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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선물 (80/183)

80. 선물2022.02.02.

지헌이 당연하단 듯이 대답했다.

16551156950984.jpg“이정오 아니야?”

1655115695099.jpg“뭐어?”

와. 정지헌 바보. 안 그래 보이는데, 일할 때는 똑똑해 보일 때도 많은데, 둘만 있으면 놀라울 정도로 단순해지는 것 같다.

1655115695099.jpg“내가 왜 선물이야. 나는 인격체라고.”

어려운 과제를 만난 그의 눈동자가 뒤늦게 멍해졌다. 아니, 이정오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선물 같은 사람이고……. 지헌은 그녀가 무엇을 주려고 그러나, 추측할 수도 없었다. 선물을 제 뜻대로 정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16551156950984.jpg“근데 엄청 좋은 선물이라며.”

이정오 말고, 또 엄청 좋은 게 뭐가 있냐고. 네가 아니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없는데.

1655115695099.jpg“엄청 좋은 거지.”

16551156950984.jpg“그게 뭔데.”

이정오가 아닌 선물. 별로 궁금하지 않은 마음으로 지헌은 뚱하게 물었다. 정오가 그 속으로 들어갈 듯이 깊게 고개를 숙여 가방 안을 뒤적거렸다. 가방 안에서 손이 멈췄다. 선물을 찾은 거였다. 선물을 주는 처지에 선물을 받는 사람처럼 활짝 핀 그녀의 표정을 보니 그 또한 갑자기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 궁금해졌다. 대체 뭐길래.

1655115695099.jpg“짠.”

그녀를 따라 입꼬리를 올린 그의 눈앞에 정오가 사진 한 장을 바짝 갖다 대었다. 지헌이 그 사진을 건네받았다. 이거구나. 7년 전. 호주의 식당 ‘더 크라운’에서 찍은 사진.

1655115695099.jpg“우리 사진은 오래전에 다 지웠거든. 식당 주인 아저씨 덕에 하나 건졌어.”

16551156950984.jpg“하아. 내가 이 사진 때문에…….”

한숨이 나왔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사진 안에 가득 담긴 두 사람의 모습은 오누이처럼 보일 만큼 정다웠고 언뜻 닮아 보이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도 한참 동안 사진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으니 정오가 물었다.

1655115695099.jpg“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16551156950984.jpg“아니.”

1655115695099.jpg“…….”

16551156950984.jpg“사진 속의 내가 행복해 보여서.”

내가 이렇게 웃었구나. 이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구나.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그래서 기억할 것조차 없는 거라고 여겼던 그의 숨겨진 과거에도 이토록 빛나는 미소가 살고 있었다.

1655115695099.jpg“그때 오빠는 호주에서 여행 중이었는데, 이후의 일정을 다 취소하고 아파트를 빌려서 멜버른에 계속 있었어. 귀국할 때까지.”

지헌은 잠잠히 끄덕였다. 언젠가 7년 전 호주 여행에 대한 기록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멜버른이 마지막 여행지였던 것 같은데, 멜버른의 호텔에서 묵었던 기록은 3일밖에 되지 않아 의아했었다. 이후의 3주간은 어느 숙소에 머물렀는지를 알 수 없어 괜히 궁금했었는데 그랬던 거였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유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와 헤어지기 싫었던 거겠지.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이후의 여행을 취소했을 거야. 아마도 그때의 나 또한 너에게 첫눈에 반했었나 보다. 감상에 젖어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지헌에게, 정오는 또 하나의 선물을 내밀었다.

1655115695099.jpg“그리고, 이거 보면 더 행복해질 거야.”

아주 오래전부터 애타게 전해주고 싶었던 진짜 선물.

1655115695099.jpg“예나의 역사를 담아왔어.”

예나의 사진이 담긴 USB 메모리카드였다. 정오와 지헌은 거실 소파에 앉아 커다란 TV 화면으로 예나의 사진을 함께 넘겨보았다. 정오가 사진을 잘 정리해 와서 지헌은 예나의 성장 과정을 시간의 흐름대로 확인해볼 수 있었다. 정오는 수십 번도 넘게 본 사진들이지만 지헌은 난생처음이라, 사진 한 장 한 장 넘기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오는 오늘 안에 이 사진을 다 볼 수 있을까 싶었다. 갓 태어난 아기인가 시뻘건 고구마인가 의심케 하는 못난이 사진에도 지헌은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뿐만 아니라 동영상도 많았다. 우는 예나, 웃는 예나, 옹알이를 하는 예나, 뒤집기를 하는 예나……. 온갖 사랑스러운 예나의 모습이 지헌의 시선을 사로잡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예나가 웃으면 지헌도 같이 웃었고 예나가 울면 지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모든 순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느새 눈물막이 그렁그렁하여 그의 눈앞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지헌은 제 앞으로 티슈를 바짝 끌어다 놓았다.

