를 볼 수 있었다. 하얀 뺨, 감은 두 눈 사이로 가지런하게 잠겨 있는 속눈썹, 얌전하게 닫혀 있는 통통한 입술, 새근새근 귀여운 숨소리. 모든 것이 지헌의 가슴속을 간질였다. 정말로 아기천사구나. 지헌은 조용히 탄식했다. 일곱 살 시절의 지헌은 곧잘 경련하며 꿈에서 깨어났다. 괴물과 싸우는 꿈을 꾸거나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는데 부모님께서는 키가 크는 꿈이라고 했다. 여전히 그는 이따금 ‘키가 크는 꿈’을 꾼다. 이미 성장은 멈춰버렸지만. 지헌은 아이의 꿈이 평화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세상의 그 모든 풍파를 막아주겠지만 꿈속에서는 지켜줄 수 없으니까. 가만히 바라보는 동안 아이의 손가락이 꼼지락 움직여서 지헌은 저도 모르게 그 손바닥에 제 손가락을 얹어보게 되었다. 예나가 지헌의 손가락을 꽉 쥐었다. 온몸에 찌르르 전율이 왔다. 아이의 작은 손에 계속 그렇게 꼭 붙들려 있고 싶어졌다. 밤새 그러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떠나는 게 아쉬운 그런 밤. 지헌은 독하게 마음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젠가 딸의 잠든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 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방문을 살그머니 닫고 나오니 국순이 물었다.
“과일 좀 줄까?”
“괜찮습니다.”
“먹고 가.”
이미 식탁 위에는 과일이 한가득이었다. 더 거절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지헌은 식탁 앞에 앉았다. 씻고 나온 정오도 촐랑거리며 주방으로 갔다.
“에이, 이 닦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안 닦았잖아.”
“닦았으면 먹지 마.”
“에이. 그래도 어떻게 안 먹나. 우리 여사님께서 여기 이렇게 손수 갖다 놔주셨는데.”
“너 먹으라고 갖다 놓은 거 아니야.”
“에이. 그래도 내가 안 먹으면 너 어디 아프니, 왜 과일을 눈앞에 두고 먹지를 못하니 하고 걱정할 거면서.”
“네 걱정을 왜 해. 농촌에 며칠 풀어놓으면 혼자서 소도 잡아먹을 애를.”
본인도 인정하는지 정오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지헌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가만히 모녀의 대화를 들었다. 이정오가 집에서는 이런 모습이 되는구나. 엄마 앞에서의 이정오는 지헌이 아는 이정오보다 훨씬 애교가 많고 활력이 넘쳤다. 집착과 통제뿐인 지헌의 가족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화목한 모습이었다.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평화롭고 따뜻한 밤.
“어서 먹어. 많이 먹어. 또 운전해서 가야 하는데.”
국순은 정오의 간질간질한 애교를 시큰둥하게 뿌리치고서 지헌의 접시에 과일을 올려놓았다. 지헌은 국순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다. 국순이 지헌이 먹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갑자기 일이 터져서 어떻게 하나. 내일 기차표도 다 끊어놨는데.”
“정오는 제외하도록…….”
“엄마랑 예나랑 둘이 다녀와야지 뭐.”
국순의 시름에 지헌이 곧장 목소리를 내었지만 정오의 말에 파묻혀버렸다. 지헌은 정오를 주말 근무에서 제외시키고 싶었으나 정오의 의지는 굳건했다. 국순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어쩔 수 없네. 전주 사는 친구까지 다 예나 보러 온다고 해서 가긴 가야겠어.”
지헌의 고개가 절로 겸손해졌다. 국순이 그런 지헌을 알아보고서 시원스럽게 말했다.
“에그. 죄인처럼 눈치 볼 거 없어요.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네…….”
“예나 없는 동안 둘이 좋은 시간 보내면 되겠네.”
국순의 개방적인 사고에 흠칫 놀란 지헌이 새색시처럼 수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국순은 몰래 실소를 지었다. 이 녀석. 네가 우리 정오를 어떻게 꾀어냈는지 나는 짐작이 가는데, 내 앞이라고 순수한 척을 다 하네. * 이른 아침. 예나는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 엄마를 깨웠다.
“엄마, 엄마 일어나. 아침이야!”
꿈속에서 예나는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어린이집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산타할아버지는 가짜라고 소리쳤는데, 꿈속의 산타할아버지는 허허허 웃으며 나는 진짜니까 만져보라고 말했다. 예나는 산타할아버지의 긴 수염을 잡아 당겨보았다. 수염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산타할아버지가 진짜란 걸 알게 된 예나는 환호하며 산타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의 손은 크고 따뜻해서 든든했다. 정말정말 신기하고 행복한 꿈. 그래서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엄마, 빨리 준비하고 예나랑 군산 가야지! 얼른 일어나!”
예나의 성화에 정오도 부스스 일어났다.
“예나야, 엄마가 할 말이 있는데.”
“…….”
“엄마는 오늘 예나랑 같이 군산에 못 가게 됐어.”
잔뜩 상기돼 있던 목소리가 금세 어두워졌다.
“왜?”
“회사에 일이 있어서 못 가게 됐어. 그래도 우리 공주님이 엄마 몫까지 재미있게 놀다 올 거지?”
예나는 눈물을 잔뜩 머금고 따졌다.
“왜 못 가? 아저씨가 또 일 시켰어?”
“아니야, 아빠랑은 상관없어. 엄마가 일이 많아서 그래.”