1655115695099.jpg“예나는 사랑 많이 받았어. 엄마가 오빠 대신 많이 예뻐해줬어.”

군산 식당 아주머니와 한 살의 예나가 함께 찍은 사진을 넘기며 정오가 말했다.

1655115695099.jpg“식당 아주머니들도 다 친손녀처럼 귀여워해주셨어. 애가 울면 아주머니들이 한 번씩 다 안아주시고 놀아주시고 그랬어. 그래서 우리 예나는 말도 빨리 배웠고 넉살도 좋고 그래.”

이국순 여사는 지헌에게,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고 자책하지도 말라고 했지만 저 예쁜 모습을 모두 놓친 것은 두고두고 한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사진 속으로 들어가 예나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진 밖에서 더 귀엽고 더 예뻤을 아이……. 사진으로 다 기록되지 않은 순간들을 상상하니 눈시울이 마를 새가 없었다. 그 와중에 사진이 뚝 끊겼다.

1655115695099.jpg“어? 사진 다 담아온 게 아니었나?”

정오가 TV 앞으로 바짝 다가가 USB 안의 폴더들을 살폈다. 그러고서 한숨을 푸욱 쉬었다. 실수가 있었던 거였다.

1655115695099.jpg“중간에 파일 전송하다가 내가 자리를 비웠거든. 컴퓨터가 멈췄나 보다. 다시 담아다 줄게. 미안미안.”

16551156950984.jpg“아니야. 전부 가져왔다면 며칠 동안 잠도 못 잤을 거야. 봤던 거 한 번 더 보자.”

지헌의 제안에 정오는 다시 사진 파일을 재생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의 그 사진이 아닌 새로운 사진이 나왔다. 폴더 밖에 몇 장의 사진이 따로 들어 있었다. 예나의 태아 시절 초음파 사진이었다.

1655115695099.jpg“아, 이건 우리 예나가 배 속에 있을 때 사진이야.”

정오는 임신 15주가 넘어서야 병원에 갔다. 혼자가 무서워서 엄마에게 알린 후에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정오에게는 어제처럼 선명한 6년 전, 예나를 처음 만난 날. 정오는 입체 초음파로 예나의 모습을 확인했다. 엄마의 몸 안에 집을 짓고 작은 팔다리를 움직이며 꿋꿋하게 작은 세상을 버티는 아기가 참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엄마, 내가 있어. 엄마는 혼자가 아니야.’ 하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정오가 처음 확인한 생명의 위로였다. 그때를 떠올리니 정오 또한 마음이 젖어 들어갔다. 태아의 모습까지 확인한 지헌이 정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16551156950984.jpg“정말 힘들었을 텐데.”

1655115695099.jpg“…….”

16551156950984.jpg“고마워.”

귀여운 예나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정오를 향한 고마움이었다. 정오에게 바짝 앉아 다리를 겹친 지헌이 그녀의 허리를 더 가까이로 끌어왔다. 점잖고 차분한 낮은 목소리가 머리칼을 빗어주려는 것처럼 가까이서 곱게 울렸다. 목소리는 점잖았지만 입술은 그렇지 못했다. 예나가 옆에 있을 때는 할 수 없는 깊은 입맞춤이 몇 번 지나가는 동안 더욱 점잖지 못한 녀석이 그녀의 아랫배를 불쑥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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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술이 떨어지자 그는 같은 말을 다시 반복했다.

16551156950984.jpg“고마워, 정말.”

1655115695099.jpg“고마운 사람 치고 손이 좀 못된 거 같은데?”

정오가 웃으며 지적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상체는 그가 덮쳐오는 방향을 따라 아래로 내려앉고 있었다.

16551156950984.jpg“그건 네가 진짜 못된 걸 몰라서 그래.”

1655115695099.jpg“…….”

16551156950984.jpg“이건 보답이지.”

결국 그녀의 머리가 바닥에 닿았다. 지헌은 감질나게 드러난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감상하듯 오래 쳐다보았다. 아이가 머물던 자리를 확인하려는 듯이. 그리고 납작한 배를 감싼 커다란 손이 더 위로 전진하려는 순간. 드르르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정오는 벌떡 일어나 가방을 놓아둔 곳으로 달려갔다. 지헌이 막을 새도 없었다.

1655115695099.jpg“엄마야, 엄마.”

엄마한테 어린 딸을 맡긴 처지라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실은 언제든 예나가 부르면 달려갈 수 있도록 그녀는 계속 대기 중이었다.

1655115695099.jpg“여보세요.”

1655115703898.jpg[회사야?]

저편에서 국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지친 기색이 느껴지기도 했다.

1655115695099.jpg“어, 어. 친구들은 잘 만났어? 오늘은 어디서 자?”

1655115703898.jpg[친구들은 잘 만났고, 지금은 집에 가고 있지. 이제 거의 다 왔어.]