고집스럽게 아저씨라고 부르는 예나에게, 정오는 꿋꿋하게 ‘아빠’를 주지시켰다. 예나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서러울 뿐. 산타할아버지가 나오는 행복한 꿈을 꿨는데, 현실은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어린이날도 크리스마스도 생일도 아닌 평범한 주말에 크게 고집 피울 수 없다는 걸 예나도 알고 있었다. 예나는 최소한의 당부로 서러움을 삼켜냈다.
“엄마, 아저씨랑 놀지 마. 알겠지?”
* 예나는 정오가 출근하는 순간에 또 울음을 터트렸다. 국순이 숨겨두었던 아이스크림을 꺼내 겨우겨우 예나를 진정시켰다. 과연 오늘 군산에 갈 수는 있을지. 정오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집 앞에는 어김없이 지헌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시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반가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정오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오늘은 왜 왔어.”
“같이 출근해야지.”
“매일 이쪽으로 출근하는 것도 일이다. 차라리 오빠도 이쪽으로 이사 오는 게 낫겠어.”
정말로 그럴까 생각 중이었던 지헌이 빙긋 웃었다.
“예나가 많이 상심했겠네. 같이 못 가게 돼서.”
정오는 예나가 좀 전에도 울었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지헌이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을 끼워 넣을까 염려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늦지 않게 회사에 도착했다. 경쟁 PT도 끝났고, 이제 숨 좀 돌리나 했더니 또 주말 근무. 그나마 광고주가 바로바로 피드백을 주어서 다행이었다. 은주와 기훈은 패키지 시안을 다듬어 아침 일찍 광고주에게 전송했고 광고주도 얼추 만족했다. 그리하여 세세한 의견 교환 끝에 4차 시안, 저녁 6시에 이르러 제작팀도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헌이 정오에게 찾아왔다.
“이정오 씨, 퇴근할 거죠?”
“네. 이사님.”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갈까요?”
으아아아아. 이사님 네 이놈! 정오는 근처의 누군가가 듣지는 않았을까 싶은 마음에 바짝 쫄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지만 지헌의 무모한 발언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안 가! 절대!”
정오가 눈을 부릅뜨고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지헌의 입장에서는 아주 귀여운 발악처럼 보였다. 집으로 갈까요, 하고 제안을 가장하여 말을 걸었지만 실은 통보였다. 어머니께서도 인정하셨겠다, 좋은 시간 보내라고도 하셨는데 그 귀한 말씀을 귓등으로 들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혼자 재워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었다. 지헌은 으르렁거리는 정오를 두고 돌아서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회사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정오는 지헌의 기세에 밀린 것 같아 원통해하면서도 신속히 움직였다. 자신이 굼뜨게 행동하는 바람에 누군가 회사 밖에서 지헌을 발견하면 그것도 큰일이었다.
“와, 정지헌, 내가 진짜!”
일을 정리하고 후다닥 달려 나온 정오가 주차된 지헌의 차 문을 열며 씩씩댔다.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남들한테 들키고 싶어서.”
이 남자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게다가 내가 이렇게 으르렁거려봤자 그 뻔뻔함을 반성하지도 않지. 시치미를 뚝 떼고서 유유히 차를 운전하는 남자를 보니 얄미워서 한 대 때려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운전하는 사람을 때릴 수도 없고.
“오빠. 오빠 집에 가서 말이야.”
묘안을 떠올린 정오는 조곤조곤 말문을 열었다.
“엄청 좋은 선물 주려고 했는데 오빠가 너무 조심성이 없어서 마음이 싹 사라졌어.”
역시, 이 남자의 눈이 두 배로 커진 게 아주 잘 보였다.
“……어?”
“아무것도 안 줄 거야.”
“어?”
“안 준다고, 선물.”
“줘야지. 주려고 하고서 안 주는 게 어디 있어.”
하지만 당황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아주 나긋하게 설득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봤자 정오가 뜻을 굽힐 리 없는데.
“여기 있어. 안 줄 거야.”
“그럼 안 되지.”
“자업자득이지. 내가 기분이 좋아야 오빠한테 선물을 줄 텐데 내가 그럴 기분이 아니잖아.”
“……잘못했어.”
뒤늦게야 그가 꼬리를 내렸다. 정오는 하늘로 치솟으려는 입술 끝을 애써 내리고서 야무지게 물었다.
“뭘 잘못했는데?”
“회사에서 우리 집에 오라고 말한 거.”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건데?”
“……회사에서 알은척하는 건 조심할게.”
“정말이지? 믿어도 되지?”
“믿어도 돼.”
으하하하하. 정오는 잠시 참아온 웃음을 통쾌하게 터트렸다. 쉽게 조련당한 지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헌의 집 앞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저물녘이 되었다. 두 사람은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함께 움직였다. 엘리베이터가 한참 올라가야 하는 높은 곳이라 그런가,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정오는 조금 긴장하게 되었다. 둘만 있는 공간에서 이 남자가 어떻게 변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를 기억하는 심장이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왠지 더 오래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 10도 정도 뜨거워진 것 같기도 하고. 침묵은 어쩐지 더 불편한지라 정오는 씨익 웃으며 말을 걸었다.
“선물 지금 줄까? 내 가방에 있는데.”
“넌 그런 거 준비 안 해도 돼. 우리 집에 잔뜩 있으니까.”
정오의 콧구멍이 벌름 움직였다.
“……오빠, 대체 선물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