1655115695099.jpg“서울이라고? 왜?”

1655115703898.jpg[애가 군산에서 안 자겠단다. 엄마를 혼자 자게 둘 수가 없대. 나 원 참. 할머니 고생하는 건 생각도 안 한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효녀인지.]

국순이 기가 막히다는 듯 하소연했다. 정오는 멍하게 전화를 끊었다.

1655115695099.jpg“예나가 군산에서 안 자겠다고 떼써서 집으로 오고 있대. 거의 다 왔대.”

16551156950984.jpg“……가야겠다.”

지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가 부르면 달려가야 하는 부모의 숙명. 그 와중에도 집에 가고 싶다며 찡찡거리는 예나의 귀여운 얼굴이 떠올라 지헌은 가슴이 몽글몽글했다.

16551156950984.jpg“빨리 가자.”

생각하니 더 보고 싶었다. * 은엽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장영미 여사도, 최 기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자신을 차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정지헌에게 공들인 세월이 얼만데, 투자한 게 얼만데, 그 노고를 이렇게 수포로 만들어버리다니. 이정오와 채은비에게 화가 치솟았다. 은엽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직접 장영미 여사의 저택을 찾아갔다. 출입문 관리 경비와 친분이 있어 안으로 들어오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나, 건물 안에서는 문을 열어주지 않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10여 분이 지났을까. 직접 문을 열어준 사람은 장영미 여사였다.

16551157068683.jpg“어머니, 안녕하셨습니까.”

16551157068688.jpg“들어올 필요 없어. 내가 나가마.”

영미는 깍듯하게 인사하는 은엽에게 이전과는 달리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집 밖으로 나온 영미는 팔짱을 끼고서 물었다.

16551157068688.jpg“어쩐 일이니?”

16551157068683.jpg“부동산 문제로 전화를 드렸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찾아왔습니다.”

깍듯한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아들이 한 말이 있어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 영미는 결국 은엽이 원망스러운 마음에 답답한 심경을 드러내고 말았다.

16551157068688.jpg“하나만 묻자. 정말로 네가 친자 검사 결과를 조작했니?”

16551157068683.jpg“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은엽은 역시나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만약에 정말로 은엽은 모르는 일이라면, ‘친자 검사’라는 말이 도리어 화를 부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16551157068683.jpg“정확히 말씀해주세요, 어머니. 대체 그게 무슨 얘긴지 알아야 저도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은엽의 추궁에 영미는 난감해졌다.

16551157068683.jpg“친자 검사라니. 지헌이가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란 뜻인가요?”

16551157068688.jpg“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16551157068683.jpg“그럼 혹시 어머니의 숨겨둔 아이라도 나타났나요? 아니면 지헌이의 숨겨둔 아이?”

16551157068688.jpg“……됐다. 어서 가라. 우리 지헌이가 알면 넌 더 크게 망신당할 거야.”

영미가 은엽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듯 손을 저었다. 은엽의 눈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정지헌이 다 아는구나. 역시 이정오와 정지헌은 다 아는 거였어. 그렇다면…….

16551157068683.jpg“어머니, 어머니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은엽도 다른 술수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16551157068683.jpg“7년 전에 성우까지 동원해서 이정오와 지헌이의 사이를 끊어놓으셨죠.”

16551157068688.jpg“…….”

16551157068683.jpg“저도 이런 것까진 알고 싶지 않았는데 그 성우가 제 친구라서, 어쩌다 보니 알게 됐네요.”

은엽은 영미의 눈이 커지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다시 유리한 입지를 탈환했다. 은엽은 영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16551157068683.jpg“이해합니다. 이정오 같은 며느리는 집안의 수치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16551157068688.jpg“…….”

16551157068683.jpg“지금 그 이정오가 지헌이한테 붙어서, 은비와 지헌이가 헤어지게 만들어버렸죠. 은비랑 지헌이 사이가 그렇게 보기 좋았는데. 은비가 어머니께도 그렇게 잘했는데 말이죠.”

이럴 때는 무조건 선제공격이 유리한 법이다. 이정오가 친자 검사 결과서를 다시 만들어오기 전에 물밑에서 작업을 마쳐야 한다.

16551157068683.jpg“아, 이정오가 미혼모였죠? 혹시 친자 검사란 이정오와 관계있는 일인가요? 이정오가 지헌이의 친자를 키우고 있다고 주장하나요?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든 이정오가 친자 검사 결과서를 조작해서 가져올 겁니다. 어머니께서 믿으실 때까지 몇 번이고 말이죠.”

영미의 꽉 쥔 주먹이 부들거렸다.

16551157068683.jpg“어머니와 지헌이는 평생 뻐꾸기 새끼를 키우게 될 수도 있겠네요.”

은엽의 호언장담에 영미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혼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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